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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봄밤, 안드로메다 근처에서
박 숲
흙은 거짓을 모른다. 수분이 마르면 스스로 제 몸을 갈라 숨을 쉰다. 성형을 뜨다 만 흙은 딱딱해지고 금이 쩍쩍 가 있다. 잠깐 존 것 같은데 시간이 꽤 흐른 걸까. 흙덩이를 물통에 집어넣었다 뺏다. 누런 물이 손가락을 타고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성형판 위에 흙을 올려놓고 스펀지로 쓱쓱 문질렀다. 흙은 다시 제 모양을 찾았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작업실을 파고들었다. 작업복에 손을 문지른 뒤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서하가 즐겨 피우던 담배이다.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인 뒤 담뱃갑을 들여다보았다. 에펠탑을 향해 앉아 있는 고양이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서하를 보게 된 건 기찻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원 끝자락에서였다. 은영과 작업실에서 케이크 스탠드 디자인에 대해 고민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기차역처럼 꾸며놓은 구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은영의 호기심에 이끌려 잠깐 구경을 하게 됐다. 선로를 중심으로 돌무더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돌무더기 위에서 한 여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속이 비치는 붉은 천을 몸에 두른 여자는 아무런 소품도 음악도 없이 오로지 몸동작 하나만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있었다. 들쭉날쭉한 돌무더기 위를 솟구치듯 날아오르다 가볍게 내리찍는 동작 틈새로 맨발은 안쓰러우면서도 당차 보였다.
여자는 마치 신들린 무녀처럼 뾰족한 돌무더기 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날아올랐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다. 가느다란 선로를 밟으며 춤을 출 땐 마치 작두날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선로와 돌무더기 위를 오가는 여자의 맨발은 날렵했다. 비상하는 새처럼 높이 뛰어오르다 돌무더기 위로 추락하듯 떨어지는 동작의 연결은 관객들을 긴장하게 했다. 거친 호흡과 허물어지는 육체에서, 꺼져 가는 가느다란 생명을 붙잡고자 몸부림치는 듯한 연출은 마치 고행자의 몸짓처럼 숭고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었고, 은영은 여자의 동작이 바뀔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오페라의 유령처럼 얼굴 한쪽을 가린 가면이 여자를 더욱 신비롭게 했다.
여자의 왼쪽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다. 반쪽만 드러낸 얼굴과 표정, 찡그린 눈매와 얼굴선이 아무래도 익숙했다. 그러다 오른쪽 발등의 기다란 화상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검지 발톱부터 발목 위로 길게 이어지다 종아리의 뭉개진 줄기와 합쳐진 깊은 흉터. 착각일 수 있겠지만 잘 아는 흉터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문득 텅텅 울리는 북소리가 공명음처럼 귓속을 두드렸다. 십 대의 마지막 밤에 들었던 소리,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던 그곳. 잠긴 문 너머에서 다가오던 섬뜩한 그 소리처럼.
전기 스위치를 켜자 침침했던 작업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옆 작업실과 주방과 마당에도 불을 밝혔다. 방전된 핸드폰에 충전기를 갈아 끼우고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은영의 번호를 눌렀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당연했지만 내 입에선 엉뚱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열섬이 갑자기 고장났네. 요즘 날씨가 뒤죽박죽이라 흙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이번 주 안에 일을 못 끝낼 거 같은데. 이미 조각난 열 개의 케이크 스탠드를 성형부터 시작한다면 열흘은 족히 걸린다. 엊그제만 해도 멀쩡하던 게 왜 갑자기 이상하다는 거야? 은영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방을 운영하기도 버거운 은영과 내게 이번 일은 몹시 중요했다. 케이크 스탠드 납품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번 일만 잘되면 생활도자업체 일은 계속 맡아서 할 수 있어. 그럼 어느 정도 생활은 안정될 거고, 공동 작업실도 차리고 스몰 결혼식이라도 올리자. 세 살 연상인 은영은 언제나 나를 아이 달래듯 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캔을 꺼내 들고 작업실 복도로 나왔다. 파편 조각이 슬리퍼를 뚫고 올라왔다. 슬리퍼를 벗어 파편을 뽑아냈다. 발바닥에 피가 맺혔다. 세모꼴로 조각난 파편을 주워 작업복 앞주머니에 넣었다.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켜자 톡 쏘는 맛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갔다. 벽면 진열대 한쪽 구석에 세워진 흉상을 바라보았다. 작품을 모조리 깨트린 것 같은데 흉상만은 멀쩡했다. 얼마 전 밤샘 작업을 할 때 서하가 찾아와 흙을 주물럭거리며 만든 흉상이었다. 누구냐고 묻자, 서하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빼어 물었다. 사실 흉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한 건 아니었다. 흙을 만지는 서하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여서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서하는 피식 웃었다. 성형도 잘 안된 상태에 거친 흙을 덕지덕지 발라놓아 형태가 뭉개진 흉상에 가까웠다. 서하는 자신이 만든 흉상을 한참 동안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시던 맥주캔을 작업대 위에 놓고 가마의 뚜껑을 열었다. 초벌구이를 하려고 넣어둔 몇 개의 케이크 스탠드가 차례로 쌓여 있었다. 모두 깨트린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스탠드 하나를 꺼내어 흙 상태를 살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균열이 일어나지 않은 게 신기했다. 아무 일도 없듯 제 자리로 돌아와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서하의 이상한 퍼포먼스 역시 균형을 잡으려는 안간힘이었던 걸까. 흉상을 가마 안 한쪽에 조심스럽게 세웠다. 가마의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한 뒤,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열두 시간으로 시계를 맞추고, 온도를 천이백 도로 맞췄다. 지금부터 열두 시간 동안 가마 안에서 흙은 조금씩 굳어지고 스스로 버티며 균형을 잡아갈 것이다.
불쑥불쑥 작업실을 찾아오던 서하는 늘 묘한 말로 나를 불쾌하게 했다. 언젠가 작업실 구석에 처박혀있던 서하에게 간단한 컵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코일 성형을 이용해 등나무 줄기가 위로 타고 오르는 나뭇잎 모양의 컵이었다. 컵을 만들기 위해 손가락 굵기로 일정하게 흙을 말게 했다. 서하는 나뭇잎을 먼저 만들고, 나무줄기 대신 지렁이를 만들었다. 왜 하필 지렁이냐고 물었다. 글쎄, 내 몸이 지렁이들의 숙주 같아서? 라고 서하는 대답했다. 자신의 몸 안에는 수천 마리의 지렁이가 산다고 했다. 나는 서하의 몸에 가득한 흉터를 떠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서하는 화려하게 색을 입히고 억지로 포장을 하는 건 거부감이 인다고 했다. 자신을 감춘다고 해서 본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석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바탕으로 행위예술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다.
서하가 촛불을 밝혔던 촛대들을 가져다 작업대 위에 차례로 세웠다. 초등생 회원들이 만든 비슷한 모양의 촛대들이다. 촛농이 묻어 지저분해진 작품을 대할 아이들의 표정을 떠올리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촛대를 하나하나 스펀지로 문지르고 붓으로 다듬었다. 녹아든 색색의 촛농을 이용하면 오히려 특이한 색감을 만들어 낼 것도 같았다. 갈증이 일어 냉장고에서 새로운 맥주캔을 꺼냈다. 언젠가 딱, 소리가 나게 캔 뚜껑을 따며 서하는 말했다. 난 너처럼 숨어 살면 병이 났을걸. 나는 숨어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작업실 안 곳곳에 서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갈증이 이는 것과는 달리 한기가 몰려왔다. 나는 작업복 앞주머니에서 깨진 조각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누군가는 그릇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다고 했다. 서하를 만난 이후 내 인생은 깨진 그릇의 조각 하나에 불과하다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꽉 쥔 손바닥 안 조각이 아픈 삶의 파편처럼 가슴을 찔렀다.
믿을 수 없는 일은 언제나 우연히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우연. 기찻길에서의 퍼포먼스를 보고 난 이후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뭔가에 이끌리듯 공원 기찻길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여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짙은 화장으로 가린 여자의 반쪽 얼굴과 흉터로 가득했던 다리가 매일 마음을 어지럽혔다. 퍼포먼스를 보던 날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하던 은영은, 무슨 남자가 이렇게 약골이야, 하며 빈혈 약을 권했다. 그 무렵 생활도자회사의 케이크 스탠드 주문을 따내느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탓도 있었다. 은영은 그런 행복한 증상이라면 평생 겪어도 좋지 않냐고 놀렸다. 퍼포먼스를 하던 여자의 맨발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열흘이 훨씬 지났고 서하의 사진이 찍힌 공연 포스터가 발밑에 걸린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클럽 앞을 서성거렸다. 서하가 공연한다는 클럽은 몸으로 세계와 우주를 표현한다는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용기를 내어 들어간 그곳은 일반 클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계단은 좁고 조명은 윤곽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인도나 네팔 분위기를 풍기는 오카리나 비슷한 연주가 낮게 흘렀고, 분위기는 야릇하고 음산했다. 마침 서하의 행위예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서하의 발목에서 가슴까지 타고 올랐을 깊은 화인 자국을 몰래 지켜보았다. 두 번째 찾아간 날, 하이네켄을 가져다주며 어떻게 온 거냐 묻는 긴 머리 남자에게 서하의 춤을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는 특별한 사인가 봐요, 하며 살짝 웃었다. 특별한 사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술잔만 기울였다.
솔직히 과거의 흔적 따위를 더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를 버텨내기도 벅찰 뿐이었다. 그런데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잘라내기 힘든 꼬리처럼 자꾸만 자라났다. 한편으론 내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면서. 만약 서하가 과거의 끈을 고집스레 붙들고 있다면 나는 어땠을까. 몸 안에 깊은 화상자국을 가득 품고 살아야 했던 서하의 현실과 오른쪽 팔 안쪽 5센티 미터 가량의 흉터가 고작인 나의 현실이 같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입학했다. 충격이 크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사소한 일처럼 여겨지는 걸까. 나는 한때 일정 구간을 형성했던 힘든 기억을 의식적으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그해 겨울, 클럽 <안드로메다>에 있던 아이들은 부연 연기에 갇혀 대부분 빠져나오지 못했다. 서하와 형준 역시 실내에 가득 찬 연기에 목을 움켜쥐고 괴로워할 때, 나는 운 좋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후 그날의 기억에서 숨 가쁘게 도망쳤다. 하지만 여전히 그 구간에서 온전히 빠져나온 건 아니다. 나는 새로 옷을 갈아입듯 이십 대의 바쁜 생활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과거란 새로운 일상의 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조각품이 흙의 본질을 기억할 수 없듯.
누군가 음울하게 부는 휘파람처럼 창문 틈으로 바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고 창문 앞으로 갔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렸다. 나는 깜짝 놀라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에 뒤엉켜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은 벚꽃이 아니라 하얗게 날리는 눈송이였다. 푸릇한 향이 퍼져야 할 4월의 중간에 눈이라니. 나는 한 겨울 벌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멀뚱한 표정으로 눈송이를 쳐다봤다. 설마, 진짜 눈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도 이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벚꽃이 무더기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눈송이가 한참 동안 하얗게 흩날렸다.
두 손바닥을 펼치고 눈송이를 받았다. 차가운 감촉이 피부로 스며들어 기분을 좋게 했다. 한참을 그렇게 내리던 눈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마당 한구석에 살짝 쌓인 눈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마치 아기 고양이 털처럼 미세하고 보드라웠다. 눈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잠깐 머물다 사르륵 녹았다. 너무도 감쪽같았다. 깨진 그릇의 파편들이 무덤처럼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파편들 위로 쌓인 눈이 금세 녹으면서 물기로 번질거렸다.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눈송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슬며시 다녀간 느낌이었다.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연달아 내리쳤다. 마른 나뭇잎 냄새가 바람에 섞여 코끝에 매달렸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제멋대로 뒤바뀌는 날씨처럼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토록 불안정한 날씨를 ‘페이스 체인지’라 칭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해 쓴 칼럼이었다. ‘스스로 평형을 유지하려는 자연의 속성’이라고 했다. 겨울에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찬 기운이 뒤늦게 나타난 이상 징후의 결과였다. 흔들리는 균열 앞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은 자연도 마찬가지였다. 쌓인 조각들 옆으로 부서진 케이크 스탠드가 나뒹굴었다. 몸을 일으켜 깨진 조각들을 발로 툭툭 찼다. 오른쪽 슬리퍼가 바닥에 미끄러지며 벗겨졌다. 발이 시렸다. 문득 서하의 조그만 맨발이 떠올랐다.
십 대 때 우리는 같은 병원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모두 각기 다른 공간 다른 세계를 표류하고 있었다. 서하는 긴 시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형준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다. 몇 시간 만에 깨어난 나는 바로 퇴원할 수 있을 만큼 부상이 가벼웠다. 시트 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서하의 발은 몹시 차가워 보였다.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무심해 보였던 맨발. 발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비밀스레 뭔가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중환자실 병동 침대에 누워 있던 서하는 며칠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서하의 첫 마디는 나 안 죽었어? 였다. 십 대의 마지막 순간 들었던 그 대사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숙주처럼 자라고 있었다. 중환자실 병동에는 형준과 서너 명의 아이들이 모두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안드로메다 클럽 안에 갇혔던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영안실에 안치되어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형준과 서하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시간들은 몹시 길고 고통스러웠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서하는 형준부터 찾았다고 했다. 나는 모른 척했다. 면회가 금지된 중환자실 앞을 매일 지켰다. 두 사람이 깨어나기를 애타게 바라면서도, 서하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또 한 번 상처를 입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아 눈사람 형상이 된 상태에서도 서하는 형준만을 찾았다. 나는 사고가 나기 전보다 더한 질투에 시달렸다. 왜 너만 멀쩡한데? 매일 밤 꿈속에서 서하는 물었다. 언젠가 대기 의자에 앉다 잠깐 졸았다. 너 때문이야. 당장 내 앞에서 꺼져버려! 우그러뜨린 빈 음료 캔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꺼져주면 될 거 아냐! 나는 잠결에 소리를 질렀고 이후 병원을 찾지 않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저편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어둠 곳곳에 솟아오른 십자가들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서하도 모든 것을 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어쩐지 서하의 그런 눈빛이 불편했다. 간혹 내 작업실을 찾아온 서하는 말없이 맥주캔을 마시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물레를 돌리며 흙을 만지는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이 담배 이름이 ‘존재의 이유’라네. 나는 뜬금없다는 듯 서하의 손에 들린 담배를 쳐다보았다. 담배 케이스에 ‘레종’이라 적힌 로고가 보였다. 서하가 피식 웃었다. 넌 아주 잘 지내는 것 같다. 서하의 말대로 나는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는 중이었다.
빗방울이 얼굴 위로 톡톡 떨어졌다. 서늘한 기온이 뼛속 사이사이 파고들었다. 서하가 내게 내밀었던 사진을 떠올렸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형상. 눈 코 입의 형태를 흙으로 얼기설기 붙여 만든 흉상과도 같은 모습. 나는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몇 시간 전 서하가 의식을 치르듯, 작업실에서 벌인 행위는 몹시 불쾌했다. 나도 모르게 서하의 행위에 말려들어 초벌구이를 끝낸 절반의 케이크 스탠드와 다른 그릇들을 몽땅 두들겨 깨고 말았다. 나는 팽개쳐진 그릇의 파편들 위로 빗방울이 튀는 것을 바라보았다. 파편 조각들이 부서진 기억의 일부처럼 가슴을 아리게 했다. 마당 구석의 작은 벚나무 둥치로 번개의 섬광이 내리꽂혔다.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졌다. 재빨리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하가 남긴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를 쏘아보았다. 기찻길에서 보았던 서하의 퍼포먼스는 환幻을 표현한 거라고 했다.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나무가 오브제가 되었다. 상처받은 부분에서 새살이 돋아 무성한 잎을 피우는 과정이 얼마나 힘겨운지 보여주는 행위였다. 자신을 던져 아픔과 마주하는 서하와, 사실을 왜곡한 채 문을 닫아걸고 살아온 나 사이에, 서로를 이해 못 할 의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서하를 다시 만난 것이 두려웠다. 싫어도 꼭 풀어야 할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받고 서하가 공연하는 클럽으로 쫓아간 건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하는 많이 취해 있었다. 나는 그즈음 형준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서하가 짜증스러웠다. 서하는 내가 마치 두 사람을 일부러 불 속으로 밀어 넣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입술을 비틀며 웃던 서하의 모습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내 심중을 은근히 캐물으려는 것과 뭔가를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은 더더욱 싫었다. 나는 지나간 일은 가슴 속 무덤 안에 묻어두는 쪽을 택했다. 서하는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모든 걸 묻어버린다고 진실이 사라질까.
어젯밤 서하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나는 서하에게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할 참이었다. 성인 대상인 미술공예 수업 도중 수강생에게 짜증을 낸 건 서하와의 통화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마치고 수강생들을 이끌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 텔레비전 화면에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장면을 전하고 있다. 뉴스를 보던 수강생 중 한 명이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고, 다른 한쪽에선 국제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큰 소리로 떠들었다. 누군가는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질 날은 없을까 한탄했다. 나는 내 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빈속에 술을 주는 족족 받아 마셔서 금방 취해버렸다. 핸드폰 벨이 울렸고, 서하는 다짜고짜 말해보라고 했다. 뭘 말하라는 거야! 서하의 목소리에 조롱이 가득 차 있었다. 끝까지 잡아뗄 거란 말이지? 나는 형준을 떠올렸지만 모른 척했다. 술잔이 빌 때마다 수강생들은 잔을 채웠고 나는 거부하지 않고 잔을 비웠다.
서하가 있는 곳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뚝뚝 끊긴 기억이 머릿속에서 조각난 모자이크처럼 떠돌아다녔다. 정신을 차렸을 땐 클럽 입구에 서 있었다. 혼미한 머릿속처럼 사이키델릭한 음악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이 뒤섞여 흐느적거렸다. 서하를 찾아 홀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다양한 피부의 인종들에게 풍기는 체취에 속이 울렁거렸다. 바 끝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서하는 서너 명의 외국인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서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스치듯 웃었다. 왔네? 나는 서하의 팔을 붙잡았다. 나가서 얘기 좀 해. 서하는 팔을 뿌리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형준이 그 자식은 계속 널 기다렸어. 바보같이… 넌 아주 잘살고 있는데 말야. 서하는 술에 취해 발음이 꼬였다. 나는 서하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 새끼한테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갑자기 서하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배까지 잡고 웃던 서하가 소리를 질렀다. 관둬, 너한텐 다 소용없는 얘기일 테니까! 나는 서하의 양어깨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 나한테 왜 이래!
서하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남자가 서하를 무대로 이끌었다. 무대에서 터지는 조명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는 순간 불길에 휩싸인 악몽 같던 십 대의 그때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뒤죽박죽 엉킨 이방인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홀을 가로질러 서하가 춤을 추고 있는 무대로 갔다. 난 도망친 게 아냐,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갑자기 무대 쪽에서 함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서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 지난 일인데, 내게 뭘 바라는 거야! 시끄러운 음악과 외국인들의 함성 소리에 내 말은 파묻히고 말았다. 서하는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너희들이 날 먼저 배신한 거라고!
그날은 십 대의 마지막 내 생일이었다. 졸업을 앞둔 나와 서하와 형준은 조소과 예체능 준비로 바빴다. 우리는 종종 셋이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클럽을 찾기도 했다. 나는 생일을 핑계로 서하에게 고백할 참이었다. 서하에게 꾸준히 내 마음을 표현했지만 서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우리는 학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형준이 내 얼굴을 본떠 만든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었고, 서하는 목도리와 장갑을 내밀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클럽에서 간단하게 한잔하자고 했다. 형준이 시험 끝나고 가자고 했다. 서하 역시 몸이 좋지 않다며 형준의 말을 거들었다. 나는 생일을 핑계로 두 사람을 억지로 클럽으로 데려갔다.
여러 별이 모여 이루어진 은하수처럼 ‘안드로메다’ 클럽의 조명 빛은 눈 부셨다. 십 대 아이들의 숨겨진 욕망이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클럽은 또래 아이들로 넘쳤다. 클럽 안은 언제나 지린내가 진동했고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가건물을 빌려 십 대들을 대상으로 불법 운영하는 클럽이었다. 동네 아는 형이 일하는 곳이어서 나는 방학 때마다 나이를 숨긴 채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서하는 빠른 비트 음악이 나오자 미친 듯 춤을 췄다. 형준과 나는 서하를 쳐다보며 웃었다. 빠른 음악이 멈추고 재즈 음악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형준이 서하를 춤추는 공간으로 이끌었고 밀착한 두 사람은 음악에 몸을 맡겼다. 서하는 점점 형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피가 얼굴로 몰리는 것 같았다. 오늘 서하에게 고백할 거란 걸 형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술을 연거푸 벌컥벌컥 들이켰다.
느린 곡의 음악이 끝나자 형준과 서하는 화장실 쪽으로 갔다. 나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화장실로 들어가기 전 어두운 구석에서 잠깐 키스를 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아쉬운 표정으로 각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형준이 먼저 자리로 돌아갔고, 서하가 뒤이어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서하의 팔을 당겨 다짜고짜 키스했다. 서하는 잠깐 저항하는 듯하더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의 입술과 혀를 빨아들였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서하의 촉촉한 입술에 빨려들었다. 서하는 내게서 몸을 빼더니 자리로 뛰어갔다.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몇몇 아이들에 섞여 담배를 피웠다. 형준과 서하가 다시 끌어안고 춤을 추었다. 피우던 담배를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맥주 한 잔을 비우는 사이 화장실 쪽에서 불이야, 하는 비명과 함께 클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하는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옷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 서하를 둘러싼 외국 남자들의 표정은 카니발 축제라도 벌이듯 탐욕스러웠다.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순식간에 번진 불길이 재현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속에서 파편 조각들이 날을 세워 곳곳을 찔러댔다. 꿈속에서 자주 가위를 눌렸던 클럽 <안드로메다>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얼핏 본 서하의 얼굴은 물기로 번질거렸다. 서하는 온몸을 가득 채운 습기를 조금씩 퍼내고 있는 중으로 보였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후회스러웠다. 서하를 다시 찾아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혔던 때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흙처럼 묵묵히 견뎌온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서하는 자신이 퍼포먼스를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존재의 이유’라고 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면 할수록 죽음의 유혹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서하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했다. 자살 행위는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욕망의 한 형태라고 했다. 나는 그런 서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실에 대한 부정이 서하에겐 그런 형태로 나타났던 걸까. 형준의 얘기를 더 이상 들먹이지 못하도록 서하에게 단단히 못을 박았어야 했다. 그러나 도망치듯 클럽을 빠져나온 것이 비열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도망을 치면 칠수록 <안드로메다>의 불길 속으로 점점 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작업실로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 언제 온 건지 서하가 벌거벗은 채 작업대 위에 정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서하의 몸은 발목에서 시작한 화인 자국은 허벅지 안쪽으로 이어져 선명하게 드러났다. 피부를 뚫고 수많은 지렁이가 튀어나올 것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십 대의 마지막과 대면하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미리 준비해 둔 건지 흙을 넣던 통에서 하얀 가루를 퍼내어 공중으로 흩뿌렸다. 하얀 가루를 뿌리는 서하의 행위가 너무도 진지해 나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서하의 행위를 그저 퍼포먼스 행위로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하는 하얀 무명천으로 몸을 둘둘 감기 시작했다. 천에 감긴 서하는 뭔가에 갇혀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서하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래전 환영 안에 갇힌 것 같았다.
그때도 나는 술에 취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취해 흐느적거렸다. 뒤죽박죽 엉킨 아이들은 매캐한 연기에 갇혀 안개 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떠밀리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간신히 주방 쪽으로 갔다. 하나뿐인 출입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이리저리 파도처럼 떠밀리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서하와 형준을 발견했다. 나는 서하의 손을 세게 붙들고 직원들만 알고 있는 주방 쪽 쪽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나는 서하의 손을 붙잡았고 서하는 형준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주방 쪽 조그만 쪽문을 눈치채지 못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클럽 안쪽에서 아우성을 질렀다. 가건물의 자재들은 순식간에 불이 번졌고 여기저기 불이 붙은 자재들이 떨어져 내려 아이들의 몸으로 옮겨붙었다.
아이들에게 떠밀리면서도 우리는 간신히 쪽문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서하가 내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고 형준을 불렀다. 형준은 자기 외투를 벗어 다른 아이들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 찬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콜록거리며 하나둘 쓰러졌다. 아이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나는 쪽문으로 기다시피 다가갔고 서하는 콜록거리며 형준에게 갔다. 커다란 불길이 실내를 다시 뒤덮었다. 형준이 비틀거리면서도 자기 옷으로 서하의 입을 틀어막고 서하를 쪽문으로 밀어냈다. 나는 불길에 휩싸이듯 온몸이 질투로 끓어올랐다. 나는 숨이 막혀 목을 움켜쥔 채 형준의 몸을 밀쳤다. 형준이 힘없이 푹 고꾸라졌고, 서하 역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불길이 순식간에 쪽문 쪽으로 번졌다.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워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형준이 기다시피 다가와 나와 서하를 쪽문으로 밀어냈다. 나는 질식할 듯 숨 막히는 고통을 견디며 쪽문 밖으로 기어 나왔다. 서하는 정신을 잃은 건지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형준은 비틀거리며 서하를 문밖으로 내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형준의 등 뒤로 불길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서하를 밖으로 끌어당겼다. 그사이 두세 명의 아이들이 문을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뭔가를 건드린 건지 문이 닫히고 말았다. 두세 명의 아이들은 서하와 내 몸을 타고 넘어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나는 형준을 버려둔 채 서하를 끌어당겨 계단을 오르려 했지만, 서하는 끝내 내 손을 거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계단을 기어올랐다. 서하가 잠긴 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 도와줘. 계단 통로에도 연기가 자욱했다. 등 뒤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북을 쳐대는 것처럼 다급했지만 점점 희미하게 멀어졌다. 나는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히고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계단 끝은 영원처럼 멀어 보였다.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거니? 내 작업실을 처음으로 찾아온 날 서하는 물었다.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사는 거 같은데? 나는 겨우 서하의 말을 되받았다. 네가 진짜 좋아했던 사람은 누구였어? 나야, 형준이야? 나는 꼭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아직도 서하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넌 변한 게 없어. 모든 걸 부정한다 해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거든. 서하는 언제나 비슷한 말들을 비틀어서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서하는 벌레가 기어가듯 몸을 엎드려 천천히 옆 작업실로 들어갔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몸을 두르고 있던 천에 붉은색이 잉크처럼 번졌다. 나도 모르게 서하를 따라 옆 작업실로 향했다. 거대한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는 것 같았다. 서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속에 갇힌 상처를 토해내는 것도 같았다. 서하를 감고 있던 하얀 천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붉은색 장미를 색칠할 때 쓰는 안료처럼 지나치게 선명해서 소름이 돋았다. 마치 하얀 눈 위에 붉은 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떨어트리는 것 같았다. 서하는 검은색 더플백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에서 노란 종이봉투를 꺼냈다. 동작 하나하나에 우아한 선이 배어 있었다. 서하는 사진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든 사진을 들여다보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사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형상이 괴물처럼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서하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 작업실 안쪽으로 춤을 추며 천천히 들어갔다. 서하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서하는 작업대 위에 사진을 올려놓았다. 손바닥 안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면도날로 자신을 감싸고 있던 천을 찢기 시작했다. 눈앞이 연기로 가득 찬 것처럼 부옇게 보였다. 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으하하하, 이따위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형준이 새끼를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야? 서하의 입에서 짜디짠 눈물처럼 안드로메다 클럽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 새어 나왔다. 나는 방향을 잃은 물길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날 갖고 놀고 싶냐?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릇과 작품들을 부쉈다. 사진 속 얼굴을 가득 메운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진열대가 흔들렸고 그릇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며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하는 내가 보란 듯 라이터를 켜 사진에 불을 붙였다. 연기와 함께 사진이 타올랐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저지른 잘못을 알면서도, 모든 건 사고 탓이라 우기며 얼마나 버텨왔던가. 지금 생각하면 재수 없을 정도로 나는 비겁했다. 아니다, 난 잘못한 게 없다. 누가 뭐래도 난 죄를 짓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누구라도 똑같았을 테니까. 서하는 지금 자기가 만든 죄와 벌의 향연을 벌이고 그것에 심취해 있을 뿐이다. 서하의 향연에 빠져들면 안 된다. 저 불순한 향연을 멈추게 하고 싶다. 그 조악한 가건물 안에 화염과 연기가 가득 찼을 때, 과연 그 누가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고, 어른들 몰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입시의 숨 막히는 현실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영웅이 됐어야 했다고? 말도 안 된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누가 그런 역할을 맡겠는가. 서하는 이제 와 무엇을 바라는 걸까.
모든 것을 두들겨 깨고 싶었다. 가슴속 투명한 그릇들이 짱, 짱,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서하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넌 우릴 버리고 도망쳤어. 그날 클럽에만 가지 않았어도. 그러고도 넌, 아무 일 없다는 듯 잘살고 있잖아. 우리에게 모든 걸 떠맡긴 채! 죽는 순간까지 그 멍청한 자식은 널 기다렸다고. 나는 서하의 양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거짓말이지? 형준이 죽었다고? 그동안 왜 말 안 했어! 흥, 말하면 형준이 살아 돌아올까? 서하의 눈에 붉게 핏발이 섰다. 나는 마치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처럼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서하의 비난은 날카로운 조각처럼 나를 찔러댔다. 넌 우릴 버렸어! 모두를 버렸다고! 나는 십 대의 그때처럼 정신없이 작업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출구를 향해 뛰었다.
클럽의 화재는 담뱃불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담배를 피웠다. 또한 가건물에 불법 영업을 묵인한 구청과 비좁은 골목에 소방차 진입이 어려웠던 점 등이 대형 화재를 피할 수 없던 주요 원인이었다고 진단했던 당시 뉴스를 나는 들먹였다. 아프다는 너를 억지로 데리고 간 건 내 잘못이지. 하지만 화재 사고는 우리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잖아! 서하는 구차한 변명 따위 집어치라는 듯 피식 웃었다. 나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인정하는 순간, 영원히 내 삶은 복구가 힘들 것 같았다.
붉은 지렁이로 온몸을 휘감은 형준과 서하가 연기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의 몸에서 지렁이가 꿈틀대며 한 마리씩 떨어져 나왔다. 나는 다시 안쪽을 향해 뛰었다. 수천 마리의 지렁이 떼가 발등으로 기어올랐다. 내 몸은 지렁이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또 도망치네? 넌 정말로 변한 게 없구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도 지금도, 난 도망친 게 아냐! 그냥 두려웠을 뿐이라고! 목구멍에 말이 걸려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서하와 나는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서하는 한숨을 크게 내쉰 뒤 말했다.
널 원망하려던 건 아니었어. 나는 그저 이렇게 존재하고, 형준이 역시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봐, 여기 이 공기 속에도, 반짝이는 햇살 속에 또 나무처럼 단단하게, 어떨 땐 바람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고래처럼 바닷속을 헤엄치기도 하면서, 형준은 그렇게 우주를 유영하듯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서하는 읊조리며 몸을 활처럼 꺾어 한순간 튕겨 나가듯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서하의 춤사위는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일체가 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는 어떤 제의에 참여하듯 서하의 춤에 빨려들었다. 어느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달라고 흐느꼈다. 서하뿐만 아닌, 십 대의 그 시절 불길에 휩싸인 모든 아이들과 형준과 그 시절의 순간들을 향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며 애도하고 싶었다. 그리고 형준과 서하를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서하는 내 손을 이끌고 천천히 작업실 공간을 돌며 춤을 췄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우주의 차원이 하나의 에너지로 뭉쳐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긴 시간 함께 춤을 췄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핸드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을 태울 듯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중요한 시기에 대체 왜 이래? 언제까지 유령들과 싸우며 살 거야! 은영이 무슨 소릴 하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영은 빨리 문을 열라며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놀랐다며 몹시 흥분해 있었다. 은영은 엉망이 된 작업실을 둘러보며 딱하다는 듯 말했다. 기찻길에서 그날 퍼포먼스 했던 여자 본 뒤부터 너 매일 악몽에 시달렸잖아. 넌 자꾸 그날의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데, 화재 사건 때 네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어. 서하라는 친구도 네 죄책감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제발 인정해야 해.
순간 내 머릿속은 충격으로 하얘졌다. 그럴 리가 없어…. 어젯밤에도 서하랑 이곳에서 같이 있었단 말야. 한밤에 일어난 일들이 은영의 말대로 모두 망상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곳곳을 둘러보며 한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서하가 정말로 이곳에 다녀간 건 맞을까. 은영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네가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아. 근데 이제 그들을 놓아줄 때가 된 거 같아. 그 순간 나는 그동안 서하와 형준을 오랫동안 놓아주지 못한 채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은영에게 안겨 소리내어 울었다. 은영이 등과 어깨를 쓸어내렸다.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속에 묶여 있던 질긴 쇠사슬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은영이 위로하듯 말했다. 이제 그들을 쉬게 해주자. 가슴 속에 묻어둔 커다란 무덤 하나가 쑥 빠져나가는 듯했다. 허탈하면서도 개운하고 맑아진 기분이었다.
창문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친 걸까. 새벽에 가마를 작동시킨 뒤 다시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작업실 안쪽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햇살과 나무그림자가 무늬를 그리며 흔들렸고 햇살 안에 담긴 먼지가 수많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바람이 부는 건지 담장 위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간혹 새소리 사이로 지나가는 차 소리가 섞였다.
가마에서 탁탁 소리가 났다. 몇 개의 케이크 스탠드와 아이들의 촛대는 알맞은 온도에서 잘 구워질 것이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워 물었다. 서하의 허상은 줄곧 담배로 존재의 이유를 대신했다. 은영이 함께 친구들을 만나러 가자며 검색 끝에 납골당 주소를 카톡에 공유했다. 나는 카톡을 켜고 은영이 전해준 사이트로 들어갔다. 하늘공원 웹 사이트가 반갑다는 듯 불쑥 나타났다. 나는 사이트의 사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서하와 형준이 잠든 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도 봄밤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까. 아침이 오면 아무 일도 없듯 햇살이 환하게 피어오를까. 가마에서 탁탁 소리가 났다. 몇 개의 케이크 스탠드와 형준의 흉상은 알맞은 온도에서 잘 구워질 것이다.
창밖이 눈부시게 환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오래전 닫아걸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바람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핥았다. 담뱃갑에 새겨진 로고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오래전 사라진 안드로메다와 새로운 안드로메다를 떠올렸다. 나는 이제 나만의 방식으로 안드로메다를 애도할 것이고 친구들을 기억할 것이다. 안드로메다는 멀리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