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6. 큐티
마태복음 8:1 ~ 4
내가 원하노니
관찰 :
1)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심
- 1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 산상수훈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게 되었습니다.
2) 한 문둥병자의 등장
- 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절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와 오직 예수님께 고침을 받을 수 있기를 구한 것입니다.
-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문둥병자는 “나를 낫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원하는 것만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반응
-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을 문둥병자를 만지셨습니다. 당시에 한센병은 전염되는 것을 염려하여 누구도 만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문둥병이 발병된 이래 누구도 맨 손으로 자신의 살을 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문둥병자의 맨 살을 성하신 손으로 만지시는 것입니다.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문둥병자는 자신의 원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예수님의 원하심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문둥병자의 낫기를 원하는 마음보다 우선하시는 마음으로 문둥병이 낫기를 간구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원하심이 먼저인 것입니다.
- 즉시 문둥병자의 문둥병이 깨끗해 졌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즉시로 새살이 돋고, 뭉개진 피부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이렇게 어떠한 질병과 상처와 문제도 즉시로 회복시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권면
-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은 왜 하셨을까요?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아서 그러신 것일까요? 문둥병자가 함부로 예수님이 낫게 하셨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감추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 레14:2-32에 문둥병을 고침의 규례가 있습니다. 이 규례는 하나님께서 고쳐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을 고쳐주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말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장들을 믿게 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녀들로 믿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것은 문둥병자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으며, 인간의 속성은 하지 말라면 더하는 속성을 아시기에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 마 9:27-31에 두 소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께 이미 굽혀 절함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고, 자신의 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하심으로 치유와 구원을 체험하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그 행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예수님은 나의 원함을 아실뿐만 아니라 나의 원함보다 더 원하는 마음으로 나의 원함을 이루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습니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원함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정하고(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자신의 원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하시는 마음을 구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자신의 문둥병의 나음을 입고, 구원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서 예물을 드리고 주님의 치유하심을 증거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던지 못하던지 순종함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만 증거하라고 하심으로 그 말씀을 문둥병자가 순종했듯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형통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었더니 복을 받더라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복음이 그 가치에 비해 저렴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야 합니다. 문둥병을 고침받은 그 성한 몸이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본질보다는 비본질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것을 내 인생의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는 그 때 그 때 주님께 여쭙고 말씀을 꾸준히 보며 귀 기울이는 수 외에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내 경건의 능력이 부족하기에 내 판단으로 무엇을 해도 주님을 증거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언젠가는 이르게 되기를 소원해보지만 죄성이 가득한 내 힘으로는 불가합니다. 좌절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를 인해서 소망이 있습니다.
적용 :
1) 나의 원함을 먼저 고하고, 주장하고, 억지를 피기보다 주님의 원하심을 구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의 기본 자세이고,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을 들은 성도의 구할 바라는 것을 문둥병자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메시지입니다.
2)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함으로 나는 없고 예수님만 있는 경지에 오르기를 소원합니다. 언제나 나 중심적이고,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려하는 나이기에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드러낸다는 것이 솔직히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그래서 죽음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싱싱하게 살수록 기독교는 패퇴합니다. 내가 끊임없이 죽고 죽을수록 기독교의 진리는 싱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내가 투병 중에 낫기를 간절히 간구했지만 기도의 응답은 아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나 안타까움이나 외로움이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감당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임을 믿어의심하지 않겠습니다.
3) 주님께서 지금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