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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모든 것이 다 흑에 젖은 새까만 밤의 하늘 아래 성의 윤곽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무지막지한 천둥소리가 마치 백호의 울음소리처럼 울리고 비도 그와 같이 내린다.
그리고 그 천둥소리가 치기 전의 강렬하고도 날카로운 불꽃의 선.
선지자는 그 성벽의 위에 서 있었다.
번개가 칠 때 얼핏 보인 선지자의 얼굴은 차갑고도 차가워 보였다.
흐르는 빗줄기와 함께…….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고 싶어……. 선지자여, 저 폭군을 죽여다오.
한 나라의 중심부. 자랑스럽게 성이 우뚝 솟아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백성들은 그것이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그들이 힘을 합쳐 열심히 피와 땀을 흘려 만든 성인데도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그 이유인즉, 먹고 살기도 가뜩이나 힘든데 강제로 끌려가 대가도 없는 노동이라니,
새 왕이 즉위한 뒤부터 허리 펼 날,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날이 없었다.
하긴, 전의 왕도 그랬었던 걸로 이 불행은 몇년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그래도 쥐구멍만한 창고에 쌀 한톨이라도 쌓아둔다는 것은 어림 반 푼 어치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랬다가는 그 한톨 마저 빼앗겨 버린다.
하긴, 그 한톨이 창고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정녕 신이란 것은 없는 것인가? 저 지독스런 왕이 죽을때까지 우린 죽기살기로 일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들의 왕은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
힘 없는 백성들은 그저 말 없이 일을 할 뿐이다.
괜히 저항했다가, 나쁜 말이라도 누설했다가는 더 손해받거나 자신의 고역만 더 해갈 뿐이었다. 그것이 무서웠다.
힘 있다고 꽤나 자부하는 귀족녀석들은 그저 왕 앞에서 아첨을 떨며 생명을 유지할 뿐.
그들도 폭군을 두려워했지만 그 따위 방식들로 넘어가며 같이 이익을 챙겼다.
칠흑같은 길을 저 인간이 죽을 때까지 걸어가야 한다면?
백성들은 죽음 또는 반란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둘 중에 꼽으라면 백성들은 역시 후자를 생각했을까?
어차피 둘 다 죽음일 뿐이다. 후자라도 실만한 가능성을 잡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외로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고 죽으려 들다가는 더 고통스런 죽음이 기다리겠지만.
"우리 모두 뜻을 같이 하고 새 나라를 만듭시다. 몇년째 폭군의 정치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귀족들과 왕에게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오."
"게다가 난 아직 살고 싶어요. 고통스런 생활이라도 견디면……."
그의 말을 끊고 다시 다른 남자가 말했다.
"대체 얼마나 더 견뎌야 하오! 그 참는 것이 대체 얼마나 우릴 괴롭혔는지 아시오? 할아버지의 시대부터 계속 된 정치요. 새
왕이 즉위해도 마찬가지지 않소! 우린 참을 만큼 참았단 말이오. 지금은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럽게 되었소."
하지만 모두는 잔인한 폭군을 엄청나게도 두려워 했었다.
체스판 위의 한 나라, 그 밑의 것들은 절대적인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왕이 죽으면 그들도 같이 죽게 되기 때문이지. 그렇게 백성들과 귀족, 왕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상에서는 항상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밑의 것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인다해도 소수의 세력이 먼저 막거나 죽여버린다.
이유는 밑의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미 왕에게 그 힘은 빼앗겨 버려 저항할 힘은 남아있지도 않다, 라는 것.
그래서 몇 안되는 귀족과 왕족이 많은 백성을 짓밟아도 그들이 무너지지 않는 거지.
이 나라의 체스판은 이미 뒤집어졌을지도 모르지.
상대 나라는 희미해진 채, 자신의 나라는 추락해가고 있다.
몰락해 버린, 어쩌면 몰락해 가는 중인 나라일지도…….
하지만, 체스판 위의 인간들은 전진 밖에 모른다. 뒤의 왕에게는 갈 수 없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백성들일까?
뒤로 갈수도 있고 앞으로도 가는 것이 가능한 귀족들은 왕을 보호하는 세력일 뿐이라면,
그 폭군을 죽여줄 수 있는 자는 외부인일거야.
"선지자여, 저 폭군의 목을 따 우리에게 던져 주십시오. 무리한 부탁이란 것은 안다만, 이제 이 죽음보다 더한 칠흑의 나라, 지
배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대들의 소원이라면."
사람들은 그에 떠돌아다니던 선지자의 옷자락을 잡고 부탁했다.
선지자는 그에 승낙한다. 그 고갯질 하나에도 그들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순수하고도 가련한 백성들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이 이미 쓰지 못하는 힘으로 변해버렸을 뿐.
그것이 아니라면 기생충같은 왕이 다 빨아먹었을 뿐.
다음날, 비가 패연히 내렸다. 성의 오른쪽에 또 다른 성을 짓는 모양이었다.
백성들은 넘어지다가도 쓴 채찍을 맞고서는 힘겹게 일어났다.
무거운 돌의 무게에 비보다 더 흐르는 땀.
찝찝한 공기가 주위를 엄습하고
악마와도 같은 관리들은 날카로운 돌기가 주저없이 박힌 채찍을 이리저리로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땀과 같이 흘러 내리는 비, 피.
곧 터져버릴만큼이나 빨리 뛰는 심장, 그에 터질듯한 뜨거운 혈관, 쓰러지는 사람.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고역으로 죽은 인간들…….
남편이 일을 가자 남아 농사일을 혼자서 하는 아내들,
아이의 울음소리도 애써 못 들은 채 하며 열심히 묵묵히 일을 한다.
수확하면 모조리 세금, 그래도 남는 것이라고는 빚밖에 없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비는 역시 패연히 내린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둠의 밤. 조용히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쓰러져 있었다. 모두가 잠든 밤의 시각에 병사들도 지쳐 잠과 싸우는 중이다.
섬뜩하리만큼 기다랗고도 검은 머리칼이 소리도 없이 길을 지나가면,
저항하던 병사들은 피를 입에 가득이나 문채 쓰러져가고,
겁 먹은 병사들은 의식을 잃은채 쓰러져 간다.
기척없는 발 소리가 퍼져 왕의 침실 앞에 멈춘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그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옆의 동료가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기, 뭔가가 지나간 것 같은데?"
"뭐-? 헛것을 본 거 아냐?"
"그런가? 하긴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왕의 방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앞의 병사들도 피를 입에 가득 물고 있었다.
조금의 긴장도 없이 왕에게 다가가는 발. 역시 기척은 찾아볼 수도 없다.
오늘도 배부른 왕은 그 누구보다도 편히 잠자고 있다.
밖의 백성들은 못 먹어서가 아니라서도 잠을 잘 수가 없는데 안의 한 나라의 왕이란 자는 편히 먹어 절로 잠이 온다니.
조용히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끼치는 소리에도 왕은 편히 잠에 빠진듯.
"왕이란 분이시여, 일어나시어 백성들이 베푸는 사과보다 단 관용을 받으십시오."
왕은 그 소리에 깨어난다. 그 앞에는 칼을 든 선지자가 서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만큼 놀라 시선은 선지자에게로 둔채 멍하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선지자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칼을 가장 조용히, 그리고 베기 쉬운 곳으로 옮겼다.
깜짝인 번개에 칼이 시퍼렇게 빛난다.
그리고 들리는 천둥소리와 유연히 목이 베이는 소리.
백성들의 피와 살, 땀으로 채워진 이불,
그 아름다운 수가 놓인 이불에 왕의 더러운 피가 흩뿌려져 이불은 그것을 목말랐던 들개와도 같이 빨아 먹었다.
선지자는 곧 성벽의 위로 섰다. 그 곳의 병사들은 선지자를 막지 않았다.
"선지자께서 왕을 죽인건가?"
백성들은 깨어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폭군이라 백성들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들은 뒤로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 나라의 말도 아닌 말에게 부탁을 했다. 저 왕을 죽여 달라, 라고.
말은 그에 승낙했고 교묘하게도 백성들이 내어 준 길을 밟아 귀족을 잘도 피해 왕의 앞에 섰다.
그리고 왕을 쓰러트린다.
하지만,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서 있는 체스판은 이미 뒤집혀져 있기 때문…….
번개가 쳤다. 왕의 목이, 머리카락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보였다.
백성들은 통쾌하다, 라고 생각하며, 지금껏은 느끼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어, 어째서 저럴 수가……!"
"백성들이 드디어 미쳐버렸소!"
귀족들은 백성들의 분노의 경고에 벌벌 떨었다.
그리고 곧 천둥이 울린다.
꼭 맹수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우렁찬 소리.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다.
"왕을 죽였다!"
"폭군이 사라졌다!"
선지자는 왕의 목을 성벽 바깥쪽, 즉 백성들의 위로 팔을 뻗었다.
핏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흐른다.
그리고는 그것을 밟아 짓이겨 버릴 백성들의 위로 떨어뜨리며 선지자는 말했다.
"체크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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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번에는 서양쪽으로 갔군요.
곧 나라는 체스판처럼 뒤집혀버릴겁니다.
백성들이 단순한 왕의 죽음으로 끝날지
귀족들도 같은 꼴로 만들어 버릴지
그것은 이야기 밖이므로 상상에 맡기는게 괜찮을 것 같습니다.[사실은 귀챠니즘..?
첫댓글 선지자는... 확실히 선한건가요...?
아뇨. 선하지 않죠. 결코. 선지자는 말 그대로 선인(先人) 선생이란 뜻이란 비슷하게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가는 이를 말하는 것이죠^^! 분명히 악랄할 수도 있죠. 어느 방면에서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보니 님의 단편소설에서 선지자가 여러 곳에서 계속 나오네요.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집니다.
선지자는 서술자 비슷한 것이랄까요..?
글쎄요..저도알렌티나님소설항상보고있는데,선하다기보다는뭔가더깊은뜻이있을테죠.그러니까...이소설상에서선지자는존재하지만,현실에서는존재할수없는...음;;사람들의마음속유토피아라고나할까요...?하지만어떻게보면그건자기자신이될수도있는거구요...아-이게아닌데;;;마음대로이상하게해석해서죄송해요!잘보고가요^0^
맞아요^^. 그 누구도 선지자가 될 수 있죠. 어떻게 보면... 돋보기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감정등을 더 확대시켜주는 그런.. 그렇다면, 선지자란 것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읽네요. 오프라인에서 읽을 때랑 느낌이 또 틀린데..다음에도 기대할게요~
헤에- 조금씩은 수정을 하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