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중의 손님
연일 영하 20도 - 30도의 맹추위가 계속되었다. 캐나다 횡단 1번 하이웨이가 빙판으로 변해 한 밤중에는 대형 트럭 이외에는 차량 왕래가 끊어진다. 이런 날 말 동무 삼아 히치하이커 ( Hitch-hiker ) 를 동승시키고 캐나다 대륙을 횡단하던 대형 트럭이 고장이라도 나는 날에는 이 히치하이커가 갈 곳을 잃게 된다.
돈도 다 떨어진 이들 ( 원래 돈이 없어 대형트럭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이다 ) 에게 교회는 먹을것과 숙소를 제공해 주는 착한 사마리아인 역할을 톡톡히 한다. 후에 이들 히치하이커에게서 들은 바로는 자기들은 이 캐나다 내에서는 절대로 배를 골치 않고 여행을 할 자신이 있단다.
여행중 돈이 떨어져 굶을 지경에 이르면 가까운 교회나 경찰서에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하면 100프로 먹을 것을 사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준다고 했다. 그런 비용을 예비해 두었는지 아니면 그런 정도의 융통성을 담당자에게 부여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한 겨울 어느날 밤. 12시가 지난 시점에 빈방이 몇개 남아있었지만 그것으로 그 날의 업무를 끝내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사무실 문에 설치한 벨에서 소리가 울렸다. 상당히 번거로운 상황이었으나 방이 필요한 손님이 우리를 깨운것이 틀림없었다. 사무실 문을 여니 방금 승용차에서 내린듯한 웬 초라해 뵈는 한 젊은이와 점잖은 신사 한 분이 사무실로 들어 섰다.
그 젊은이가 체크인 카드를 작성하는 동안 그 신사분은 자신은 바로 윗 동네 퍼스트 침례교회 ( First Baptist Church ) 의 목사인데 이 젊은이가 교회를 찾아와 오늘밤 잠자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렇게 같이 왔다고 했다.
그리고 청구서를 그 교회로 보내줄 수 있느냐고 해서 두말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고맙다며 돌아가고 젊은이만 남아 사무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즉, 자기가 타고오던 트럭이 수시간 전에 고장이 나서 트럭은 대형 트럭 전용 파킹장 ( 간단한 정비를 할 수 있는 정비소와 기사 숙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 으로 들어 갔고 자신은 무작정 눈에 띄는 근처 교회로 들어가서 목사님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목사님은 그를 목사관으로 들여 손수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한참을 그곳에서 이야기하다 마침내 이곳으로 안내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할뻔 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웃으며 경찰서를 찾아가면 된다고 하며 순진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은 앨버타 주의 포트 맥머리 (Fort McMurray: 캐나다 최대의 석유 생산지) 에서 일용노동자로 일 해왔는데 최근 유가 폭락으로 그곳의 경기가 뚝 떨어지는 바람에 실업을 했고 지난달까지 실업급여로 생활하며 스키를 좋아해 얼마 전까지 밴프 스키장을 전전하다 마침내 돈도 다 떨어지고 그래서 일자리가 많은 토론토로 가기위해 히치하이킹을 하는중 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이런 대책없는 젊은이를 봤나? “ 했지만 그런 내색은 감추고 내일 그 트럭이 수리를 마치지 못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하자 그는 다른 트럭들도 많다고 천하태평이다.
캐나다 대륙횡단 대형트럭 기사들은 거의 모두 외로움과 단조로움으로 고통을 받으며 그래서 그들은 자기 같은 히치하이커를 반길뿐 아니라 밥도 사주고 어떤 경우에는 숙소를 같이 쓰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기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부인을 대동하고 대륙횡단을 하기도 한단다.
그 날은 너무 늦어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는데 하여튼 캐나다는 참 부유한 나라라서 저런 청년들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이민 오기를 잘 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트럭기사는 말 동무가 생겨 좋고 히치하이킹을 하는 젊은이들은 돈이 없어도 캐나다 전국을 여행하며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이건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었다. 과거 히치하이킹은 히피들이나 하는 일종의 구걸행위로만 알았던 나의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옆집에서 사온 도넛과 사무실 커피로 요기를 한 후 그 젊은이를 트럭 파킹장으로 데려 갔고 그곳에서 어제 젊은이와 함께했던 트럭 기사를 만났다. 그 기사는 젊은이를 보고 기뻐하며 마침 트럭 정비도 끝나 출발 하려고 너를 찾고 있는 중 이라며 친동생을 만난듯 반가워 하는데 그 광경이 너무 보기 좋았다. 나를 보고도 아주 반가워 하며 손을 잡고 흔드는데 그 손이 무쇠 솥뚜껑 같았다.
두 사람에게 잘 가라고 인사 ( Bon Voyage ) 를 하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나 아니 아무 때나 우리 모텔에 들리면 그 날은 공짜로 재워 주겠다고 하고 그들과 헤어질 때 다시 악수를 하였는데 공짜 모텔방 제공에 감동을 먹었는지 그 기사가 나의 손을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이 한참동안 얼얼했다.
첫댓글 - 글자 크기가 너무 커졌습니다. 아무리 작게 하려고 해도 안돼 그냥 올립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바랍니다.
캐나다 학생들은 고교나 대학 졸업 후 세계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돌아 와 진학이나 직장을 골라 가는 사례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 문화 속에 살 아 온 사랔들이라 여행자들에게도 관대하지 싶네요.
한국에서도 60년대 중반쯤 청년들의 무전여행이 잠시 유행을 했었죠.
그때 다녀 온 형님들 무용담에 부러워 제인생의 상당 부분도 떠돌이 성향이 된 듯...ㅎㅎㅎ
- 저도 김찬삼씨의 세계무전여행기에 흠뻑 빠져 그 분의 강연회에도 따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 나중에 그게 무전여행이 아니고 돈이 무지하게 든 여행 ( 그 당시 기준으로 ) 임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일해 보셔서 잘 아시지요. 돈 안 들이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책 내거나 유투브하는 분들 비지니스적 비하인드스토리가 많을 겁니다.
저도 역사 찾는다고 다닐 때, 의외로 의로운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셔서 하느님과 호국영령들께서 보호해 주셨다고..
김찬삼 이후로 세계여행 다니다가 대우자동차 홍보이사, 명예겠지만 비용을 후원받는, 가 된 청년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유네스코 극동아시아 문화예술 담당 이사님은 수교이전 중국에서 역사를 찾으러 다니셨죠.
뒤로 많은 후원을 해준 대우, 현대등 회사 깃발을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찍어 다 드린 것으로 압니다.
신문광고에 크게 쓰였다고...
나름 의미가 있는 테마가 있는 여행이면 도와 주시는 분들도 많을 수 있고, 여행 후의 유대관계도...
좋은 글, 늘 감사드립니다
늘 흥미로운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