하느님의 계획과 사랑의 문명 그리고 진리의 가치
2사무 7,1-16; 로마 16,25-27; 루카 1,26-38
대림 제4주일; 2023.12.24
⒈ 오늘 복음에서는 드디어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탄생시키시려고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당시 다윗 집안의 요셉과 막 약혼한 처지였던 마리아에게 천사는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처지가 아니었던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루카 1,34) 하고 반문했으나, 천사는 성령께서 잉태시켜 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엘리사벳이 이미 여섯 달 전에 아들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루카 1,35-37). 그러자 마리아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였습니다(루카 1,38).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령 잉태와 동정녀 출산 사건이 이렇게 해서 일어났습니다.
⒉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메시지는 한 가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소식과 함께, 그 아기가 태어나면 다윗 가문의 왕좌를 물려받을 것이고 장차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굳건하고 튼튼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온 시점이 왜 하필 요셉과 약혼한 직후여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날 아기가 다윗 가문의 적자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기가 메시아로서 세울 나라에 대해서는 이미 나탄 예언자가 다윗 왕에게 예언한 바가 있었습니다(2사무 7,16).
⒊ 시온 언덕에 세워진 예루살렘 궁전에서 전해진 이 축복을 직접 들은 다윗 왕은 물론 이를 전해 들었던 후대의 백성들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그렇게 하느님의 축복을 바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는커녕 주변 국가들에서 들여온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을 억누르며 착취를 일삼다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자, 시온 계약으로 축복해 주셨던 하느님을 원망했다는 사실입니다.
⒋ 하지만 조건이 붙지 않은 계약이란 존재할 수 없듯이, 시온 계약에도 다윗과 그의 왕조 그리고 백성 모두가 시나이 계약의 정신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실상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통일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집트 탈출 이래 2백 5십 년 동안이나 불안정하게 이어오던 판관시대를 마무리하고 주변 민족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이스라엘에서 다윗이 시나이 계약 정신에 가장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되리라던 시나이 계약이 본 계약이라면, 시온 계약은 다윗과 그의 왕조가 본 계약을 충실히 지킨다면 받을 축복을 담은 부속 계약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 직후부터 왕실 안에 골육상쟁이 벌어지고 끝내 나라가 갈라졌으며 갈라진 상태에서도 경쟁하다시피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은 그 축복을 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유배 이후에 등장한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오셔야 한다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라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이고,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바로 시온 계약이 철회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⒌ 과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시나이 계약에 따라 파스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 복음을 뒤늦게 깨닫고 회심한 사도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마 18,2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신비의 계시’는 아브라함과 모세 이래로 판관시대와 왕국시대 그리고 유배시대와 그 이후 식민통치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감추어져 있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비로소 밝혀진 하느님의 계획을 뜻합니다.
⒍ 하지만 메시아 이후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계획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혈통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믿는 새로운 백성, 즉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펼쳐집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을 통해서 만방에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려던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첫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 받았던 이스라엘이 거부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했지만,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메시아 백성 안에 현존하여 계시면서 이끌고 계십니다.
⒎ 이 백성의 역사도, 옛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메시아적 백성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교의 장자요 적자로서 가톨릭 교회는 그 오랜 세월 동안에 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저지른 시행착오도 적지 않게 겪었지만, 그 이상으로 이 교회가 선포하는 교리를 신봉한 신자들이 증거한 수많은 행적으로 인해서 그 진리성도 충분히 검증되었습니다. 따라서 2천 년 전에 이스라엘에 강생하신 메시아의 나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이루는 새로운 인류로서의 자의식을 표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메시아적 백성이 주도할 ‘가톨릭 문명’이 전 인류 앞에 하느님 나라를 선도하겠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입니다.
⒏ 가톨릭 교회는 메시아를 배출한 다윗 가문의 명예를 이어 받아서, 하느님 나라를 세상의 문명들 안에서 사랑의 문명으로 굳건하고 튼튼하게 세울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시나이 계약과 시온 계약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앞에서 세우신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갱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계약으로 시작된 성체성사의 역사도 2천 년이 넘어가고 있어서, 교회의 역량이 모자라서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는지 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이제껏 감추어져 온 그 귀한 진가와 원대한 목표가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성령께서 상호섬김의 영성으로 파스카 과업을 향하여 이끄시는 성체성사의 가치는 메시아적 백성이 각성되면 될수록 더욱 빛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에는 강생과 부활의 신비가 녹아있기 때문이고, 동정녀께서 성령의 힘으로 생명을 잉태하시고 그렇게 해서 태어나신 메시아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이 신비는 천지창조를 능가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운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⒐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난 신비의 계시나 그로 인해 세워져야 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나, 그분이 메시아이심이 알려진 현재의 세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계획과 세상의 문명은 엇박자를 내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이 세속성(世俗性)입니다. 개인으로도, 사회 전체로도 그리고 문명 전체 단위에서도 이 세속성이 인류의 역사를 채워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흐름 안에서 당신의 계획을 구상하셨고, 수립하셨으며, 침투시키셨습니다. 그것이 강생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⒑ 인류 역사상 생겨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문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선도적이었던 문명들의 기운을 타고 온 세계에 퍼진 가톨릭 교회는 이제 특정한 문명의 영향력에 기대지 않고 온 문명의 복음화를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이들 문명의 흥망성쇠를 빠짐없이 모두 지켜보았던 처지에서 가톨릭 교회는 부질없는 패권을 다투는 어리석은 경쟁은 종식되어야 함을 온 세상 문명들 앞에 천명한 바 있고, 단지 내부의 갈등으로 갈라져야 했던 동방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들과는 문명의 복음화라는 목표를 두고 협력을 하거나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20세기 이후 서유럽 중심의 백인우월적 사고방식으로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던 과거의 관점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극도의 야만적인 양상으로 서유럽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던 세계 대전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21세기에 들어서서 경제력이나 군사력 또는 정치적 패권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문명을 좌우하던 하드 파워(Hard Power)의 시대도 슬그머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실상 이제는 선한 가치로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문화의 영향력인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시대로서, 사랑의 문명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 메시아적 백성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이 선한 가치란 하느님의 최고선에 해당하는 사랑과 진리에 바탕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입니다.
⒒ 이제는 사랑과 진리의 힘이 문명을 선도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 또는 인종의 사람들만을 당신의 일꾼으로 쓰실 이유가 없으며 오직 당신의 사랑과 진리 안에 담긴 영적인 힘을 깨닫고 실천하는 이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이 창조적인 노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면 바로 그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사랑의 문명으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2천 년 동안 겪었던 여러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고, 이러한 역사적 반성을 담아 성령의 이끄심으로 펴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동방 정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는 물론 심지어 선의의 무신론자들까지도 함께 협력해서 진리를 실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더 이상 하느님의 존재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고,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에서 나오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위한 협력이나 선의의 경쟁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⒓ 메시아의 성탄이 임박한 지금은 말씀이 하느님 계획의 의미를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 계획에 따라 세상을 이끄시는 그분의 다스림을 알려주는 거룩한 때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엄청난 계획과 신비의 계시를 전해 받던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신 순명의 자세와, 또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고 장성하신 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불러 모으신 당신 백성과 제자들을 섬기셨던 봉사의 자세를 본받아 이 나라를 빛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기에 세상에 선포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한국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그 기쁜 소식 속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도 잘 깨달아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이 한반도에서 선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면, 부활의 사기지은(四氣之恩)을 입은 메시아 백성으로서 머지않아 사랑의 문명을 동북아시아를 거쳐 온 세상으로 퍼뜨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성탄대축일부터는 대림시기 동안 묵상해 온 신앙 진리의 공리와 공식 그리고 명제들을 바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꾸시는 복음화에 대하여 묵상한 바를 그날 그날의 말씀에 따라 전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