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어쨌든 도이치 사람들은 이상한 국민이란 말이야.
그들은 무엇이건 간에 깊은 사상이나 이념을 찾아
그것을 온갖 곳에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제는 슬슬 용기를 내어
인상印象에 몸을 맡겨도 좋지 않을까?”
이것은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중에 나오는 괴테의 말이다.,
그런 괴테도 불후의 ‘파우스트’를 써서
그 안에 독일인들의 깊은 사상성을 담아냈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이라면 낭만성보다
고전성의 여운을 더 풍기는 것 같다.
여하튼 나에겐 불란서라면
볼그레하고 달콤한 보르도의 와인을 떠올리지만
독일이라면 거무스레하고 쌉싸래한
도르트문트의 흑맥주를 떠올리게 된다.
독일 풀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해 독일 아카데미와 유럽영화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데 이어
올해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한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잔잔한 감동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 장벽은 동 서 냉전의 상징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사이에
25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의 지식인들과 기술자들이
그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이탈함으로써
동독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위협을 당했으며
그 결과 동독 인민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8월 12일 밤
서 베를린으로의 이탈을 봉쇄하기 위한
새로운 장벽이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철조망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기관총 초소와 지뢰지역이 설치된 5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되어
동독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조국에 10개월만 더 봉사하면
영광된 퇴역을 하게 될 동독의 비밀경찰 비즐리.
그는 장벽 너머에 어떤 삶이 있는지조차 생각할 것도 없이
오로지 국가에 대한 충성 일념으로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충직한 사내다.
하지만 자유주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아내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자신의 삶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드라이만과 그 아내의 순수한 사랑과
그들을 둘러싼 문화예술인들 사이의
자유분방한 대화내용을 훔쳐 들으면서
서서히 인간다운 생활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는 이들을 감시한다기보다
오히려 보호하면서 허위의 감시정보를 올려
이들의 활동을 돕게 된다.
그러나 드라이만 부부를 갈라놓은 뒤에
드라이만의 아내 크리스타를 차지하려는 장관의 끈질긴 추적 끝에
드라이만이 주도하던 자유화운동은 꼬리를 잡히고
증거를 인멸하려던 크리스타는 목숨을 읽게 되며
비즐리는 불명예 퇴역을 당하고 만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게 되고
드라이만은 자유의 회복을 테마로 책을 써서
이를 비즐리의 암호명에게 바친다는 글을 서문에 올린다.
불명예 퇴역과 베를린 장벽의 해체로
비즐리도 자유를 찾게 되어
우편배달부 생활을 하던 중
드라이만의 책을 사들면서
거기에 자신의 암호명이 서문으로 올라있음을 보고
잠시 타인의 삶을 살았던 시절을 회고해 보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기 전, 동독의 상황은
비밀경찰 10만 명과 협조자 20만 명을 두고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인간다운 생활을 옥죌 뿐
맹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비즐리가 장벽의 작은 틈새로
은밀히 들여다본 것은 사랑과 자유,
그리고 훈훈한 인간적 삶이었던 것이며
이를 계기로 비즐리는 인간성을 찾았던 것이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칙칙한 장벽 너머의 암울했던 에피소드 하나를 영상으로 그렸지만
이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둘러쳐진
모든 장벽을 허물고
거짓 없는 자신의 삶을 추구하자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유기체는 하위시스템으로부터 상위시스템으로
층층구조를 이루며 상호 연관 속에서
생명을 이어나가게 된다.
하위시스템은 각각 세포막이라는
장벽으로 둘러쳐져 있지만
밀도의 고저高低에 의해 상호작용 하면서
상위의 기능을 수행해나가게 된다.
국가나 사회는 물론이려니와
한 개인도 하나의 유기체로서
각각 장벽 안에 갇혀있지만
삶의 질質이라는 수준의 고저에 의해
상호작용 하면서 상생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살되
타인의 삶을 들여다봐야 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되
관음증에 머물지 말고
삶의 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삶의 질이 향상된다.
위 글은 2007년도에 쓴 글이지만
우리는 지금도 타인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러하매 오프라인, 온라인 어울림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은 남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심리와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심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게 심하면 노출증, 관음증에 이른다지만
(프로이트)
건강하게 드러내고 들여다보는 거야 누가 말리랴.
자유로운 나라의 남성 휴게실 신사분들이시여!
품위 있고 건강하게 드러내고 들여다보며 삽시다.
첫댓글 타인의 멋진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은
한권의 양질의 책 읽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남의 삶에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삶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단절된 삶을 살아 가는 듯한..에혀ㅠ
표현이 적절합니다.
양질의 책 읽는 것과 다름없다는~
그래서 가정방문도 견학도 많은 유용성이 있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의 감격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도 휴전선이 무너지는 감격이 제생애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길 바라야지요.
저는 외국 사람의 이름을
외우기는 커녕 한글로 읽는 것도 힘듭니다.
선배님도 지명이나 이름을 다 외워서 쓰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름이나 지명을 쉽게 읽거나 외우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게 누구나 어렵지요.
이젠 산 사람의 이름도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는걸요.
하지만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상징이나 이미지와 연결하면 산애란 이름이 잊혀지지 않지요.
참 신기합니다.
저는 외화를 보면 내용이 이해가 안되어 아예 영화를 보지않는 맹추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섬세하게 작가인양 정확히 찍어내는지 참으로 놀랍습니다.
글을 보고서 타인의 삶을 읽어내는 기술도 묘할 妙자입니다.
아이구우 그냥 생각나는대로 엮어본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