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날새와 함께하는, 2026년 5월 9일 토요일입니다. 창세기 44장, 18, 33, 34절 말씀에서 '좋은 기도의 모델, 유다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창세기 이야기를 드립니다.
18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아멘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불가능하고 무모해 보이며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애굽의 총리 앞에 끌려온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은 계란 같았으며, 애굽의 총리는 바위 같았을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아끼는 은 잔을 훔친 도둑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그 은잔은, 고관대작 집에 흔한 그런 은잔이 아니라, 총리가 점을 치는데 사용하던 은잔을 자신들의 막냇동생인 베냐민의 곡식 자루 속에서 나왔으니 어떻게 대항할지라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며 또한 용서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같은 상황이었지만,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애굽 총리 앞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진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던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애굽의 왕과 버금가는 총리 앞에 엎드려 진술하였습니다. 애굽의 총리와 유다를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한 사람은 절대적인 강자였으나 한 사람은 절대적인 약자였습니다.
오래된 영화지만, 로마의 '네로' 황제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높은 단상에서 '네로'는 잡혀온,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 운동장에서 온갖 조롱과 채찍으로 희롱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것이 지루하다 싶으면,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합니다. 그러면 그 즉시 철장에 갇혀있던 굶주린 사자들이 뛰쳐나옵니다. 네로의 엄지손가락 하나에 목숨이 달려있었던 것을 봅니다. 유다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것은, 총리의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럼에도 유다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총리께 자신의 일을 진술하였습니다. '진술'이라는 말은,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없이, 부풀리지 않고, 또한 감추거나, 숨김없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 진술입니다.
유다가 애굽의 총리께 어떻게 진술하였는가를 우리가 함께 보시므로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하도록 합시다. 먼저 십육절 말씀을 보면 유다는 "은잔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저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무슨 말로 설명을 드리겠으며 저희의 결백을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이제 우리와 그 잔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 사람은 이제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다의 이런 고백 중에는, 지난날의 죗값을 이번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유다의 회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나의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산 것이 얼마나 많고 크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죄 사함 받은 감사와 감격을 안고 나가야 합니다, 건성으로 "죄가 많습니다. 이 모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죄의 노예로 살았을 것을 생각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유다는 애굽 총리께 가까이 갔습니다. 총리가 자기를 내치지 않고 자신의 진술을 들어주시는 것을 알고는 총리께 가까이 나갔습니다. 이는 더욱 간절한 유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심정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는 하지만 안 주셔도 어쩔 수 없지'하는 생각으로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성도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잠언의 말씀 중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유다는 총리께 가까이 가서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애굽의 총리께 마구잡이로 말하지 앟았습니다. 최대의 경외심을 갖고 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두려운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성호를 장난삼아 마구 불러도 되는 그런 하나님의 성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경외심을 갖고 경외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떨리는 마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미사여구만 늘여놓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뜻으로, 이런 것을 구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하고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주여!'라는 말 한마디도 그 뜻을 진실로 알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한번은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가서 내가 기도하는데, 다섯 살 난 딸아이가 몇 번이나 '주여'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귀엽지요 그래서 기도 마친 후에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뭘 알고, 또는 믿음으로 '주여!'하고 말했겠습니까? 어린아이는 뜻을 알지 못하고 했을지라도 귀엽지만, 어른이 의미 없이 그렇게 한다면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하고 불러도,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공예배 시간에, 대표로 기도할 때. "우리 교회에 부흥을 주시오며, 말씀을 전하실 목사님께 능력 주시오며, 우리 교회에 몸이 아프신 분들을 고쳐주시고...,"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대표 기도 전에도 후에도 일주일 내내,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담임목사님을 위해서도, 환우들을 위해서 기도한 번 하지 않는다면, 그가 공예배 때 대표 기도 때 기도한 모든 내용은 사람들이 들으라고 말만 번드레했던 기도였을 뿐일 수가 있습니다.
이제 유다의 마지막 기도를 33절 말씀에서 보겠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베냐민 이 아이를 대신하여 내가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주소서, 베냐민 이 아이가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으면,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하고 아뢰었습니다. 전적으로 베냐민을 위한 기도였으며, 아버지를 생각한 기도였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만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기뻐들으십니다. 이는 그 중보기도하는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일 것입니다.
유명 모델이 입은 옷을 보고 사람들은 그 모델이 입은 옷을 입어보려 합니다. 유명 탤런트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미용실에서 그런 머리 스타일로 해달라 주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다를 통해서 기도의 좋은 모델을 보았습니다. 애굽의 총리보다 천배 만 배 높으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들은, 유다의 기도를 모델로 삼아 기도해 보도록 합시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절망적일지라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도록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도하며, 회개할 것을 남겨두지 않고, 회개하고, 기도하도록 도와 주시오며, 나를 낮추기를 원하오며, 다른 이들들을 위해 많이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날새 : 하나님은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신다.(사 4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