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제주박물관 순회 전시 중 추사 김정희 세한도. 세한도는 추사 나이 58세 때인 1844년 제주 유배중에 그렸다. 늘 자신을 잊지 않고 먼 곳에서 책을 보내주는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정성에 감격해서 그에게 주는 그림이다(우선시상 , 우선은 이상적의 호, 이상적에게 주는 그림이란 뜻). 세한도는 서귀포시 대정향교 대성전에서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대성전 앞 마당에는 지금도 소나무와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세한도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렸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논어 구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림의 소재이며,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세한도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라는 의미이다. 추사 나이 24살에 아버지 김노경이 중국 사신으로 가는 길에 따라 갔는데 중국 선비들에게 "지금 청나라에서 가장 학문이 높으신 어른이 누구냐?"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78세인 "옹방강"을 만나게 되는데 김정희의 실력에 놀라서 자신의 두 아들과 의형제를 맺게 하고 서로 죽을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청나라는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방대한 한자 사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을 편찬했으며 건륭제는 전국의 책들을 모아 고전, 역사, 철학, 문학 등의 네 항목으로 분류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책들을 추려 일곱 질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이 바로 "사고전서(四庫全書)"이다. 그 일곱 질의 책은 중국의 일곱 지방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고 학자와 학생들이 두루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19세기들어 서태후 섭정기간 청나라 황실은 사치와 부패가 날로 심해갔다.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교단을 세워 1850~1864년까지 태평천국운동을 이끌었으나, 청나라는 영국군을 끌어들이며 홍수전은 스스로 자결하게 된다. 이로써 청나라도 서서히 몰락으로 가고 있었다. 1875년 광서제가 황제에 오르나 여전히 서태후가 섭정하는 기간에 약 2년간의 의화단 봉기가 일어나 중국내 외국인들과 분쟁이 발생하며 베이징의 공사관 지역이 포위되자 러시아,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을 공격하여 자금성으로 들어가 가장 아름답다는 여름궁전을 불태웠으며, 서태후는 한족 여인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멀리 피신한다. 약 7년 후 서태후가 죽자 세살 밖에 안된 "푸이"라는 어린 왕자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나이 어린 황제를 대신해 청나라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렸으나 러시아, 영국, 일본이 시키는 데로 할 수 밖에 없었다. 1911년 마침내 사천성에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봉기가 시작되었고 사천성 관리들은 청나라 정부나 섭정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새로운 정부인 "중화 민국"을 세우기로 한다. 페이징 남쪽의 난징(남경)에 수도를 정하고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문(孫文, 쑨원)을 임시 총통을 추대한다. 그들은 1912년 2월 어린 황제 푸이를 옥좌에서 내려오게 한다(신해혁명).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일본의 조계였던 톈진으로 가게된다. 이로써 수천년 이래 중국은 황제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