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밀양사람
 
 
 
카페 게시글
소설. 수필. 고전 스크랩 낙선재에 부는 바람 / 이시은
풀꽃 추천 0 조회 45 18.03.05 18:5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낙선재에 부는 바람

                                                                            이시은

 

 

덧없는 세월이 바람처럼 스쳐 가는 처마 밑에 왕손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듯하다.

늦겨울 바람결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창덕궁으로 발길을 놓았다. 곁에 있으면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사십 년을 가까이 살면서도, 고궁을 찾아 가 본 것이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와서 둘러 본 기억을 빼고 나면, 경복궁과 비원을 한두 번 다녀간 것이 고작이다.

 

한파가 지나간 후라 며칠 기온이 조금 오른 탓인지, 고궁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조선 시대의 궁 중에 경복궁이 정궁이었고, 그 후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별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경복궁이 임진왜란과 화재로 소실되면서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의 역할을 더 오래 하기도 한 궁이며,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기도 하다.

 

세월을 삭여 안고 처마를 받들고 있는 기둥들은 고색 미를 드러내고, 조금씩 겨울을 벗어나는 햇살 아래서 전각들은 아름다운 자태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얼마나 많은 궁인이 이곳에 머무르며 왕실의 번영을 위해 나날을 보냈을까. 금방이라도 왕과 왕후가 지엄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 같으며, 대신들이 국사를 논하러 빈청으로 발걸음을 놓을 것 같다.

 

창덕궁은 광화문을 중심으로 일자형으로 축을 지어 지어진 경복궁과는 달리 지형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지어졌다. 왕과 왕손들이 휴식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후원인 비원을 두어 더욱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국권을 빼앗기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창덕궁 중에서도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는 비원과 더불어 낙선재였다. 국운이 쇠하여 일본의 볼모가 되어 비운의 세월을 살다 간 왕족들의 마지막 거처였기 때문이다.

 

고종황제는 육십의 노령으로 고명딸인 덕혜옹주를 복녕당 양 씨와의 사이에서 낳았다. 옹주를 향한 고종황제의 사랑은 각별하였다. 온종일 옹주를 보고 싶은 마음에 옹주의 나이 다섯 살 때 덕수궁에 최초의 유치원인 준명당을 만들 만큼 지극하였다. 그러나 그 지극한 부왕의 사랑도 옹주가 여덟 살 나이에 의문에 싸인 고종황제의 승하로 막을 내렸다. 그 후 기울어진 왕실의 옹주로 내 나라를 약탈한 일본계 학교에서 수업을 받아야만 했고, 유학을 빌미로 영친왕과 더불어 일본의 볼모가 되어야만 했다.

 

일본은 왕가의 후손을 끊을 속셈으로, 영친왕을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일본의 왕족인 나사모토 마사코(이방자)와 강제로 정략결혼을 시켰고, 덕혜옹주 또한 일본인 쇼 다케유키를 남편으로 삼아야만 했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서도 조정과 왕실의 반대에도 힘을 잃은 나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부왕의 승하로 충격을 받았던 옹주는, 어머니의 상에도 또 한 번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관심을 두려워한 일본의 강요에 의해, 잠시 다녀가는 것으로 서러움을 달래야만 했었다. 결국 내성적인 옹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딸 마사예(정혜)를 낳았으나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으며, 이혼마저 당한 채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기막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해방 이후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이유로,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은 일본 땅에서 살아야만 했다. 다행히 옹주의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선으로 조국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스러져가는 왕가의 왕족으로 태어나 그토록 고난의 세월을 살다 간 덕혜옹주와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가 거처한 낙선재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나의 발길을 불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문을 열어놓고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 낙선재의 바람결이 옹주의 영혼인 듯 옷깃을 감아 들었다.흘러간 세월 속의 상처를 아는 체하여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역사의 아픔을 모르는  체 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삶이겠지만, 몇 생애의 고통을 안고 살다 간 옹주의 한이 처마를 타고 내리는 밝은 햇살마저 눈물겹게 하였다.

 

창덕궁에서도 낙선재를 생각하게 함은, 외세에 나라를 잃고 무너진 왕가의 혈통으로 살다 간 고통이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조차 없이 처절하게 살아야만 한 왕족에 대한 연민 때문이며, 내 나라의 슬픈 역사 때문이었다. 왕족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국민은 주권을 상실한 채, 암울한 나날을 살아야 하는 뼈아픈 시대를 견뎌내야만 했다. 나라의 부흥과 멸망은 수많은 원인과 결과가 쌓였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나라에 그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면서, 창덕궁을 돌아 나오는 발길을 멈추고 서서, 옹주의 영혼이라도 있다면 모든 슬픔을 잊고 궁궐 전각 사이로 밝게 내리는 햇살과 푸른 하늘만 기억하라고 하고 싶었다.

 

 

 

한국문학신문 <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

 

 

 

 
다음검색
댓글
  • 18.03.06 04:31

    첫댓글 나라 꼴이 그때보다 나아진것 같습니꺼?ㅎㅎㅎ
    잘 읽고는 갑니다만! 늘~ 건강 하시길......

  • 작성자 18.03.12 09:14

    이심전심 입니다.

  • 18.03.06 10:59

    다시는 이 나라에 그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면서 나도 고궁 나들이 한번 해야겠다고 다짐 합니다...날씨도 풀려 가는데...

  • 작성자 18.03.12 09:16

    그래야겠지요. 고궁 나들이 ! 좋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