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만난 고산자 김정호?.
저마다 사람들로부터 불리는 별칭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살다가 보니 사람들로부터 여러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판 김정호’, ‘현대판 이중환’, ‘현대판 신삿갓’, ‘향토사학자’ ,‘걷기 도사’, 라는 별칭 외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 라고 했고, 도종환 시인은 ‘길의 시인’이라는 별칭을 만들어 주었다.
조용헌 선생은 나를 두고 ‘방외지사’라고 했으며 김지하 시인은 나를 일컬어 ‘삼남 일대를 걸어 다니는 민족민중사상가’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걸어 다니는 네이버>라는 별칭을 과하게 붙여주었다.
그 중, 내가 살아가는 방식만 놓고 보면 거기에 가장 걸 맞는 말은 아마도 ‘방외지사’라는 말일 것이다. 강호동양학연구소장인 조용헌 선생이 나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외지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방외지사方外之士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자격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방외지사가 될 수 없다. 월급쟁이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면 만 리를 가 보아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되도록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차를 타고 발통 위에 얹혀 다니면 주마간산에 그치고 만다. 산천을 두 발로 딛고 다녀야만 스파크가 튄다. 스파크가 튀어야 깊이가 생기는 것 아닌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인물이 전주에 사는 신정일이다.”
말이 좋아서 방외지사지, 달리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들이건 그 누구에게도 조그마한 금전적 혜택을 줄 수 없는 무능력자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언젠가 일본의 작가 무라카마 하루키가 프리랜서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출근을 하지 않고, 상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
얼마나 자유로운 직업인가? 그러나 프리랜서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소속이 없으므로 자유롭지만, 글을 쓰지 않거나 일을 안 하면, 내 통장에는 일원 한 푼 들어오는 법이 없다. 프리랜서의 삶은, 철저한 자기 관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방외方外란 유가儒家에서 도가道家나 불가佛家를 가리키는 말이고 방내方內는 유가를 공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 쓰는 택리지>와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를 비롯 이 나라 이 땅을 몇십 년 간 걸어서 쓴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 영산강>, 그리고 이 땅을 천천히 걸어서 쓴 여러 책들 때문에 나를 사람들이나 언론에서 ‘현대판 김정호’라고 부르지만 알고 보면 과찬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백두산을 여러 번 올랐다고 하며, 호미곶과 죽변곶이 얼마나 더 튀어나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을 여러 차례 오갔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의 강우석 감독과 주인공 차승원을 2015년 팔월 14일, 백두산의 남파 천지에서 만나 사진을 찍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도 그 영화 내용이 고산자 김정호의 일대기인 줄도 몰랐을 뿐 더러 내성적인 탓에, 얘기도 못 붙이고 사진만 찍고 말았으니,
하지만 사진은커녕 그가 누군지, 바람처럼, 또는 구름처럼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들도 얼마나 많은가?
김정호는 온 몸과 정신을 다 바쳐 우리나라의 지도를 그렸고, 이중환은 온 몸과 정신을 기울여 <택리지>를 지었다.
그들의 정신을 본 받고자, 이 땅을 떠돈 지, 몇 십 년, 그러다가 보니 백두산을 중국 쪽으로 남파, 북파, 서파로 올라서 세 번 다 천지를 보았다. 그러나 2003년 가을에 인천공항을 통해 고려항공을 타고 한 시간 만에 평앙의 순안공항에 도착했고, 다시 한 시간 만에 백두산 자락 삼지연 공항을 거쳐 올랐던 북한 쪽 백두산에서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천지 표지석만 보고 말았다. 하지만 백두산을 동서남북, 다 오르긴 올랐다.
영화 속의 김정호역을 맡은 ‘차승원’(강우석 감독 일행)씨와 타칭 현대판 김정호로 불리는 사람인 ‘내’(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가 중국 공산당 한 무리와 함께 푸른 천지를 보며 몇 시간을 보냈으니, 이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가끔은 우연처럼 필연처럼 사람들을 만난다. 그 만남이 좋은 인연이 되기도 하고 안 좋은 인연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도 말했지 않은가? “행운이라는 것이 문득 길에서 만나는 거지처럼 ‘한 푼 줍쇼?’ 하고 그렇게 나타난다.”고,
삶이란 것이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묘미가 있는 것이다. 어느 때,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삶’이라서,
나는 매일 매 순간, 기적을 꿈꾼다. 꿈은 공짜니까. 그것이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을미년 팔월 열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