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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8일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
‘상하이 스캔들’의 주인공 덩신밍씨의 모습.
중국 상하이(上海)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서 근무한 영사들과 김정기 전 총영사가
중국 여성 덩신밍씨와 친밀히 지내며 기
밀을 유출한 혐의로 국무총리실공직,복무
관리관실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총영사는 조사에서 “이번 사건은
‘미녀 스파이’ 사건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나를 음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벌인 것”
이라고 밝혔다.이에 따라 주상하이
총영사관에서 덩씨를 사이에 두고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켜 소환됐던 법무부
파견 H영사와 지경부 파견 K영사, 외교부
P영사 외에도, 김 전 총영사와 부총영사가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재외공관 관리의 총체적 난맥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김 전 총영사를 서울
종로구 창성동 별관으로 불러 그가 덩씨와
함께 사진을 찍게 된 경위와 총영사관 서류,
그가 갖고 있던 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비상연락망 등이 유출된 경위
등에 대해 조사했다.
김 전 총영사는 이날 “덩씨는 한국을 좋아
하고 총영사관을 많이 도와줘서 만났을 뿐
나는 의심이 갈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에 앞서 덩씨의 남편인 한국인 J씨는 김
전 총영사를 비롯한 주상하이 총영사관
관계자들이 자신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
를 맺고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며 이를 처벌
해 달라고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에
투서를 해왔다.
이후 H, K영사 모두 국내로 소환돼 공직
복무관리관실의 조사를 받았다.국무총리
실, 외교통상부, 법무부 직원으로 구성된
정부합동조사단이 3월 14일 상하이로
건너가 국내 1차 조사 결과를 기초로 비자
부정 발급, 정보 유출, 우리 영사들과 중국
여성 덩신밍씨의 부적절한 관계 등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상하이 총영사관 스캔들’을 조사해온 국
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은 25일 “이
사건은 스파이 사건이 아니라 중국 여성
덩신밍(鄧新明)이 이권을 노리고 (한국)
영사들에게 접근해 벌어진 공직기강 해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놨다.
총리실은 유출된 자료가 국가기밀은 아니
라고 판단했으며 김정기 전 총영사를 비
롯한 전·현직 영사 10여명에 대해 ‘공직
기강 해이’의 책임만 물어 해당 부처에 징
계를 요구하기로 했다.
▶2012년'일본의 부동산 왕' 모리 미노루 별세
▶2009년쇼트트랙 이호석 세계선수권 종합우승
▶2009년신지애, LPGA 시즌 첫 우승
골프선수 신지애
▶2003년원로시인 조병화씨 별세
▶1999년미국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사망
▶2003년원로시인 조병화씨 별세
▶1999년미국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사망
메이저리그 ‘불멸의 강타자’ 조 디마지오.
▶1997년여야 3당 노동관계법 단일화로
노동법 사태 일단락
▶1993년김영삼 대통령, 하나회 숙정
▶1990년한필성-한필화 남매 일본에서 상봉
▶1989년평민당, 주간조선 기사에 불만을 갖고
조선일보 관련자 5명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
▶1983년부산 미 문화원 방화범
김현장-문부식 사형 확정
선고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는 문부식씨.
1983년 3월 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 김현장과 문부식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방화의 동기를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5.18에 있어서의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 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반미운동의 무풍지대로 인식되어온 남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 넣었다.
1980년 12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인 김현장으로부터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문부식, 김은숙은 광주의 참상과 독재자들의 만행, 그리고 광주항쟁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상징적 의미로 부산 미문화원에도 방화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1982년 3월 18일 오후, 부산 미국 문화원에 대학생들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문화원 입구에 휘발유를 뿌린 후 불을 지르고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유인물을 돌렸다.
그러나 이날의 ‘거사’ 는 뜻밖의 희생을 불렀다. 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장덕술군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사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이날 사형이 선고됐고 김은숙 등은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이날의 사건은 문씨를 ‘반미운동의 선구자’ 로 떠오르게 했지만, 자신들의 행위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 발생은 끝끝내 그를 괴롭게 했다.
이 사건은 이후 1980년대 반미투쟁과 광주, 대구 등 잇따른 미문화원방화사건 및 점거농성투쟁의 선도적 투쟁이 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념이나 명분이 빚어낸 폭력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문씨는 8년의 복역 후 지식인 잡지 계간 ‘당대비평’ 을 창간, 현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2003년 2월 4일부터 조선일보에 ‘폭력의 세기를 넘어-문부식의 시간여행’ 을 연재한 바 있다.
▶1981년고려본 삼국사기 발견
▶1979년경북 달성군 월배국민학교서
첫 태양열교실 등장
▶1977년카다피, 인민주권 선언
▶ 1975년 UN은 매년 3월8일을 ‘여성의 날’로 기리기로 했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2018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이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계기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날을 기념한 지 34년째를 맞았지만 올해는 미투 운동 속에 맞는 세계 여성의 날이어서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미투 운동으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 인식이 대전환의 계기를 맞으면서 여성 인권이 바로 서는 해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최근 이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여성 인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에서 여성 인권 확립은 요원하다.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1만5000여 미국 뉴욕의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이 뉴욕의 루트거스 광장에서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이 기원이다.
우리나라는 1985년 ‘민족, 민주, 민중과 함께하는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제1회 한국 여성대회가 개최됐고, 1987년 이후 해마다 개최되고 있으며 올해부터 법정 기념일로 지정됐다.
1908년 2월28일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 2만여명이 뉴욕 거리를 가로질렀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웠던 여성들의 첫 대규모 시위대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우리가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땐 남자들을 위해서도 싸우네. 왜냐하면 남자는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보기 때문이지. 그런 우리가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그러니 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를 달라.” 여기서 빵은 굶주림을 해소할 생존권을, 그리고 장미는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의미했다.
이를 계기로 1909년 2월28일 첫번째 ‘전국 여성의 날’이 선포됐다. 이에 영감을 얻은 유럽에서는 1910년 8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의 여성운동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이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장하기 위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이에 힘입어 이듬해인 1911년 3월19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 등에서 참정권, 일할 권리, 차별 철폐 등을 외치는 첫번째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개최됐다.
이들의 행동은 여성을 위한 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여성의 날’이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그 외 다른 사회 인권운동들과도 연대했다.
‘여성의 날’이 지금과 같은 3월8일로 공식 결정된 것은 1975년부터다. ‘세계 여성의 해’였던 1975년 UN은 매년 3월8일을 ‘여성의 날’로 기리기로 했다. 이 때부터 ‘세계 여성의 날’은 전 세계 여성이 국적, 인종, 종교를 뛰어넘어‘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고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날’이 여성에게 고백하는 날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3월8일은 초기 여성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정치적 불평등과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 환기를 촉구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1975년시인 신석초 사망
▶1972년홍콩, 해저터널 공사
▶1965년알제리 여성 행진
▶1965년미국 해병대 베트남 다낭 상륙
신화를 만드는 한국해병'이라는 제목하의 한국해병사진
▶1962년미국-소련 문화교류협정 조인
▶1958년체신부, 한국 최초로 미국에 사진전송 성공
▶1957년한국-터키 국교 수립
▶1954년정부, 형사소송법 비토
▶1948년김구, 남북협상 제의
▶1946년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토지개혁법령 세칙 발표. 토지개혁 착수
▶1946년최초의 영국 자동차를 만든 란체스터 사망
▶1942년일본군 버마수도 점령
▶1930년미국의 제27대 대통령(1909-13) 태프트 사망
▶1921년소련 신경제정책 채택
▶1920년러시아 과격파정부 수립
▶1917년러시아 2월 혁명 발발
아나스타샤 공주는 어디로 갔을까?
오른쪽 세번째가 이나스타시아공주.
1917년 오늘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서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던 시민들은 “식량이 떨어졌다”는 말에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간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카발로프 장군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하지만 거부당한다. 300년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2월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제정러시아는 190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히 기울어져 갔다. 극심한 불황, 실업자 증가 등으로 반정부 운동이 고조됐다. 1905년 1월 9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4만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군인들의 발포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1차 대전 발발은 러시아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농업은 황폐화되었고, 도시민들은 생필품 부족 등으로 크게 압박 받았다. 파업과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황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2월 혁명이 발생하자 니콜라이 2세는 반란 진압을 포기한 장군들의 호소에 황제직을 포기한다. 300년 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리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혁명 발발 불과 1주일만이었다.
시베리아로 유배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정권에 의해 에카테린부르크 근처 숲에서 처형돼 암매장된다. 1918년 7월이었다. 이후 황제의 다섯 자녀중 막내 아나스타샤 공주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전 러시아에 떠돌았다. ‘요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사랑스런 공주를 잃은 게 너무 애석했던 탓이었을까?
이후 유럽 등에서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는 살아 있다는 전제로 태어난 영화였다.
1991년 에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견된 시신이 DNA 검사에서 니콜라스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스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관계 대조를 통해서였다. 이후 러시아는 니콜라스 2세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시신 중 황제와 황후는 있었지만 다섯 자녀 중에서는 황태자와 아나스타샤의 것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정말 아나스탸샤의 생존설은 맞는 것이었을까?
물론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한 여인들은 DNA 검사 결과 로마노프 왕조와는 관계없는 가짜로 밝혀졌다. 니콜라이 2세는 1998년 7월 복권됐다.
▶1910년국제부인데이 시작
▶1908년미국 여성 노동자 시위
▶1907년그리스의 전 대통령
(1980-85, 1990-95 재임) 콘스탄틴 카라만리스 출생
▶1879년핵분열 발견으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출생
▶1874년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 사망
▶1869년프랑스 교향곡 작곡가 베를리오즈 사망
베를리오즈 [Berlioz, (Louis) Hector, 1803.12.11~1869.3.8]
프랑스의 교항곡 작곡가로 유명한 베를리오즈가 1869년 3월 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 출신인 그는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하여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고,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뒤마(부친) 등과 교유하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 시기의 작품에는 독주 비올라에 이탈리아의 추억을 상기시킨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롤드`(1834), `레퀴엠`(1837),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1838),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 곁든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1839) 등이 있다.
1842년부터 국외로 나가 연주여행을 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1843)를 남겼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바그너와 더불어 명문장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분야에서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1445년용비어천가 간행
▶1440년남녀성혼기를 16세, 14세 이상으로 정함(세종 22년)
▶725년오대산 상원사 종 조성
https://youtu.be/o5O-n3LrdWY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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