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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우리는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길도 찾고, 비행기표도 사고, 은행 업무도 보고, 모르는 말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만나고, 서류를 작성하고, 기다려야 했던 일들이 이제는 몇 분 만에 해결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도 체크카드를 다시 발급받아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에 전화하거나 지점에 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니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참 편리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은 분명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성과 창의력의 결실입니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더 빨리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번역을 도와줍니다. 저도 강론을 준비하거나 번역할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잘 사용하면 인공지능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교황 레오 14세는 첫 회칙 ‘위대한 인간성(Magnifica Humanitas)’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인간답게 살고 있습니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인간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의 소리입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책임지는 자유입니다. 인공지능은 빠르게 계산할 수 있지만, 회개할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지만, 십자가를 대신 질 수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말을 번역할 수 있지만, 상처받은 이의 눈물을 닦아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고, 권력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 삶을 흔들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서는 오래전에 바벨탑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 세우는 탑은 결국 무너집니다. 오늘날 인공지능도 새로운 바벨탑이 될 수 있습니다. 소수의 기업과 권력이 데이터를 독점하고, 알고리즘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이고, 진실보다 이익을 앞세운다면 기술은 축복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는 몇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과 공동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교황님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노예제를 말하기 전에, 먼저 교회의 과거를 돌아보았습니다. 교회도 역사 안에서 노예 제도를 분명하게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노예 제도를 묵인했고, 때로는 정당화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교황님은 이것을 그리스도교 기억 안의 상처로 바라보며,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했습니다.
남의 죄를 꾸짖기 전에 먼저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바로 그 회개의 마음으로 오늘의 새로운 노예제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로 편리함을 누리는 동안,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훈련하기 위해 밤낮으로 데이터를 분류하는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광물을 캐기 위해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의 노예제가 사람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다면, 오늘의 새로운 노예제는 가난과 불평등과 탐욕으로 사람의 삶을 묶어 놓습니다. 우리는 편리함만 보지 말고, 그 편리함 뒤에 숨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비자이기 전에 형제자매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다면, 우리는 그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기술은 전쟁의 도구가 될 때 더 무서워집니다. 오늘날에는 가짜 뉴스가 사람들의 분노를 키우고, 알고리즘이 증오를 퍼뜨리며, 무인 무기와 자동화된 전쟁 기술이 생명을 숫자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나 평화는 더 강한 무기에서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더 빠른 컴퓨터에서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들고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삶이 아닙니다. 기술의 주인이 되는 삶입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되 스마트폰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되 양심의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편리함을 누리되 가난한 이웃을 잊지 않는 삶입니다. 정보를 많이 얻되 진리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교회가 과거의 상처를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듯이, 우리도 오늘의 편리함 속에 감추어진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회개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만든 기계보다 크시고, 우리가 쌓은 탑보다 높으시며, 우리의 모든 지혜보다 깊으신 분입니다. 그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인간답게, 신앙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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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그것은 세 번 반복되고 있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함께 설명해주십니다.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곧 ‘자녀로서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네딕도에게 있어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함’(Timor Dei)은 공포나 무서움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출발점이자 ‘거룩한 경외심’, 곧 ‘사랑의 두려워함’으로 제시됩니다.
그는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말합니다.
“아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듣거라. 주님을 두려워함을 너에게 가르쳐주겠노라.”(머리말 12)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래서 그는 [수도규칙] 제7장 “겸손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겸손의 첫째 단계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어 잠시도 있지 않으며”(규칙서 7,10)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을 두려워함’을 수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태도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매 순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겸손’을 불러오며,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게 하며’(규칙서 58,7 참조),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머리말 45 참조)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규칙서 4,21; 72,11 참조) 됩니다. 그리하여 72장 “수도승들이 가져야 할 좋은 열정에 대하여”라는 장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규칙서 72,9)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거나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녀로서의 두려워함’, 곧 ‘사랑하여 두려워함’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이러한 두려움을 두고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순수한 두려움은 영원합니다.”(시편 19,10)
사실, 이러한 ‘사랑의 두려움’으로 하느님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이들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루카 1,50).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그 속에서 동행하시는 당신을 만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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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 생활의 영적인 토대를 설명하는 『수도 규칙』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수도 규칙』 제7장에는 겸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인은 겸손의 첫 번째 단계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고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이라 밝힙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모든 순간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자기 뜻에서 비롯된 모든 악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늘 우리를 보고 계시며, 어디서나 우리의 행동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말라는 엄중한 권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감시와 처벌의 시선에 가두시고 통제하시는 매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행여 우리 발이 돌에 차일세라 천사들을 시켜 지켜 주시는 사랑의 손길이시며(시편 91[90],11-12 참조),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를 가장 먼저 살펴보시는 돌봄의 눈길이십니다(139[138],1-5 참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을 두려움이 아닌 진정한 ‘경외’로 모셔야 하는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잠시도 그분을 잊지 않습니다.
또한 그분의 존재를 언제나 변함없이 기억하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보다 높아지려 하거나 그분의 자리를 탐내는 교만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그분을 “모른다”(마태 10,33)라고 말하며 제 잘난 맛에 취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 나는 세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겸손하게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을 “안다”(10,32)라고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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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진복팔단에 대한 오해...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축복을 갈망한다면, 먼저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1주간
진복팔단에 대한 오해...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진복팔단이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어 온 것을 성찰하며, 저자 데비 토마스(Debie Thomas)는 진복팔단이 뜻하지 않는 바가 무언지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조차도 진복팔단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시의 한 구절처럼 읽고, 또 어떤 이들은 삶의 규범으로 여깁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말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진복팔단이 자주 오해되고 잘못 사용되는 모습을 익숙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진복팔단이 뜻하지 않는 것들을 짚어내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진복팔단은 단순한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비주의 문화 속에서 "축복"이라는 단어가 흔히 카드 문구처럼 밋밋하고 의미 없는 표현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나는 정말 #축복받았어.") 그러나 진복팔단은 우리를 달래고 안심시키려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것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마음처럼 우리를 위로하고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진정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진복팔단은 해야 할 일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안이나 지침, 계명, 혹은 거래적 조건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해야 한다", "반드시", "마땅히"라는 의무적 뉘앙스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더 슬프고, 더 온유하고, 더 굶주리고, 더 목마르고, 더 순결하고, 더 평화롭고, 더 박해받으려 애쓴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지금보다 더 좋아하시거나 더 사랑하시거나 더 많은 상을 주시거나 더 인정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복팔단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수치심을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향해 선포하신 복을 읽고, "나는 특권을 누리는 불쌍한 존재구나!" 하고 자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메시지는 부끄러움이나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진복팔단이 우리를 꺾어 좌절시키는 것은 결코 마지막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진복팔단은 수동성이나 무기력에 대한 허가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슬픔, 온유, 가난, 박해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을 억압받는 이들을 계속 억압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의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복팔단 어디에도 불의를 용인하거나, 학대를 상대화하거나, 고통받는 이들에게 그들의 고통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구원적이라고 말할 자유를 주는 내용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통해 우리는 진복팔단이 우리 삶의 소명(vocatio)임을 배우게 됩니다. 데비 토마스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행동하십니다. 단순히 축복을 말씀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은 직접 그 축복을 살아내십니다. 말씀과 손과 발과 삶 전체를 통해, 예수님은 약속하신 복을 실제로 이루십니다. 그리스도교 이야기 안에서 고통 그 자체가 거룩하거나 구원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며,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치유와 풍요, 해방과 기쁨을 가져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름받은 소명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나누는 일은 먼 훗날의 과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진복팔단은 축복과 정의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축복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공동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제 영혼을 북돋아 줍니다. 오늘은 라자로의 이야기(Lazarus’s story)를 읽다가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 마음을 깊이 울렸고, 비록 인터넷을 통해서였지만 우리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계 곳곳의 형제자매들이 ‘활동과 관상 센터’에 보내 주시는 모든 이야기들에 감사와 감격을 드립니다. 그 이야기들은 제가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 Shona C.
References
Debie Thomas, Into the Mess and Other Jesus Stories: Reflections on the Life of Christ (Cascade Books, 2022), 120–121, 123–1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nh Trí,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방울씩 이루어 가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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