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148-1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을 배향한 근암서원近嵓書院이 근자에 복원되다
근암서원
역사의 현장을 다녀보면 당시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못내 아쉬울 때가있다
현장감이 부족해서다. 어느 정도 사진술이 발달되어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화목한 우정의 대명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어른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면, 제1감으로 ‘한일 자동펌프’를 선전하는 가수 ‘서수남과 하청일’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비록 나 혼자 뿐일까. 서로의 감정에 다정한 운율이 닿는 듯하여서 하는 말이다.
임진왜란 발발당시(1592)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도승지였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벼슬이 대사헌이었다.
그 후, 두 분 다 영의정까지 지낸 분들이다. 오성대감은 시종일관 당쟁에 대해 초연한 입지를 취했으나, 기록에
의하면 한음대감은 정파적으로 동인東人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들 역시 당파싸움의 가속도에는 속절없이 밀렸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일본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 임금은 선조와 고종이지 않나싶다
맹랑한 이웃나라 일본...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 어디 불타지 않은 사찰이 있던가. 가는 사찰마다 연혁엔 ‘임란시소실’이란 문구는
아예 문패가 되다시피 한 약방감초다.
가속도는 무섭다
<반대를 위한 반대>...같은 단어가 중복되어서 그런지 후자의 반대는 가속도를 뿜는다.
한 구덩이 몰살이란 비극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공멸의 핵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망국을 부른 처절한 사례가 임진왜란 직전에 우리나라에 있었다.
얼마나 전란의 물꼬가 열려있었으면... 십만양병설 등,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염탐꾼을 보내야 할 상황이었을까.
일본판 대하소설 대망大望만 훑어보아도 당시 일본열도는 전운이 하늘을 찔렀다.
거리에 넘쳐나는 사무라이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가 논공행상을 위해 땅이 부족하다는 여론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침략설이 끊이지 않아
조정에서는 통신사通信士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에 파견하여 살피게 하였다.
하필이면 왜 당파를 달리하는 사람을 보냈을까. 알다시피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토는 그만
7년간이나 산중과일이 되고 말았다.
당시 조정은
망국을 코앞에 두고도 동인 서인이 서로 모해추방 살육이 그치지 않았으며, 임란 한 해전인 1591년에는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쫒겨나고 동인이 집권한 시절이었다. 동인도 서인의 논죄문제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는 등
<반대병환자>들은 치열한 당쟁 속에서 기강은 문란할 때로 문란해져 일본의 침략설 등은 완전뒷전이었다.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두 분 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한, 촉망받던 명신들이었다. 통신정사通信正使 황윤길(당시 서인西人)은 반드시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 조정에 보고 하였으나. 부사副使 김성일(당시 동인東人)은 그와 상반된 의견을 내 놓았다.
자, 여기가 껄끄러운 장면이다
김성일이 허위보고를 했을 리 없다. 김성일이 이런 중요한 국사를 과연 혼자 결정할 수 있었을까.
당론을 거치지 않고 일본의 현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수 있었을까. 선조의 등골에 뼈아픈 일침을 가한...야밤중에
조작된 당론주동자는 과연 누구누구였을까.
문치文治는 무사안일을 좋아한다.
문치군주 선조는 동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론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무책임한 나으리들...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노림수에 조정이 먹혀들고 말았다
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대노하여 김성일의 처벌을 명하였으나 당시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의 변호로 용서되었다하니
이 또한 어이없는 한 장면이다.
그 후 통신부사 김성일은 속죄의 길을 걸었다
전란에 대한 방어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김성일 그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의 통렬한 희생양이 된 그는 당론의 뒤안길에서 홀로 신음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의 도움을 받은 것만 보아도 그의 인품을 알만하다. 손수 격문을 돌리며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직하였다하니... 그의 단호한 속죄의 길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이 간다.
진주성성루에 누워 숨을 거두며
사색당파가 망친 <반대병환자>의 마지막 표정을 땅에 구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圓柱
근암서원近嵒書院...글자뜻 그대로
거암巨巖이 굴러도 그 가속도를 잠재울 듯 위풍당당하다
첫댓글 ‘임란시소실’ 이란 문구는ㅡ 경복궁 소실에서 부터 ㅡ아예 문패가 되다시피 한 약방감초ㅡㅡㅡ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살아남지는 않았을 거고
잊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