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증 맡겨놓고 술마시던 靑春의 향수, 학사주점 대학생이 특권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골 동네에서 뉘 집 아들이고 딸이고 대학에 합격을 하면 마을 입구에 현수막을 걸어 널리 알리고 합격생의 집에서는 동네잔치를 벌이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많이 배운 사람 축에 드니까 대학 입학은, 말하자면 많이 배울 사람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합격자 이름을 대문짝만 하게 써놓고 그 앞에 무슨 무슨 마을의 신동이라느니 천재라느니 하는 얼핏 보기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수식어를 아무렇지 않게 갖다 붙였다.
실은 그런 법석은 언제 어떻게 통제 불능에 빠질지 모르는 열여덟아홉 청춘에게 붙여놓는 부적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재산 목록 1호인 외양간의 누렁이를 팔거나 밭뙈기를 떼어서라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는 각오가 현수막으로 내걸린 것이며 온 마을 사람을 다 불러 잔치를 하는 이유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 마을의 누군가가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마을의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이 크면 클수록, 바꿔 말하자면, 보다 좋은 대학에 입학할수록 잔치 규모나 축하객 규모가 커졌으며 마을 사람들이 합격생의 장래에 거는 기대도 함께 커졌다.
그것은 입학 당사자한테는 엄청난 사회적 압력이었다. 대학생이 쓰는 모자가 머리를 조여오는 압박감은 월계관의 그것이었으며 대학 배지가 주는 중량감은 집에서 정들여 키우던 누렁이가 소시장에서 달게 될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런 염원을 어깨에 지고 올라와 대학생이 된 많은 사람 중에 물론 큰 인물이 되어 금의환향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1970년대 후반만 해도 쏟아지는 대학생들을 죄다 받아줄 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런 사면초가의 입장에 선 대학생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시름은 쌓여갔다.
상인들은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고향을 떠나올 때 보았던 마을의 현수막과 굳게 닫힌 회사 철문 사이에 틈새시장이 있는 걸 눈치 챘다. '학사주점'.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라고밖에는 해석할 길 없는 이 상술은 거의 모든 대학교 앞에 분위기나 주 고객층이 비슷비슷한 술집들을 생겨나게 했다.
그런 주점의 고객은 바로 인접한 대학교의 학생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집이 여느 술집과 다른 점은 우선 거래로 통용되는 게 화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술값 외상이야 어디든 있었지만 학사주점에서는 시계, 라이터, 학생증, 체육복, 가운, 계산기, 제도용 T자 등 학생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면 거의 모든 게 화폐로서 기능을 했다. 얼핏 보면 지불을 유예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수막으로 내걸었던 고향집의 각오를 담보물로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사주점의 주인 또한 가족들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폐 대용품을 맡기고 술에 취한 청춘들은 번연히 마감 시각이 지난 걸 알면서도 술을 더 내놓으라고 문을 발로 차댔으며 술집 바닥에 쓰러져 동이 트도록 자기가 일쑤였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학생이 희망이었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대학생은 국가의 장래고 희망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소도(蘇塗)였던 학사주점이 사라져 간다. 그 자리에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주민들의 놀이터가 돼버렸다. 담장이 없어진 캠퍼스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이제 합격 축하 현수막은 학원 광고로밖에 쓰이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서둘러 희망을 놓아버린 건 아닌지….
출처 : 조선일보 201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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