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공손추가 말하기를,) “감히 묻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을 알며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 하셨다. 惡, 平聲.
○ 公孫丑復問孟子之不動心所以異於告子如此者, 有何所長而能然, 而孟子又詳告之以其故也. 知言者, 盡心知性, 於凡天下之言, 無不有以究極其理, 而識其是非得失之所以然也. 공손추는 맹자의 부동심이 고자와 다름이 이와 같은 것은 어떤 것에 장점이 있어서 그럴 수 있는지를 다시 물었고, 맹자는 또 그에게 그 이유를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말을 안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본성을 알아서, 무릇 천하의 모든 말에 대하여, 그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여, 그 시비와 득실이 그렇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朱子曰 知言便是窮理 不先窮理見得是非 如何養得氣 須是道義一一審處得是 其氣方充大 주자가 말하길, “知言은 곧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니, 먼저 이치를 궁구하여 시비를 알아볼 수 없다면, 어떻게 氣를 기를 수 있단 말인가? 모름지기 道意를 하나하나 잘 살펴서 올바르게 대처해야만, 그 氣가 바야흐로 채워지고 커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論浩然之氣一段緊要全在知言上 所以大學許多工夫全在格物致知 格物則能知言 誠意則能養氣 맹자에서 호연지기를 논한 일단락에서 긴요한 점은 온전히 知言 위에 있다. 이 때문에 대학의 수많은 공부가 온전히 격물치지에 있는 것이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면, 곧 知言에 능하게 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면, 곧 養氣에 능하게 된다.
知言養氣雖是兩事 其實相關 正如致知格物正心誠意之類 若知言便見得是非邪正 義理昭然則浩然之氣自生 知言과 養氣는 비록 두 가지 일이지만, 기실은 서로 관련되어 있으니, 바로 致知와 格物, 正心과 誠意의 부류와 같은 것이다. 만약 말을 안다면, 곧 是非와 邪正을 알 수 있으니, 義理에 밝다면, 호연지기가 저절로 생기는 법이다.
知是知得此理 告子便不理會 故以義爲外 知라는 것은 이 이치를 알아서 터득하는 것이다. 고자는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義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雲峯胡氏曰 論語亦曰 不知言無以知人 但論語爲初學而言 故集註但曰 言之得失可以知人之邪正 孟子則自言也 故集註釋之比論語尤詳且重 論語之知言 爲知人之端入德之事 孟子之知言 爲養氣之本成德之事 운봉호씨가 말하길, “논어에서도 역시 말하길,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다만 논어는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말했기 때문에, 집주에서는 단지 말의 득실로써 사람의 기울고 바름을 알 수 있다고만 말했다. 맹자에서는 스스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집주에서 그것을 풀이한 것이 논어에 비하여 더욱 상세하고 무거운 것이다. 논어의 知言은 사람을 아는 단서이자 덕에 들어가는 일이 되고, 맹자의 知言은 養氣의 근본이자 덕을 이루는 일이 된다.”라고 하였다.
浩然, 盛大流行之貌. 氣, 卽所謂體之充者. 本自浩然, 失養故餒, 惟孟子爲善養之以復其初也. 호연이란 성대하게 흘러가는 모습이다. 氣는 곧 이른바 체를 채우는 것인데, 본래 저절로 호연하지만, 기름을 잃기에 곧 쪼그라들고 만다. 오직 맹자만이 그것을 잘 길러 그 처음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朱子曰 浩然之氣 乃指其本來體段而言 주자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곧 그 본래의 體段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酬酌應接擧皆合義 則俯仰並無愧怍 故其氣自然盛大流行 수작하고 응접하는 것이 모조리 義에 부합한다면,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도 아울러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그 기가 자연히 성대하게 흘러 행해지는 것이다.
慶源輔氏曰 盛大言其體 流行言其用 才怯小則便非氣之本體 才鬱塞則便非氣之本用 氣 卽天地之氣而人之所以充滿其身者 其本然之體用 自是浩然 由失其養 故餒乏而不充乎體 경원보씨가 말하길, “성대하다는 것은 그 體를 말한 것이고, 유행한다는 것은 그 用을 말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겁을 먹고 작아지면, 곧 氣의 본래의 體가 아니고, 조금이라도 막힌다면, 곧 氣의 본래의 用이 아니다. 氣는 곧 천지의 氣로서 사람이 이로써 제 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 본연의 體와 用은 저절로 호연하지만, 그 기름을 잃기 때문에, 쪼그라들어서 體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孟子之言善養氣 是以成德言 非是說做工夫 下文必有事焉而勿正以下 却是說養氣做工夫處 쌍봉요씨가 말하길, “맹자가 氣를 잘 기른다고 말한 것은 덕을 이룸으로 말한 것이지, 공부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아랫글의 ‘필유사언이물정’ 이하가 오히려 氣를 기름에 있어 공부하는 것을 말한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註章句言復其初者凡三 論語謂人之性其初本善 學者當明善以復其初 大學謂人之心其初本自光明 學者當明之以復其初 此言人之氣其初本自盛大流行 惟孟子能善養之以復其初 然非學以復此心此性之初者 未必能復此氣之初也 故孟子養氣先之以知言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와 장구에서 그 처음을 회복한다고 말한 것은 모두 3개다. 논어에서는 ‘사람의 본성은 그 처음이 본래 선하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선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고, 대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은 그 처음이 본래 저절로 빛나고 밝으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그것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여기에서는 ‘사람의 氣는 그 처음이 본래 저절로 성대하게 유행하지만, 오직 맹자만이 능히 그것을 잘 길러서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배움으로써 이 마음과 이 본성의 처음을 회복한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 氣의 처음을 능히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養氣를 함에 있어, 知言을 앞세웠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蓋惟知言, 則有以明夫道義, 而於天下之事無所疑; 養氣, 則有以配夫道義, 而於天下之事無所懼, 此其所以當大任而不動心也. 대개 오직 말을 알아야만, 저 도의에 밝아질 수 있어서, 천하의 일에 의심할 것이 없게 된다. 기를 기르면, 저 도의와 짝할 수 있어서, 천하의 일에 두려워할 바가 없게 된다. 이것이 그가 큰일을 맡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慶源輔氏曰 集註疑懼二字以應此章第一節註文疑惑恐懼四字也 道體也義用也 言道義以該體用也 知言 則於道義究極無餘 一事來 則以一理應之 夫復何疑之有 養氣 則於道義襯貼得起 勇猛果決而不留行 夫復何懼之有 경원보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疑懼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이 장의 첫 번째 절의 註文인 疑惑恐懼라는 네 글자에 대응시킨 것이다. 道는 體이고 義는 用이니, 道義가 이로써 體와 用을 갖추었다고 말한 것이다. 말을 알게 되면, 도의에 대하여 지극히 궁구하여 남은 것이 없어서, 일 하나가 오면 이치 하나로 대응하니, 무릇 또다시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氣를 배양하면, 도의에 대하여 친밀해져서, 용맹하고 과감하며 결단하여 행할 것을 남기지 않으니, 무릇 또다시 무슨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浩然之氣 卽達德中之勇 不動心卽是勇者不懼 添一箇知言 卽是智者不惑 쌍봉요씨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곧 두루 통하는 덕 중의 용맹함이고, 부동심은 곧 용감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의 知言은 첨가하면, 곧 지혜로운 사람이 의혹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章首公孫丑問動心 集註以爲有所恐懼疑惑 先懼而後疑者 懼者心之動 疑者心之所由以動也 恐懼二字於動字最切而疑惑二字已蘊知言之意 此則釋知言養氣二句 故先疑而後懼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 장의 첫머리에서 공손추가 動心을 물었는데, 집주에서는 恐懼疑惑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두려움을 앞세우고 의혹함을 뒤로 돌린 까닭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마음이 움직인 것이고, 의혹함이라는 것은 마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恐懼라는 두 글자는 動이라는 글자에 제일 절실하면서, 疑惑이라는 두 글자는 이미 知言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知言과 養氣의 두 구절을 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의혹함을 앞세우고 두려움을 뒤로 돌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知言則盡心知性 萬理洞然 何所疑惑 養氣則動皆合義 遇事卽行 何有畏怯 二者旣全 何能動心 동양허씨가 말하길, “말을 알면, 마음을 다하여 天性을 알아서 온갖 이치가 환할 것이니, 의혹하는 바가 어디 있겠는가? 氣를 배양하면, 움직이는 것이 모두 義에 부합하여, 일을 만나면 곧바로 행할 것이니,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있겠는가? 두 가지가 이미 온전하니, 어찌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告子之學, 與此正相反. 其不動心, 殆亦冥然無覺, 悍然不顧而已爾. 고자의 학문은 이와 정 반대다. 그 부동심은 거의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피워 돌아보지 않을 따름이다.
問知言養氣之說 朱子曰 孟子之不動心 知言以開其前 故無所疑 養氣以培其後 故無所懼 如智勇之將 勝敗之形得失之算 判然於胸中 而熊虎貔貅 百萬之衆 又皆望其旌旄 聽其金鼓 爲之赴湯蹈火有死無二 是以千里轉戰 所向無前 其視告子之不動心 正猶勇夫悍卒初無制勝料敵之謀 又無蚍蜉蟻子之援 徒恃其勇而挺身以赴敵也 其不爲人所擒者 特幸而已 告子之學 他雖無所考證 然以孟子此章之言 反覆求之 亦曉然 可見矣 先引告子之言 以張本於前 後言己之所長以著明於後 今以其同者而比之 則告子所不得之言 卽孟子所知之言 告子所勿求之氣 卽孟子所養之氣也 以其異者而反之 則告子之所以失 卽孟子之所以得 孟子之所以得 卽告子之所以失也 是其彼此之相形前後之相應 固有不待安排 而不可移易者 누군가 知言과 養氣의 학설에 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맹자의 부동심은 知言으로 그 앞을 열었기에, 의혹하는 바가 없고, 養氣로써 그 뒤를 배양하였기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지혜롭고 용감한 장수는 승패의 형태와 득실의 계산이 가슴속에 확연하지만, 곰과 호랑이, 표범 같은 백만 대군이 또한 모두 그 깃발를 바라보고 그 징과 북소리를 들으며, 그를 위하여 끓는 물 속에 뛰어들고 타는 불을 밟고서 죽더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으면서, 이로써 천리를 전전하며 싸울지라도,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전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자의 부동심을 살펴보면, 바로 용맹한 자와 사나운 졸병이 처음부터 승리를 쟁취하고 적을 헤아리는 계책도 없고, 또한 개미와 벌레 같은 작은 지원도 없이, 헛되이 자기의 용기만 믿고서 몸을 일으켜 적에게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가 남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그저 요행일 따름이다. 고자의 배움은 비록 고증할 방도가 없지만, 그러나 맹자가 이장에서 한 말로써 반복하여 구해보면, 또한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고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에다 근본을 펼치고, 나중에 자기가 잘하는 바를 말함으로써 뒤에다 드러내어 밝혔다. 지금 서로 같은 것으로 비교하자면, 고자가 터득하지 못했던 말은 곧 맹자가 알았던 말이고, 고자가 구하지 말라고 했던 氣는 곧 맹자가 길렀던 氣였다. 그 서로 다른 것으로 돌이켜보자면, 곧 고자가 잃었던 까닭은 바로 맹자가 얻었던 까닭이고, 맹자가 얻었던 이유는 바로 고자가 잃었던 이유였다. 이것은 피차가 서로 형태를 이루어 주고, 전후가 서로 호응하는 것이니, 본래부터 안배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옮기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孟子能知人言之是非 告子乃自以其言爲外而不復考 孟子善養其氣而告子乃以氣爲末而不知求 此所謂正相反也 其不動心者不過是硬把定其心 冥冥然都無知覺 於一切事皆漠然 與之扞格而不顧耳 亦其能終不動哉 然其所以能不動者 亦幸而已 경원보씨가 말하길, “맹자는 사람 말의 是非를 능히 알았지만, 고자는 도리어 스스로 그 말을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서 더 이상 고찰하지 않았다. 맹자는 자신의 氣를 잘 길렀지만, 고자는 도리어 氣를 말단으로 여겨서 구할 줄 몰랐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완전히 상반된다는 것이다. 그의 부동심이라는 것은 억지로 그 마음을 붙잡아 안정시켜서 멍하니 지각하는 바가 없는 것에 불과하였다. 모든 일에 대하여 전부 막연히 그것을 가로막고 쳐내고는 돌보지 않았을 따름이니, 이 또한 끝내 부동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고자가 부동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요행일 따름이었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冥然無覺 則不能無疑 悍然不顧 非眞能無懼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멍하니 깨닫는 바가 없다면, 의혹하는 바가 없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고, 일부러 모른 체하여 돌보지 않는 것은 진짜로 두려워함이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2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공손추가 말하기를,) “감히 묻습니다만,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말합니까?”라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하기 어렵다.
孟子先言知言而丑先問氣者, 承上文方論志氣而言也. 難言者, 蓋其心所獨得, 而無形聲之驗, 有未易以言語形容者. 故程子曰: “觀此一言, 則孟子之實有是氣可知矣.” 맹자가 知言에 대하여 먼저 말하였음에도 공손추가 氣에 대하여 물은 것은, 윗글에서 지와 기에 대하여 논한 것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다. 말하기 어렵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마음으로 홀로 체득하였지만 형용하여 말한 경험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형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자가 말했다. “이 말 한 마디를 살펴보면, 맹자가 실제로 이러한 기운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問浩然之氣與血氣如何 朱子曰 只是一氣 義理附于其中 則爲浩然之氣 不由義理而發 則只爲血氣 然人所稟氣亦自不同 有稟得盛者 則爲人强壯 隨分亦有立作 使之做事 亦隨分做得出 若稟得衰者 則委靡巽懦 都不解有所立作 唯是養成浩然之氣 則却與天地爲一 更無限量 누군가 묻기를, “호연지기는 혈기와 더불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말하길, “그저 같은 하나의 氣일 뿐이다. 義理가 그 안에 붙어있으면 호연지기가 되지만, 義理를 말미암지 않고서 발현되면, 그저 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품부받은 氣는 또한 저절로 같지 않은 법이니, 성대하게 품부받은 자는 그 사람됨이 굳세고 씩씩하여, 분수에 따르더라도 역시 立作(바로 서서 행함)이 있고, 그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면, 역시 분수에 따라서 해내는 것이다. 만약 쇠미하게 품부받은 자라면, 미미하고 나약하여 항상 立作하는 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호연지기를 양성해야만 도리어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니, 더 이상 한량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先說知言後說養氣 而公孫丑先問氣者 向來只爲他承上文先論志氣而言也 今看來不然 乃是公孫丑會問處 留得知言在後面問者 蓋知言是末後合尖上事 如大學說正心誠意 只合殺在致知 在格物一句 蓋是用功夫起頭處 맹자는 먼저 知言을 말하고 나중에 養氣를 말했지만, 공손추가 먼저 氣를 물었던 것은, 줄곧 그저 그가 윗글에서 먼저 志氣를 논한 것을 이어받아 말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보기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공손추가 제대로 질문할 줄 알았던 부분이다. 知言을 뒤에 남겨놓고 물은 것은 대체로 知言이 끝에서 나중에 윗 일을 수습하여 끝맺음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대학에서 정심과 성의를 말할 적에, ‘致知는 格物에 있다’는 한 구절로 수습하여 줄인 것과 같으니, 아마도 이것이 공부를 시작하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3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그 기운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호연지기가 천지에 가득 차게 되니라.
至大初無限量, 至剛不可屈撓. 蓋天地之正氣, 而人得以生者, 其體段本如是也. 惟其自反而縮, 則得其所養; 而又無所作爲以害之, 則其本體不虧而充塞無間矣. 지극히 큰 것은 애당초 한량이 없는 것이요, 지극히 굳센 것은 구부리거나 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천지의 바른 기운은 사람이 그것을 얻어 생겨나는 것인데, 그 체단이 본래 이와 같은 것이다. 오직 그 스스로 돌이켜보아서 곧으면, 그가 기른 바를 얻을 것이고, 또한 작위로써 그것을 해치지 않으면, 그 본체가 이지러지지 않고 빈틈없이 가득 찰 것이다.
慶源輔氏曰 初無限量 便是盛大 不可屈撓 便是流行 卽所謂浩然之氣也 不言用者 擧體則足以該之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처음부터 한량이 없다는 것은 곧 성대한 것이고, 구부리거나 휠 수 없다는 것은 곧 유행하는 것이니, 바로 이른바 호연지기라는 것이다. 用을 말하지 않은 것은 體를 들면 이로써 그것도 갖추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照應本章上文釋之 以直之直字 卽是上文縮字意 신안진씨가 말하길, “본장의 윗글과 호응시켜 해석하였으니, ‘올곧음으로써 기른다’의 直자는 곧바로 윗글의 縮자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充塞彌滿乎天地之間 而無有間斷之者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천지간에 가득 차서 중간에 끊어짐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浩然之氣難識 須要識得 當行不慊於心之時 自然有此氣象 정자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알기 어려우니, 반드시 행함에 있어 마음에 부족함이 없는 때에 당하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기상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問伊川於至大至剛以直點句 先生却於剛字點句 朱子曰 若於直字點句 則養字全無骨力 누군가 묻기를, “정이천 선생은 至大至剛以直에 방점을 찍었는데, 선생께서는 도리어 剛자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어째서인가요?”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만약 直자에 방점을 찍는다면, 기른다는 養자가 완전히 무력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至大至剛 氣之本體 以直養而無害 是用功處 塞于天地之間 乃是效也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다는 것은 氣의 본체이고, 올곧음으로서 길러서 해침이 없다는 것은 힘쓰는 부분이며, 천지간에 가득찬다는 것은 곧 그 공효인 것이다.
問他書不說養氣 只孟子言之 何故 曰 這源流便在那箇心廣體胖 內省不疚夫何憂何懼處來 大抵只是一氣 又不是別將箇甚底去養他 但集義便是養氣 知言便是知得這義 人能仰不愧俯不怍時 看這氣自是浩然 塞乎天地之間 누군가 묻기를, “다른 책에서는 養氣를 말하지 않는데, 단지 맹자만 그것을 말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의 원류는 저 ‘心廣體胖 內省不疚 夫何憂何懼’라는 부분에서 나온 것인데, 대저 단지 하나의 氣일 따름이니, 다시 달리 어떤 것을 붙잡고 가서 그것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集義는 곧 養氣이고, 知言은 곧 이러한 義를 알아서 터득하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때에, 이 氣가 저절로 호연하여 천지간에 가득차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纔說浩然 便有剛果意思 如長江大河浩浩然而來也 富貴貧賤威武不能淫移屈之類 皆低 不可以語此 丑本意 只是設問孟子能擔當得此樣大事否 故孟子所答只說許多剛勇 故說出浩然之氣 只就問答 本文看之 便見子細 조금이라도 호연을 말하면, 곧바로 굳세고 과단성 있다는 뜻이 있게 된다. 마치 장강과 대하가 호호탕탕하게 흘러오는 것처럼 말이다. 부귀와 빈천과 위무가 음탕하게 하거나 뜻을 옮기거나 굽히지 못하게 한다는 부류는 모두 저급한 것이라서 이로써 호연지기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공손추의 본래 뜻은 그저 맹자가 능히 이렇게 큰 일을 담당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설하여 물었을 뿐이기 때문에, 맹자가 대답한 바도 그저 수많은 굳셈과 용감함을 말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호연지기를 말한 것이니, 그저 문답에 나아가 본문에서 그것을 살펴보면, 곧바로 자세한 것이 보일 것이다.
魯齋王氏曰 此所謂其爲氣也 氣之體 下文所謂其爲氣也 氣之用 노재왕씨가 말하길, “여기서 말한 이른바 ‘其爲氣也’라는 것은 氣의 體이고, 아랫글에서 말하는 이른바 ‘其爲氣也’라는 것은 氣의 用이다.”라고 하였다.
○ 程子曰: “天人一也, 更不分別. 浩然之氣, 乃吾氣也. 養而無害, 則塞乎天地; 一爲私意所蔽, 則欿然而餒, 知其小也.” 謝氏曰: “浩然之氣, 須於心得其正時識取.” 又曰: “浩然是無虧欠時.” 정자가 말하길, “하늘과 사람은 하나로서, 다시 나누고 구별하지 않는다. 호연기지가 바로 내 기다. 이를 길러 해치지 않으면, 곧 천지간에 가득 차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사로운 뜻에 가려지면, 곧 서운하게 비쩍 쪼그라드니, 그 작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사씨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모름지기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을 때 안다.”고 하였다. 다시 말했다. “호연이란 것은 이지러지고 부족함이 없는 때다.”
朱子曰 天地之氣無處不到 無處不透 是他氣剛 雖金石也透過去 人便是稟得這箇氣 無欠闕 所以程子曰 天人一也 更不分別 浩然之氣 乃吾氣也 주자가 말하길, “천지의 氣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뚫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 氣는 굳세어서, 비록 쇠와 돌이라고 할지라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사람이면 곧 이 기를 품부받아서 이지러지거나 부족함이 없다. 이 때문에 정자가 ‘하늘과 사람이 하나이니, 더 이상 분별하지 않는다. 호연지기가 곧 내 기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浩然之氣是稟得底否 曰 只是這箇氣 若不曾養得 剛底 便粗暴 弱底 便衰怯 누군가 묻기를, “호연지기는 품부받은 것입니까?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저 이런 氣일 따름이다. 만약 일찍이 기른 적이 없다면, 굳센 것은 곧 거칠고 사납게 될 것이고, 약한 것은 곧 쇠미하고 겁약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孟子說浩然之氣 却不分稟賦淸濁說 曰 此章孟子之意 不是說氣稟 只因說不動心 袞說到這處 似今人說氣魄相似 有這氣魄 便做得這事 無氣魄便做不得 누군가 묻기를, “맹자는 호연지기를 말하면서, 도리어 품부받은 것의 청탁을 구분하지 않고 말하였는데,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 장에서 맹자의 뜻은 氣稟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부동심을 말한 것으로 인해 돌아서 이 부분까지 말하게 된 것이니,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기백과 서로 비슷해 보인다. 이런 기백이 있으면 이 일을 해낼 수 있고, 기백이 없다면, 해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浩然之氣 本是天地之正氣 然天人一理 故孟子更不分別 直以爲己之氣也 養而無害 則全其本體 而塞乎天地 若不務集義而所爲一有私意遮隔了 則便不流行而歉然餒之 不足以充乎身而失其正大之體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본래 천지간의 올바른 氣이지만,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치이기 때문에, 맹자는 더 이상 분별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의 氣라고 여겼던 것이다. 배양하되 해침이 없다면, 그 본래의 體를 온전하게 하여 천지간에 가득찰 것이다. 만약 集義에 힘쓰지 않아서 행하는 바에 일단 私意가 생겨서 덮어 가리게 되면, 곧 유행하지 않아서 서운하게 쪼그라들고 마는 것이니, 제 몸을 가득 채우기에 부족하여 그 正大한 體를 잃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人得天地之氣以生 天地之氣如此剛大 人之氣亦合如此剛大 其所以不能如此者 不善養之故也 程子曰 人與天地一氣也 人特自小耳 且如文武一怒而安天下之民也 只是這氣做出來他底 却與天地一般樣 至大至剛 只是善養故耳 쌍봉요씨가 말하길, “사람은 천지의 기를 얻어서 생겨나는데, 천지의 기가 이렇게 굳세고 크니, 사람의 기도 역시 마땅히 이렇게 굳세고 커야 한다. 사람이 이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잘 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자가 말하길, 사람은 천지와 더불어 하나의 기라고 하였으니, 사람이 그저 스스로를 작게 할 뿐이다. 또한 예컨대 문왕과 무왕이 한 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도 그저 이 기가 그러한 것을 만들어낸 것이지만, 도리어 천지와 더불어 같은 모양으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그저 잘 길렀기 때문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此氣是天地之正氣 心得其正 便是不失其所得於天地之正者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 기는 천지의 올바른 氣다. 마음으로 그 올바름을 터득하였다는 것은 바로 천지에서 얻은 바의 올바름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此氣本得於天 故至大至剛 剛大天之體段也 聖人生知安行 無非直道 不假乎養 衆人知不明自害其剛大 故須直以養之 直卽義也 塞天地言其效也 동양허씨가 말하길, “이 기는 본래 하늘에서 얻기 때문에,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것이다. 굳세고 큰 것은 하늘의 체단이다. 성인은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하게 행하는 법이니, 올곧은 도가 아님이 없어서, 배양함에 힘을 빌리지 않는다. 뭇사람은 앎이 밝지 못하여 스스로 그 굳세고 큼을 해치기 때문에, 반드시 올곧음으로써 그것을 길러주어야 하는 것이다. 直이란 곧 義다. 천지에 가득 찬다는 것은 그 공효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4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그 기운됨이 의리와 도리에 짝하였으니 이것(의리와 도리)이 없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餒, 奴罪反.
○ 配者, 合而有助之意. 짝한다는 것은 합하여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慶源輔氏曰 此意本於李先生曰 配是襯貼起來 朱子謂襯貼二字說配字極親切 蓋道義是虛底物 本自孤單 得這氣襯貼起來 便張大無所不達 今人做事 亦有合於道義者 若無此氣 則只是一箇衰颯底人 李先生又曰 氣與道義 一袞出來 朱子謂一袞出來 說得道理好 孟子分明說 配義與道 不是兩物相補貼 只是一袞發出來 故朱子用此意而就配字說出此句 蓋已極於精切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이 뜻은 이선생이 말한 ‘配는 친밀하게 붙어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라는 것에 근본을 두었다. 주자는 襯貼 두 글자가 配자를 설명함에 있어 지극히 가깝고 적절하다고 말하였다. 대체로 道義란 텅빈 사물이니, 본래 스스로 외로워서, 이 기를 얻어서 친밀하게 붙어 지내게 되어야만, 곧 펴지고 커져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도, 역시 도의에 부합하는 것이 있으니, 만약 이런 氣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쇠잔한 사람일 뿐이다. 이선생이 또 말하길, 氣는 道義와 더불어 한꺼번에 굴러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주자도 한꺼번에 굴러나왔다는 표현이 그 이치를 잘 설명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맹자는 분명하게 道와 義에 짝한다는 것은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보완하여 들러붙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꺼번에 굴러나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주자는 이 뜻을 이용하여 配자에 나아가 이 구절을 말해낸 것이니, 대체로 이미 정밀하고 적절함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合而有助 譬如妻之配夫 以此合彼而有助於彼者也 蓋理氣不相離 氣以理爲主 理以氣爲輔 大凡人不能爲善 爲是無那氣來襯貼 有那氣來襯貼起 做得定是有力 쌍봉요씨가 말하길, “합쳐서 도움을 준다는 것은 비유하건대, 아내가 남편에게 짝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으로써 저것에 합해서 저것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대체로 理와 氣는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氣는 理를 주인으로 삼고, 理는 氣를 보충으로 삼는다. 무릇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저 氣가 와서 친밀하게 들러붙음이 없기 때문이니, 저 氣가 와서 친밀하게 붙어 지내게 된다면, 행함에 반드시 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所謂合卽延平所謂一袞出來之意 所謂助卽延平所謂襯貼起來之意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른바 合한다는 것은 곧 연평이씨가 말한 소위 한꺼번에 굴러나옴이라는 뜻이고, 이른바 도움을 준다는 것은 연평이씨가 말한 소위 친밀하게 붙어지냄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義者, 人心之裁制. 道者, 天理之自然. 餒, 飢乏而氣不充體也. 言人能養成此氣, 則其氣合乎道義而爲之助, 使其行之勇決, 無所疑憚; 若無此氣, 則其一時所爲雖未必不出於道義, 然其體有所不充, 則亦不免於疑懼, 而不足以有爲矣. 義라는 것은 사람 마음을 재단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道라는 것은 천리의 자연스러움이다. 餒는 굶주리고 결핍되어 기가 몸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기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 기는 도의에 배합하여 그에 도움을 주고, 그 행동을 용감하게 결단함에 의심하고 거리끼는 바가 없게 만들 것이다. 만약 이 기가 없다면, 그것이 한 때 행하는 바가 비록 반드시 도의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몸이 가득 채워지지 않는 바가 있으니, 그렇다면,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함을 면치 못하여 훌륭한 일을 해내기에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疑憚疑懼四字仍應前註文疑惑恐懼字意 憚卽恐懼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疑憚과 疑懼라는 4글자는 여전히 앞의 주석글에 나온 疑惑恐懼라는 글자의 뜻에 대응한 것이다. 憚이란 곧 恐懼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浩然之氣天地之正氣 大則無所不在 剛則無所屈 以直道順理 養而無害 則塞乎天地之間 有少私意 卽是氣虧 無不義便是集義 有私意便是餒 정자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천지의 올바른 氣이니, 크기에 어디라도 없는 곳이 없고, 굳세기에 구부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곧은 도와 순리로 길러주되 해침이 없다면, 천지간에 가득 차게 되지만,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곧바로 이 氣가 이지러지는 것이다. 의롭지 않음이 없다면 곧 集義인 것이요, 사사로운 뜻이 있다면 곧 쪼그라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率氣在志 義(養)氣在直 內有私意則餒 無不義 則浩然 氣를 이끄는 것은 志에 달려있고, 氣를 기르는 것은 곧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안에 사사로운 뜻이 있다면, 바로 쪼그라들 것이고, 의롭지 않음이 없다면, 호연할 것이다.
朱子曰 道義別而言 則道是物我公共自然之理 義則吾心之能斷制者 所用以處此理者也 주자가 말하길, “道義를 구별하여 말한다면, 道는 남과 내가 공정하게 함께 하는 자연적인 이치이고, 義는 곧 내 마음이 능히 판단하여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이용하여 이 이치를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道是擧體統而言 義是取此一事所處而言 如父當慈子當孝君當仁臣當敬 此義也 所以孝慈所以仁敬 則道也 故後面只說集義 道는 體의 계통(시스템)을 들어 말한 것이고, 義는 이 하나의 일을 처리하는 바를 취하여 말한 것이다. 예컨대 아비는 마땅히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은 마땅히 효도해야 하며, 임금은 마땅히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는 이런 것들은 義다. 효도하고 자애로워야 하는 까닭이나, 어질고 공경해야 하는 까닭은 곧 道이다. 그래서 뒷면에서는 그저 義를 모은다고만 말했던 것이다.
道義是公共無形影底物事 氣是自家身上底 自家若無這氣 則道義自道義 氣自氣 如何助得他 道義는 공정하게 함께 하며 형태도 그림자도 없는 사물이다. 氣는 자기 몸 위에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만약 이러한 기가 없다면, 도의는 그저 도의이고, 기는 그저 기일 뿐이니, 어떻게 그것을 도울 수 있겠는가? 兩箇其爲氣也 至大至剛 是說此氣之體段 配義與道 是說此氣可將如此用 是說氣之功用 두 개의 ‘其爲氣也’에 대하여,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다고 한 것은 이 氣의 체단을 말한 것이고, 道와 義에 짝한다고 말한 것은 이 氣를 장차 이와 같이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한 것으로서, 氣의 공효와 쓰임새를 말한 것이다.
或問何以言氣之配義與道也 曰 道體也 義用也 二者皆理也 形而上者也 氣也者 器也 形而下者也 以本體言之 則有是理而後有是氣 而理之所以行 又因氣以爲質也 以人言之 則必明道集義然後 能生浩然之氣 而義與道又因是氣而後得以行焉 蓋三者雖有上下體用之殊 然其渾合而無間也乃如此 苟不知所以養而有以害之 則理自理 氣自氣 其浩然而充者 且將爲慊然之餒矣 或略知道義之爲貴 而欲恃之而有爲 亦且散漫蕭索而不能以自振矣 혹자가 묻기를, “어째서 氣가 義와 道에 짝한다고 말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道는 體이고 義는 用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理이면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氣라는 것은 기물이니, 형이하학적인 것이다. 본체로써 말하자면, 이러한 理가 생긴 이후에 이런 氣가 있는 것이지만, 이 理가 행해지는 까닭은 또한 氣를 그 바탕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道를 밝히고 義를 모은 연후에, 능히 호연지기가 만들어질 수 있지만, 義와 道도 다시 이러한 氣를 바탕으로 한 후에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 3가지는 비록 上下와 體用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러나 순수하게 합쳐져서 틈이 전혀 없는 것이 도리어 이와 같은 것이다. 만약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그것을 해침이 있다면, 理는 곧 理고 氣는 곧 氣일 뿐이니, 그 호연하게 채우는 것은 또한 장차 흡족하지 못하게 쪼그라들고 말 것이다. 혹자는 약간이나마 道義가 귀함을 알고서 그것만 믿고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지만, 이 또한 산만하고 쓸쓸하고 삭막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浩然之氣 全靠道義在裏面做骨子 無這道義 氣便軟弱 蓋緣有是理而後有是氣 理是氣之主 如天地二五之精氣 以有太極 在裏面做主 所以他底常恁地浩然 쌍봉요씨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온전히 道義가 그 안에서 골자가 되는 것에 의존한다. 이러한 도의가 없다면, 氣는 곧 연약해진다. 대체로 이런 理가 있은 이후에 이런 氣가 있기 때문에, 理는 氣의 주인이다. 예컨대 천지의 음양오행의 정기는 태극이 그 안에서 주인이 되어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이렇게 浩然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5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行有不慊於心 則餒矣 我故曰 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 이것(호연지기)은 의리를 많이 모여서 생겨나는 것이니 의리는 갑자기 취해지는 것이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내가 그러므로 ‘고자는 일찍이 의리를 알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의리를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慊, 口簟反, 又口劫反.
○ 集義, 猶言積善, 蓋欲事事皆合於義也. 襲, 掩取也, 如齊侯襲莒之襲. 義를 모은다는 것은 선을 쌓는다는 말과 같은데, 대개 하는 일마다 모두 의로움에 배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습이란 가리고서 몰래 취한다는 것이니, 제나라 제후가 거나라를 엄습한다고 하는 襲과 같다.
春秋襄公二十三年秋 齊侯伐晉 冬齊侯襲莒 註輕行掩其不備 曰襲 因伐晉還襲莒 춘추에 따르면, 양공 23년 가을에, 제나라 제후가 진나라를 정벌하였고, 겨울에 제나라 제후가 거나라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주석에 가볍게 행군하여 그 대비함이 없는 것을 갑자기 공격하는 것을 일컬어 襲이라고 한다고 했다. 진나라 정벌로 인해 돌아와서 거나라를 습격한 것이다.
言氣雖可以配乎道義, 而其養之之始, 乃由事皆合義, 自反常直, 是以無所愧怍, 而此氣自然發生於中. 非由只行一事偶合於義, 便可掩襲於外而得之也. 氣란 비록 道義와 짝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기르는 처음에는 오히려 일이 모두 의로움에 부합하고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항상 곧은 것을 말미암기에, 이 때문에 부끄러운 바가 없어서, 이 기가 자연히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단지 하나의 일을 행함에 우연히 의로움에 부합했다고 하여 곧바로 밖에서 엄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朱子曰 直只是無私曲 集義只是事事上皆直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便是浩然之氣 而今只將自家心體驗到那無私曲處 自然有此氣象 주자가 말하길, “直이란 그저 사사롭게 구부림이 없는 것이고, 集義란 그저 일마다 모두 올곧다는 것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숙여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곧바로 호연지기인 것이지만, 지금 그저 자기의 마음을 붙잡고 가서 저 私曲이 없는 곳까지 체험하게 된다면, 자연히 이러한 기상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以直養是自反而縮 集義是以直養 然此工夫須積漸 集義自然生此浩然之氣 不是行一二件合義底事能掩取浩然之氣也 集義是歲月積久之功 襲取是一朝一夕之事 從而掩取 終非己有也 올곧음으로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돌이켜서 올바르다는 것이고, 集義는 올곧음으로 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부는 반드시 점차 쌓아나가야 하는 것이니, 集義하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호연지기가 생성되는 것이지, 한두 건의 義에 부합하는 일을 행한다고 능히 호연지기를 갑자기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集義는 세월이 오래도록 쌓은 공이고, 襲取는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의 일을 따라서 갑자기 취하는 것이니, 끝내는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此上三句本是說氣 下兩句是字與非字對 襲字與生字對 其意蓋曰 此氣乃集義而自生於中 非行義而襲取之於外云爾 여기의 윗 3구절은 본래 氣를 말한 것인데, 아래 두 구절의 是자와 非자가 짝을 이루고, 襲자와 生자가 짝을 이룬다. 그 뜻은 대개 이 氣는 마침내 集義하여 자연히 그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의를 행하여 밖에서 갑자기 그것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운운했음을 말한 것이다.
生字正與取字對 生是自裏面生出 取是自外面取來 生자는 바로 取자와 짝을 이루니, 生은 안으로부터 생겨 나온다는 것이고, 取는 밖에서 취해 온다는 것이다.
義襲是於一事之義 勇而爲之 以壯吾氣 然無生底道理 只是些客氣耳 不久則消矣 義襲은 일 하나의 의로움에 대하여 용감하게 행함으로써 내 氣를 씩씩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가) 생겨날 리가 없다. 그저 약간의 객기일 따름이니, 오래지 않아 소멸될 것이다.
慊, 快也, 足也. 言所行一有不合於義, 而自反不直, 則不足於心而其體有所不充矣. 然則義豈在外哉? 慊은 유쾌하고 흡족하다는 말이다. 행한 것이 한번이라도 의로움에 부합하지 아니하고 또한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곧지 아니하면, 곧 마음에 흡족하지 않고 그 몸도 가득 차지 않음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義가 어찌하여 밖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朱子曰 孟子許多論氣 只在集義所生一句上 只是件件合義 無一事不求箇是 自然積得多 則胸中仰不愧俯不怍 纔有些子不合道理 心下便不足 주자가 말하길, “맹자가 氣를 논한 것은 많지만, 그저 集義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한 구절 위에 있을 따름이다. 그저 건건마다 義에 부합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옳음을 구하지 않음이 없다면, 자연히 많이 쌓일 수 있으니, 가슴속에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마음을 낮추는 것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集義則浩然之氣生 行有不合義而心不慊 則此氣餒 可見義在內非由外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集義하면 호연지기가 생겨나고, 행하는 것이 義에 부합하지 않아서 마음이 흡족하지 않으면, 이런 氣가 쪼그라들고 마는 것이니, 義가 안에 있는 것이지, 밖을 말미암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告子不知此理, 乃曰‘仁內義外’, 而不復以義爲事, 則必不能集義以生浩然之氣矣. 上文不得於言勿求於心, 卽外義之意, 詳見「告子」上篇. 고자는 이 이치를 알지 못하여, 도리어 仁은 안이고 義는 밖이라고 말하였고, 더 이상 義를 일로 삼지도 않았으니,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義를 축적하여 호연지기를 생겨나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윗글의 ‘말에서 얻을 수 없으면, 마음에서 구하질 말라’는 것은 곧 義는 밖에 있는 것으로 본다는 뜻인데, 자세한 것은 고자 상편에 보인다. 問配義與道 是氣助道義而行 又曰集義所生是氣 又自集義而生 朱子曰 初下工夫時 集義然後生浩然之氣 氣已養成 又却助他道義而行 누군가 묻기를, “義와 道에 짝한다는 것은 氣가 道義를 도와서 행해지게 한다고 하였는데, 또 말하길, 集義로 생겨나는 것이 氣이니, 또한 義를 모으는 것을 통하여 생겨난다고 하였습니다.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처음에 공부를 할 적에는, 義를 모은 연후에 호연지기가 생기는데, 氣가 이미 길러서 이루어지면, 또한 도리어 그 도의를 도와서 행해지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告子之病 蓋不知心之慊處 卽是義之所安 其不慊處 卽是不合於義 故直以義爲外而不求 고자의 병폐는 대체로 마음이 흡족한 부분이 곧 義가 편안해하는 바이고, 그 흡족하지 못한 부분이 곧바로 義에 부합하지 않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곧장 義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서 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告子直是將義屛除去 只就心上理會 因擧陸子靜云 讀書講求義理 正是告子義外工夫 某曰不然 如子靜不讀書 不求義理 只靜坐澄心 却是告子外義 고자는 곧장 의를 제거해버리고서, 그저 마음 위로 나아가 이해하려 하였다. 육자정이 말한 ‘독서하여 의리를 강구하는 것은 바로 고자의 義外공부다’라는 말을 거론하였기 때문에, 나는 말하길, “그렇지 않다. 육자정처럼 책을 읽지 않고 의리도 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깨끗이 할 뿐인 것은 도리어 고자의 外義(의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김)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先說氣配義與道 後說集義而不及道者 蓋道是體義是用 浩然之氣有體有用 其體配道其用配義 故曰配義與道 其體用一也 言用則體在其中 體上無做工夫處 故只說集義 쌍봉요씨가 말하길, “앞에서는 氣는 義와 道에 짝한다고 말하고서, 나중에는 義를 모은다고 말하였을 뿐 道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道는 體이고, 義는 用이기 때문이다. 호연지기는 體도 있고 用도 있으니, 그 體는 道와 짝하고, 그 用은 義와 짝하기 때문에, 義와 道에 짝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 體와 用은 하나이므로, 用을 말하면 體는 그 안에 있는 것이다. 體 위에는 공부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그저 義를 모은다고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二餒字之分 無是餒也 是無氣則道義餒 行有不慊則餒 是無道義則氣餒 所指不同 蓋二者相資 論其用 則道義非氣無以行 論其體 則氣非道義無以生 2개의 餒자를 구분함에 있어, 無是餒也(이것이 없으면 쪼그라든다)는 기가 없으면 도의가 쪼그라든다는 것이고, 行有不慊則餒(행함에 흡족하지 않음이 있으면 쪼그라든다)는 도의가 없으면 기가 쪼그라든다는 것이니, 가리키는 바가 같지 않은 것이다. 대체로 2가지는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 그 用을 논하자면, 도의는 기가 아니면 행해질 수가 없는 것이고, 그 體를 논하자면, 기는 도의가 아니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二是字亦不同 無是餒也 此是字指浩然之氣 言是集義所生 此是字 正與下句非字相呼喚 猶言是如此非如彼耳 신안진씨가 말하길, “2개의 是자도 역시 같지 않다. 無是餒也 여기서의 是자는 호연지기를 가리키는 것이고, 是集義所生이라 말했는데, 여기서의 是자는 바로 아래 구절의 非자와 더불어 서로 호응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이지 저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義 卽是以直養 義襲而取之 卽是有所作爲以害之 集註訓慊字 與大學音義同 自慊則心廣體胖 不慊則餒 餒字正與廣字胖字相反 集註訓以直養 則曰自反而縮 此則言自反常直 自反不直 見得孟子養氣之論正自夫子所謂自反而縮來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集義는 곧 올곧음으로써 기름이고, 義襲而取之는 곧 작위함으로써 그것을 해침이 있다는 것이다. 집주에서 慊자를 뜻풀이한 것은 대학과 더불어 음과 뜻이 같다. 스스로 흡족하면 마음이 넓고 몸은 편안함이고, 흡족하지 못하면 쪼그라드는 것이니, 餒자는 바로 廣자나 胖자와 상반된다. 집주에서 以直養을 뜻풀이한 것은 自反而縮이라 말했지만, 여기에서는 곧 自反常直이라거나 自反不直이라고 말했으니, 맹자의 養氣之論은 바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自反而縮으로부터 말미암아 온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6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알)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에 힘쓰되 미리 기대하지도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며, 조장하지도 말아서 송나라 사람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 송나라 사람이 그 벼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뽑아올려 놓은 자가 있었다. 그는 피곤하여 집에 돌아와서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피곤하다. 내가 벼 싹이 자라나게 도왔으니.’라고 하거늘 그 아들이 달려가서 보았더니 벼 싹이 말라 죽었다. 천하에 벼 싹이 나라도록 돕지 않는 자가 적으니 유익하지 않다고 버려두는 자는 벼 싹을 김매지 않는 자요, 억지로 자라게 도우는 자는 벼 싹을 뽑아놓는 자이니, 이는 한갓 무익할 뿐 아니라 또한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長, 上聲.
○ 必有事焉而勿正, 趙氏, 程子以七字爲句. 近世或幷下文心字讀之者亦通. 必有事焉, 有所事也, 如有事於顓臾之有事. ‘필유사언이물정’은 조씨와 정자는 7글자를 한 구절로 삼았다. 근세에 어떤 사람은 아래 글의 心자와 나란히 읽기도 하나 이 역시 뜻이 통한다. ‘必有事焉’이란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전유에 일이 있다는 것과 같이 일이 있다는 것이다.
問必有事焉當用敬否 程子曰 敬只是涵養一事 必有事焉須當集義 只知用敬不知集義 却是都無事也 又問義莫是中理否 曰 中理在事 義在心內 苟不主義 浩然之氣從何而生 누군가 묻기를,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마땅히 敬을 써야 하겠지요?”라고 물었다. 정자가 말하길, “敬이란 그저 함양한다는 한 가지 일일 뿐이니, 반드시 일삼는 바가 있어야 함에는 모름지기 集義를 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저 敬을 쓸 줄만 알고 集義할 줄 모른다면, 도리어 전부 일삼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義란 이치에 들어맞는 것이 아닐런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치에 들어맞는 것은 일에 있고, 義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 만약 義에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면, 호연지기는 무엇을 따라서 생겨나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集義是養氣之丹頭 必有事是集義之火法 必有事焉 言養氣者必以集義爲事 須要把做事去做 如主敬也須把做事去主 如求放心也須把做事去求 주자가 말하길, “集義는 養氣의 丹頭이고, 必有事는 集義의 火法이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氣를 기르는 자는 반드시 集義를 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니, 모름지기 꼭 붙잡고 일로 삼아서 가서 해야 한다. 예컨대 主敬에 있어서도, 모름지기 꼭 붙잡고 일로 삼아서 가서 하는 것이나, 잃어버린 마음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반드시 꼭 붙잡고 일로 삼아서 가서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正, 預期也. 「春秋傳」曰: “戰不正勝”, 是也. 正이란 豫期다. 춘추전에 이르길, 싸움에 있어 승리를 미리 기약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런 것이다.
公羊傳 僖公二十六年夏 齊人伐我北鄙 公子遂如楚乞師 乞者何卑辭也 曷爲以外內同 若辭重師也 曷爲重師 師出不正反 戰不正勝也 不正者不期也 反復也 勝捷也 춘추 공양전에 의하면, 노나라 희공 26년 여름에, 제나라 사람들이 우리 노나라의 북비를 쳤다. 공자 수가 초나라에 가서 군사를 구걸하였다. 구걸이란 무엇인가? 비굴한 말이다. 어찌하여 내외를 동등하게 여겼단 말인가? 만약 말이 군사를 중하게 여겼다면, 어째서 군사를 중하게 여기는가? 군사가 출정하면 돌아오기를 기약할 수 없고, 전쟁을 하면 이기는 것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不正이라는 것은 기약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反이란 돌아오는 것이고, 勝이란 이긴다는 것이다.
如作正心義亦同. 此與『大學』之所謂正心者, 語意自不同也. 此言養氣者, 必以集義爲事, 而勿預期其效. 其或未充, 則但當勿忘其所有事, 而不可作爲以助其長, 乃集義養氣之節度也. 閔, 憂也. 揠, 拔也. 芒芒, 無知之貌. 其人, 家人也. 病, 疲倦也. 舍之不耘者, 忘其所有事. 揠而助之長者, 正之不得, 而妄有作爲者也. 然不耘則失養而已, 揠則反以害之. 無是二者, 則氣得其養而無所害矣. 만약 ‘正心’이라고 써도 뜻은 똑 같다. 이것은 대학의 이른바 정심(正心: 마음을 바르게 함)이란 것과 말의 뜻은 저절로 다른 것이다. 이는 기를 기른다는 것은 반드시 의를 모으는 것을 일삼아야 하되 그 효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고, 그것이 혹시 충분하지 아니하면, 그저 마땅히 그가 일삼음이 있는 바를 잊지 말되, 어떤 작위로써 그 성장을 도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의를 모아서 氣를 기르는 절도인 것이다. 閔은 근심한다는 말이고, 揠(알)은 뽑는다는 말이다. 망망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이다. 그 사람은 가족을 말한다. 병이란 피곤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버려두고 김매지 않는 사람은 그가 일삼음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뽑아서 자라기를 돕는 사람은 미리 기대하였다가 얻지 못하자 망령되이 어떤 작위를 하는 자이다. 그러나 김매지 않으면 기름을 잃을 뿐이지만, 뽑아버리면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이 둘이 없어야만 기가 그 기름을 얻고 해를 입는 것도 없게 된다.
朱子曰 勿正勿待也 勿忘勿忘以集義爲事也 助長待之不至而拔之使長也 正者等待期望之意 如一邊集義 一邊在此等待那氣生等來等去 却便去助長 氣未至於浩然 便作起令張王 謂已剛毅無所屈撓 便要發揮去做事 便是助長 必有事焉勿忘是論集義工夫 勿正勿助長 是論氣之本體上添一件物事不得 不要等待 不要催促 주자가 말하길, “勿正은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고, 勿忘은 集義를 일로 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助長은 기다려도 이르지 않자, 뽑아서 크게 한다는 것이다. 正이라는 것은 기다리고 기대하며 바란다는 뜻이니, 마치 한편으로 集義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기에서 저 氣가 생겨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도리어 곧바로 가서 조장을 하는데, 氣가 아직 호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곧 일어나서 펼쳐져서 왕성하게 만들고는, 이미 굳세어서 굽히고 동요하는 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곧바로 기를 발휘하여 가서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조장이라는 것이다. 必有事焉과 勿忘은 集義공부를 논한 것이고, 勿正과 勿助長은 氣의 본체 위에 어느 하나의 사물이라도 첨가할 수가 없으니, 기다리지도 말고, 재촉하지도 말라는 것을 논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論集義所生 則義爲主 論配義與道 則氣爲主 一向都欲以義爲主 故失之 集義하여 (氣가) 생기는 바를 논하면, 義가 주인이 되고, (氣가) 義와 道에 짝하는 것을 논하면, 氣가 주인이 되니, 줄곧 항상 義를 주인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다.
人能集義以養其浩然之氣 故事物之來自有以應之 不可萌一期待之心 少間待之不得 則必出於私意 有所作爲而逆其天理矣 是助之長也 今人之於物 苟施種植之功 至於日至之時 則自然成熟 若方種而待其必長 不長則從而拔之 其逆天害物也 甚矣 사람은 능히 集義함으로써 그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와도 저절로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기대하는 마음이 한 번이라도 싹터서는 안 되니, 조금이라도 기다릴 수 없다면, 반드시 사사로운 뜻에서 나와 작위하는 바가 있어서 그 천리를 거스를 것인데, 이것이 바로 조장이다. 지금 사람들이 사물에 대하여 만약 씨뿌리고 심는 공을 펼쳐서 하지의 때에 이른다면, 자연히 무르익을 것이다. 만약 이제 막 씨를 뿌렸으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자랄 것을 기대하고, 자라지 않으면 그에 따라 뽑아준다면, 그것이 천리를 거스르고 사물을 해치는 것이 심한 것이다.
養氣一章在不動心 不動心在勇 勇在氣 氣在集義 勿忘勿助長 又是那集義底節度 若告子則硬不理會言之得失事之是非氣之有平有不平 只是硬制壓那心便不動 恰如說打硬修行一般 養氣 1장은 부동심에 있고, 부동심은 용기에 있으며, 용기는 氣에 있고, 氣는 集義에 있으며, 勿忘과 勿助長은 다시 저 集義의 節度다. 가령 고자의 경우라면, 말의 득실이나 일의 시비나 기에 평온함도 있고 평온하지 않음도 있다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서, 그저 저 마음을 억지로 제압하여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니, 마침 오로지 힘써서 수행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此氣是稟得天地底來 是集義方生 曰 本自浩然 被人自少時壞了 今當集義方能生 曰 有人不知集義合下便恁地剛勇 是如何 曰 此只是麤氣 便是黝舍之勇 亦終有餒時 此章須從頭節節看來看去 首尾貫通 見得活方是 不可只略涉獵說得去便了 누군가 묻기를, “이 氣는 천지에서 품부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集義하여 비로소 생긴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본래는 저절로 호연한 것인데, 사람이 어릴 때부터 무너뜨리므로, 지금은 마땅히 集義해야만 바야흐로 생길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어떤 사람은 集義할 줄 몰라도 원래부터 곧 저렇게 굳세고 용감한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그저 거친 氣일 따름이니, 곧 북궁유와 맹시사의 용기로서, 또한 끝내 쪼그라들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장은 모름지기 처음부터 節節마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서, 수미가 관통해야 하고, 융통성 있게 보아야만, 바야흐로 옳은 것이지, 그저 대략 섭렵하여 말하고서 곧바로 그만두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勿助長者 徒其自充 不可强使之充也 此爲循天理之當然 而不以人爲加之 然欲不忘 則近於助長 欲不助長 則或忘之 二者之間 守之爲難 學者多知忘之爲害 不知助長之爲害尤甚 故引揠苗爲喩 閔苗之不長 猶憂氣之未充也 揠以助長 猶作其氣而使之充也 或曰 二程多以必有事焉爲有事乎敬 而孟子則主於集義 有異乎 曰 無以異也 孟子所謂持志 則敬之道也 非持其志 其能以集義乎 敬義蓋相須而成者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그저 그것 스스로 채울 뿐 억지로 채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리의 당연함을 따르는 것이 되므로 인위적인 것으로 보태지 않는다. 그러나 잊지 않고자 하면, 조장에 가까워지고, 조장하지 않고자 하면, 혹여 그것을 잊게 되기도 한다. 두 가지 사이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니, 배우는 자들은 대부분 잊는 것이 해가 되는 것을 알 뿐, 조장하는 것이 해가 됨이 더욱 심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벼이삭을 뽑은 것을 인용하여 비유로 삼은 것인데, 벼이삭이 자라지 않음을 걱정하는 것은 氣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같고, 뽑아서 자라도록 돕는 것은 그 氣를 만들어서 채워지게 만드는 것과 같다. 혹자가 말하길, ‘두 정자 선생께서는 必有事焉을 敬에 일삼음이 있다는 것으로 여긴 경우가 많았지만, 맹자는 집의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달리 볼 것이 있는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달리 볼 것이 없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소위 持志란 敬의 道인 것이다. 그 志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로써 능히 集義할 수 있겠는가? 敬과 義는 대체로 서로 필요하고 서로를 이루어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有事勿忘是說以直養 勿正勿助長是說養而無害 必有事焉而勿忘勿助長是集義工夫 正而助長是要義襲而取 集義義襲兩句乃是一段骨子 以集義爲無益而忘之者 不耕苗者也 以義襲爲心預期其效而助長者 揠苗者也 惟其是集義所生者 故當必有事焉 心勿忘 惟其非義襲而取之 故當勿正勿助長 以直養而無害 是養之之正道 集義所生 是養之之成功 有事勿忘是做工夫處 쌍봉요씨가 말하길, “일삼음이 있고 잊지 말라는 것은 올곧음으로 기름을 말한 것이고, 기약하지 말고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길러주되 해침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반드시 일삼음이 있되 잊지 말고 조장하지 말라는 것은 集義하는 공부이고, 기대하고 조장하는 것은 의를 엄습하여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集義와 義襲 두 구절은 마침내 일단의 골자인 것이다. 집의를 무익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벼이삭에 김을 매지 않는 사람이다. 義襲을 마음으로 삼아 미리 그 효과를 기약하면서 조장하는 자는 벼이삭을 뽑아버리는 사람이다. 오직 그것은 集義를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하고, 마음으로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그것은 義襲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미리 기약하지 말고 조장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곧음으로써 기르되 해침이 없는 것은 그것을 기르는 올바른 도이고, 集義해서 생겨나는 것은 그것을 기름이 성공했다는 것이며, 일삼음이 있고 잊지 말라는 것은 공부를 하는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前說持志無暴氣是兩事 後說養氣不及持志 言集義 則持志在其中 今日集義明日又集義 則此志全在義上 有事勿忘念念在集義上 忘便是不能持其志 助長便是暴其氣 앞에서 말한 持志와 無暴氣는 별개의 두 가지 일이고, 뒤에서는 養氣를 말하면서 持志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集義를 말하면, 持志는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집의를 하고 내일 또 집의를 한다면, 이 志는 온전히 義 위에 있는 것이고, 일삼음이 있으면서 잊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생각이 전부 집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잊어버린다면 곧 자기의 志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고, 조장한다면 곧바로 그 氣를 사납게 하는 것이다.
問天下之不助苗長者 寡矣 其意何謂 曰 此是說天下之人 平時不能養其氣者 皆是臨時助長以暴其氣也 似浩然却不是自家集義所生底 故乍長乍消 易盈易縮 適足以戕賊其氣而已 不特養氣不可助長 凡事皆不可助長 如看書未通不能潛心玩索以强探力索之類 皆是助長 누군가 묻기를, “천하에 벼이삭을 조장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천하의 사람들 중에서 평시에 자기의 기를 기르지 못한 자들은 모두 어떤 때에 임하여 조장함으로써 그 기를 사납게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록 마치 호연한 것 같지만, 도리어 스스로 集義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깐 자랐다가 잠깐사이에 소멸되고, 쉽게 가득 찼다가 쉽게 줄어들고 마니, 마침 그 기를 해치기에 족할 따름이다. 단지 養氣에 있어서 조장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도 전부 조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예컨대 책을 보다가 통하지 않으면, 마음을 침잠하여 깊게 사색함으로써 억지로 힘써서 탐색하는 부류와 같은 것이니, 이것들 모두 조장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必有事焉 是念念必合乎義 而無一念之不義也 事事必合乎義 而無一事之不義也 謂之有事 是集義之外無他事 謂之必有事 是此事之外無他念也 但必於此者 每有所期於彼 必而勿正 則先事後得 集義之心 始無間斷 期之不得者 又易忘其所有事 勿正而不忘 則集義之心 愈無間斷 正忘助三者相因 皆是爲害 助之害愈甚 大抵必有事 是集義 是以直養 正忘助 是義襲 是害 所以孟子始曰無害 終曰害之 孟子論養氣工夫 是一正一反 集註亦是一正一反 論以直養 正說曰 自反常直 反說曰 自反不直 論害之 正說曰 不可作爲以助其長 又反說曰 正之不得而妄有作爲 前後相應 學者當字字體認 운봉호씨가 말하길, “반드시 여기(焉)에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생각하는 것마다 반드시 義에 합치되어서 생각 하나라도 의롭지 않은 것이 없고, 사사건건 반드시 義에 합치되어서 일 하나라도 의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일컬어 일삼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集義하는 외에 다른 일이 없다는 것이고, 일컬어 반드시 일삼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일 이외에 다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에 기필하는 자는 매번 저것에 기대하는 바가 있으니, 기필하되 기대하지 않아야만, 일을 먼저하고 나중에 얻을 수 있고, 集義하는 마음이 비로소 중간에 끊어짐이 없는 것이다. 기대하였다가 얻지 못한 사람은 또한 그가 일삼을 바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미리 기대하지 말고 또한 잊지도 않는다면, 集義하는 마음은 더욱 중간에 끊어짐이 없게 될 것이다. 미리 기대하고, 잊고, 조장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서로 원인이 되어주는데, 이 모두가 해침이 되지만, 조장하는 해로움은 더욱 심하다. 대저 必有事는 集義이자 以直養이고, 正忘助는 義襲이자, 해침이다. 그래서 맹자는 처음에 해침이 없게 하라고 말했고, 나중에는 그것을 해친다고 말했던 것이다. 맹자가 養氣의 공부를 논한 것은 一正一反(하나는 정면으로 하나는 반면으로 말함)이고, 집주도 역시 一正一反이다. 以直養을 논하면서도, 정면으로 말하길, ‘自反常直(스스로 돌이켜 항상 올곧다)’이라 말했고, 반면으로 말하길, ‘自反不直(스스로 돌이켜 곧지 않다)’이라 말했다. 해친다는 것을 논하면서도, 정면으로 말하길, ‘작위로써 그것이 자라도록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또한 반면으로 말하길, ‘기대하다가 얻지 못하면 함부로 작위함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후가 상응하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글자마다 체득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如告子不能集義, 而欲强制其心, 則必不能免於正助之病. 其於所謂浩然者, 蓋不惟不善養, 而又反害之矣. 고자처럼 의를 모으지 못하고 억지로 그 마음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미리 기약하고 조장하는 병폐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자는 이른바 호연이란 것에 대하여, 대체로 단지 잘 기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거꾸로 그것을 해쳤던 것이다.
慶源輔氏曰 集義而不忘其所事 則氣得其養 勿正而不妄作爲 則氣無所害 如此則日引月長 而充塞天地之體 沛然流行之用 將不期然而然矣 又曰 所謂揠而反害之者 正指告子而言 경원보씨가 말하길, “집의하되 그가 일삼을 바를 잊지 않는다면, 氣는 그 길러줌을 얻을 것이고, 기대하지 말고서 함부로 작위하지 않는다면, 氣는 해쳐지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날로 이끌리고 다달이 자라나서, 천지에 가득찬 體와 도도히 유행하는 用은 장차 그렇게 되길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이른바 벼이삭을 뽑아서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자란 바로 고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