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고 말 영화는 아니다' 싶다. 명작이나 빼어난 작품이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넷플릭스에 지난 1일 올라온 인도네시아 스릴러 영화 '안개에는 국경이 없다'(Kabut Berduri 영어 제목 Borderless Fog)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반면, 집중력을 흩뜨리며 지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태국 공포영화 '량종'과 비슷한 분위기라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시종 어두운 톤, 캐릭터 동기와 도덕적으로 불분명한 구분 등이 덴마크 형사물 '킬링'이나 '브리지'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대체로 여주인공을 연기한 인도네시아의 유명 배우 푸트리 마리노의 개인기에 두고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세 나라가 다스리는 보르네오(인도네시아어로 깔리만탄) 섬이 배경이다. 1964~66년 인도네시아 군인과 자원병, 말레이시아 공산 게릴라 등이 숨어 들어가 영국군과 전투를 벌인곳이다. 밀림으로 악명 높은 곳인데 자카르타에서 온 도회지 여형사 산자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얼개인데 여형사의 시크한 매력이 장난 아니다. 식민 지배국 출신의 피가 섞인 듯한 외모도 인상적이었다. 1993년생으로 로레알 화장품 모델 사진로도 유명하다. 넷플릭스 '시가렛 걸', '빅 4', '원 나이트 스탠드'에도 나왔다는데 챙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드윈 감독이 연출했는데 '사랑과 복수', '연애진미', '이방인들: 디지털삼인삼색 2013'이 필모그라피로 검색된다. 언어의 장벽이 있어 한계가 있지만 상당히 힘 있고 개성 뚜렷한 연출 선을 보여준다 싶었다.
듣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배경 음악도 들을 만했다. 수십m 높이 치솟은 나무 위에 섬뜩한 가지 모양과 어울린다. 깔린 음악을 듣기 위해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 으스스함은 정작 시신 목이 뎅강 잘려나가 길바닥을 또르르 굴러가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것들을 별 것 아니게 만들었다. 그저 분위기로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연출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미신 속의 악령 암봉 얘기를 비롯해 영화 줄거리는 잘 모르겠다. 한 번 봐서 이해가 잘 안되는 데다 이 지역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자꾸 화면을 정지시키고 검색을 통해 여러 정보를 습득하며 봐야 하는 영화다. 그래서 한 번만 보고 '질렸어' 하는 사람과 '다시 한 번'을 되뇌이는 사람으로 나뉠 것 같다.
머리와 몸이 따로인 시신이 발견되며 영화는 시작한다. 경위 산자 아루니카(푸트리 마리노)는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이 오지 중의 오지 수사로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 같다. 현지 경찰 토마스(요가 프라타마)가 그녀를 돕는다.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인 시신이라니, 이 섬의 정체성 혼란을 상징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8명 정도가 죽어나가는데 야자 농장의 악덕 사업주, 말레이시아 조직폭력배, 인신매매에 얽힌 인물들, 부패한 경찰 등이다. 한 마디로 죽어도 싼 이들이다. 이들을 응징한 인물은 맨마지막 주검으로 발견된다.
연쇄 살인이 씨줄이라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국경을 마주하는 사라왓 지역과 두 나라의 갈등 또는 관할권 떠넘기기, 다약족이 당하기만 해서 숨겨야만 하는 사정, 공산주의 게릴라와의 내전, 야자 농장의 열악함, 자녀를 인신매매에 넘겨야 하는 막막함 등이 날줄로 교직된다.
산자와 연쇄 살인 끝에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부장(유디 아흐마디 타주딘)의 교류, 산자와 토마스의 야릇한 교류 등도 교차한다. 산자만 빼고 모두 죽는다. 알고 보니 산자도 늘 우연치 않게 소녀를 치여 죽게 만든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부장이 그런다. "다 갚는 방법이 있게 마련"이라고.
그런데 그는 산자가 떠날 시점에 호숫가에서 잘려나간 얼굴로만 발견된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을 보여준 것인데 많이 의아하다. 일부는 스스로 극단을 선택한 것이라 하고, 일부는 숲속에 암봉처럼 숨어 지내다 안개 속에 스며 들어온 공산 반군이라고 해석한다. 난 개인적으로 둘 다 섞인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맑은 개울에 들어가 피묻은 군화를 씻겨내는 어린 소년의 뒷모습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1972년, 부장의 어린 시절이란 얘기인 듯한데 어항 속에 홀로 갇혀 한사코 돌기만 하는 물고기와 연결지으려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조금 생뚱 맞았다.
목이 잘려나간 토마스 시신을 마주한 산자가 소리 없이 오열하는 장면 연출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와 그렇게까지 애틋했나 싶은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도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며 오열하는 모습은 압도했다.
앞에서 얘기했듯 이 영화, 한 번 보고 말 영화가 아니다. 두 번, 세 번 보면 다르게 다가올 작품이다. 그런데 하, 지금은 아니다. 숨 좀 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