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루카 1,26-38
능력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
여러분은 능력이 없으면 사랑도 못 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긍정하시나요, 부정하시나요? 만약 능력을 돈으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여자라면 능력 없고 인물 좋은 사람과 능력 있지만, 외모가 좀 딸리는 남자 중에 누구를 택하시겠나요?
돈은 능력입니다.
하느님은 그러나 약하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서 인간에 의해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요?
저는 사랑도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등장하십니다.
성모님은 강한 분이셨을까요?
성모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을까요? 그래서 성모님은 아무 저항도 없이 당신 아드님도 십자가에 내어주셔야 했습니다.
사랑은 약함인가요, 강함인가요?
약해지는 게 사랑인가요, 강해지는 게 사랑일까요?
치킨 프랜차이즈로 많은 돈을 벌고 백종원 대표의 골목식당처럼 ‘장사의 신’이란 유튜브를 진행하는 은현장 씨가 예전 씨름 선수 박광덕 씨를 방문한 내용이 조회수가 많이 나와 여러 편을 봤습니다.
박광덕 씨는 씨름으로 번 돈 15억을 사기 맞고 지금은 오산에서 작은 족발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학 보낼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재기하였고 지금은 유튜브로도 돈을 벌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은현장 씨는 어디를 방문하던 가게 사장이 나이가 많아도 존댓말을 쓰지 않습니다.
TV에 나와서도 연예인들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덩치 큰 전직 씨름 선수에게는 존댓말을 씁니다.
처음엔 족발이 좀 심심하고 막국수가 너무 싱겁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
하지만 장사의 신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100만 원 상당의 많은 선물을 사 들고 다시 갑니다.
맞아 죽을 각오 하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박광덕 씨에게 컨설팅해 줍니다.
박광덕 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던 맛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거의 연예인급이 된 은현장 씨의 말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해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 더 강한 사람일까요? 박광덕 장사일까요, 은현장 대표일까요?
누구도 박광덕 씨 앞에서 저런 솔루션은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현장 대표도 수백 억을 가진 자산가이지만, 그 앞에서는 약해졌습니다.
그에게 솔루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은 비굴함입니다.
사랑은 강한데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강해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은총을 계속 주시어 나는 못 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 갓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분들을 보면 스마트폰에 온통 손주 사진입니다.
부모보다 더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조부모는 아기에 대한 책임이 적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부모들은 아기들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부모들은 이미 자녀를 키워본 경력이 있습니다.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보면 낡아 버려진 오토바이 등을 재분해하여 새것처럼 만드는 과정을 올린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버려진 오토바이가 사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능력을 과시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잔인할 수 있어도 사랑과 능력은 비례한다고 봅니다.
능력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자이시기에 사랑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한 것대로,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시며 은총을 주심을 믿으셨습니다.
나에게 능력 자체이신 분이 함께 계시며 능력을 주고 계신다면 그 은총을 받지 못하는 온 세상 사람들은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20일
-루카 1장 26-38절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의 고백>
한 선배 신부님의 젊은 신부 시절의 고백을 들으며 저 역시 뜨끔했습니다.
사제로 갓 서품 받고 열정에 가득 차 있던 시절, 참으로 바쁘셨답니다.
아침 미사, 주당 20시간 이상 되는 종교수업, 거기다 수녀님들 수업, 본당 미사 및 특강 등등으로 하루가 총알처럼 지나갔답니다.
이웃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시간, 기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답니다.
언제 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겨우 미사드릴 때뿐이었답니다.
어찌 그리도 지금 제가 겪는 체험과 똑같은 체험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우리가 사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곁에 앉아있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우리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루카 복음사가가 들려주는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 사화를 전해 듣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전해듣고 난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던 시절,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던 시절부터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으시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한가지는 아들 예수를 주제로 한 묵상이자 기도였습니다.
성모님 역시 나약한 한 인간이었기에 아들 예수와 관련되어 끊임없이 솟아오르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 할 예수 잉태의 순간, 그리고 아들 예수가 성장해나가면서 겪게된 갖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속에 성모님은 끊임없이 묵상에 기도를 거듭하십니다.
한평생 진지하게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탁월한 신앙의 모범생이 되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일상 안에서 겪게 되는 갖은 의혹과 억울함, 이해하지 못함, 서운함 앞에서 성모님처럼 겸손하게 응답하고 기도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예수님 옆으로 다가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언젠가 우리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의 뜻을 명료하게 알아차릴 그 순간을 기다리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여정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0일 강론>
(2023. 12. 20. 수)(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8-33)”
여기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천사의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고 부르셨음을 전해 주는 말이기도 하고, 성모님이 그 특별한 은총을 받으신 것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는 하느님께서 성모님께 은총을 가득히 내려 주셨다는 뜻이고,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를 뽑으셨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뻐하여라.”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과 하실 일들’은, 성모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라는 말은, 천사가 하는 말 자체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자기가 왜 그런 ‘찬양’을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또는 이해하지 못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인사말은, 인간이(신앙인이) 들을 수 있는 찬양 가운데에서 최고의 찬양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비천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분이었기 때문에(루카 1,48), 그런 ‘찬양의 말’을 듣는 것에 몹시 놀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이 말은,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으셨고, 천사의 인사말을 무서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찬양을 하는가?” 라고
의아해한 것뿐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는 ‘가득히 받은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천사가 성모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다시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31절-33절의 말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뽑으신 이유, 뽑힌 성모님이 하시게 될 일,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게 될 일들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성모님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려고 메시아의 어머니로 너를 선택하셨는데, 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느냐?”>
“큰 인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다윗의 왕좌, 영원히 다스리다, 그분의 나라” 라는 말들은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인데, 성모님은 이 말들이 모두 메시아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4-38).”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가 아니라, “동정녀인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입니다.
<성모님은 “도대체 당신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묻지 않으셨고, “그런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항의하지도 않으셨고, “제가 아기를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약혼자 요셉과 결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성모님이 그 모든 일들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성모님의 질문은 응답할 준비를 이미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응답의 방법’을 묻는 질문이라는 점입니다.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사의 말을(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항상,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도 성모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천사의 대답을 단순하게 요약하면,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에서 ‘바랍니다.’ 라는 말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저도 원합니다.” 라는 뜻이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나도 원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천사가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의 말’을 듣고 나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모님께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다음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어쩔 수 없어서 복종한 것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면서도 맹목적으로 복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