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24]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문화대혁명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연변지역이 피해가 컸던 것은 후방에 조국을 두고 있는 소수민족 밀집지역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연변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얼빈 등 여타 조선족 거주지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다만 피해 규모는 연변지역이 월등히 컸다.
연변지역에서의 문화대혁명은 1966년 말까지는 비교적 안정된 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1966년 말 경 모택동의 조카인 모원신이 연변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모원신의 출현으로 연변에서의 문화대혁명은 계급투쟁에서 조선족동포들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제거하기 위한 민족투쟁으로 성격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모원신은 연변에 도착한 이후 이 지역에서의 문화대혁명이 대단히 미흡하다며 혁명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가운데 조선족동포 최고 민족지도자인 주덕해를 타도하고 전연변을 해방하자는 구호를 제시했다. 상황은 1967년 1월 군대의 문화대혁명 개입에 대한 지시가 내려지면서 더욱 악화됐다.
군대의 개입으로 파벌 간 역학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연변지역 내 군중 조직들 간에는 권력투쟁에서 이기기 위해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주덕해는 반역자, 특무(간첩), 매국역적, 연변에서 으뜸가는 집권 주자차 등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주덕해와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주은래가 4월 그를 북경으로 송환해 감으로써 문제는 일단락 됐다.
주덕해는 이후 연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72년 8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 연변자치주위원회는 1978년 6월 주덕해의 죄상자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주덕해가 소환된 이후에도 파벌 간 대립은 격화해 1967년 7월 하순부터는 무장형태로 전개됐다. 연변의 양대 계파 중 하나인 ‘홍색’은 군대와 연대했다.
홍색과 군대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김일성 만세’, ‘연길시를 피로 물들이고 도문관을 넘어 내 고향으로 가자’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친다고 왜곡 선전했다. 이를 구실로 무력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면서 연변에서의 파벌투쟁은 소강국면을 맞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1968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가 수립됐다.
이 위원회의 핵심간부는 모두 한족이 맡았다. 이로써 연변지역은 한족의 영향 하에 들어갔고 민족구역자치주에 의해 1952년 이후 지속되어 온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사실상 소멸됐다. 북한과 중국 관계는 초기 사회주의혁명 과정에서는 완벽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각각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체제안정을 이루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국가의 건설목표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면서 독립운동, 혹은 혁명과정에서 취했던 국제주의적 연대 보다는 체제건설을 위한 국가주의적 실리를 취하는 것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측 관계에도 예상치 못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번째 균열은 중국이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