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촬영 소품으로 쓰인 신라 금관… 서봉총의 수난
경북 경주 서봉총 북분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 일제강점기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 아키오는 평양에서 서봉총 전시회를 열면서 이 금관을 기생에게 착장시키고 사진을 찍어 파문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는 동산처럼 우뚝 솟은 무덤들이 즐비하다. 그곳에서는 황금빛 찬란한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이 쏟아진다. 그 무덤에는 각기 숫자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데, 중요 유물이 출토된 무덤의 경우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서봉총’도 그러한 무덤 가운데 하나다.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각기 금관과 천마도가 출토되었기에 두 무덤이 그리 불린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이 무덤은 왜 원래 이름인 노서리(현 노서동) 129호분이 아닌 서봉총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무덤은 언제쯤 축조된 누구의 무덤일까.
스웨덴 황태자가 지은 이름
고이즈미 아키오와 함께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가 금관을 수습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26년 5월 조선총독부로 날아든 전보 한 통. ‘경주에서 토사 채취 중 다수의 신라 고분 훼손’이라는 내용이었다. 현장으로 급파된 총독부 박물관 직원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참혹했다. 다수의 무덤이 이미 쑥대밭으로 변했고 유물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경주역 정차장 개축에 필요한 토사 채취 작업을 강행하려는 사업자 측과 그것을 막으려는 박물관 직원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진 상태에서 ‘기묘한’ 아이디어 하나가 나왔다. 철도국 예산으로 총독부 박물관이 노서리 129호분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나온 토사를 정차장 공사에 쓰면 좋겠다는 안이었다. 머지않아 그 안이 채택되면서 역사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9월 중순, 봉분을 모두 제거하고 조사원들의 손길이 목관 범위로 접근했다. 금동신발을 필두로 망자의 머리 쪽으로 향하면서 금 허리띠, 여러 재질의 팔찌와 반지, 목걸이, 그리고 금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소식이 빠르게 일본으로 전해져 이벤트 하나가 기획됐다.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스웨덴 황태자를 발굴 현장에 초청하는 일이었다. 현장 책임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태자가 직접 유물을 수습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목관 내 유물을 수습하지 않고 흰 천과 판자로 덮은 채 귀빈 방문을 기다린 것이다.
10월 10일 오전 10시, 황태자 일행이 현장에 도착하자 조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판자와 천을 제거했다. 청명한 가을볕을 받으며 눈부신 금관이 드디어 공개됐다. 그 장면을 바라본 일행은 모두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황태자는 오전에 금 허리띠를 직접 수습한 데 이어 오후에는 고이즈미와 함께 금관을 들어 올렸다. 고이즈미가 무덤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한문에 익숙한 황태자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에 부착된 봉황 모양 장식에서 ‘봉’자를 뽑아 ‘서봉총’이라고 명명했다.
서봉총 발굴 기록, 남아 있을까
발굴이 끝나갈 무렵 서봉총의 남쪽에 또 하나의 무덤이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발굴 중인 무덤은 서봉총 북분이었던 것이다. 조사를 이어가려 했지만 남분 쪽에 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예산 또한 바닥을 보였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철수했다.
북분 발굴 성과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남분 발굴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발굴비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던 차에 ‘귀인’이 나타났다. 영국인 금융가이자 중국 도자기 애호가였던 퍼시벌 데이비드가 발굴비를 기부해 1929년 9월 3일 마침내 발굴에 착수할 수 있었다. 발굴에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얻었다. 북분에 비해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기대했던 화려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 무덤은 오랫동안 ‘데이비드 총’으로 불렸다.
고이즈미는 이 발굴을 도약대 삼아 승승장구해 평양박물관장이 됐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서봉총 발굴 기록을 모두 평양으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발굴보고서를 쓸 요량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않은 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현재 국내에는 서봉총 발굴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가 평양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1935년에는 서봉총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가 끝난 후 파티를 벌이면서 그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세트를 평양 기생에게 착장시킨 채 사진을 촬영하도록 했는데, 추후 그 사진이 신문에 공개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고구려 ‘태왕’ 지시로 만든 그릇
서봉총에서는 글귀가 적힌 은합도 출토됐는데, 이 은합은 장수왕 임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봉총 출토품 가운데 금관만큼이나 학자들의 관심을 끈 유물이 있으니, 은합(銀盒)이 그것이다. 발굴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몇 년 후 글자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면서 이 그릇은 일약 서봉총 비밀 해명을 위한 핵심 유물이 됐다. 건조한 보존 환경에서 녹 덩어리가 떨어지면서 드러난 글귀는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태왕(太王)께서 하교하시어 합우(合杅)를 만들었는데 3근 6량을 썼다’는 내용이었다.
193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연수라는 연호를 쓴 태왕이 고구려 왕인지 혹은 신라 왕인지 논란을 벌이고 있다. 또한 신묘년은 60년마다 돌아오므로 391년, 451년, 511년이 후보로 거론됐다. 여러 견해 가운데 장수왕 39년(451년)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은합은 1946년 호우총에서 발굴된 415년 고구려산 청동 호우와 더불어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긴밀한 교류 양상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유물이다.
학계에서는 서봉총 북분이 5세기 후반, 남분이 6세기 초에 축조되었고 북분에 묻힌 인물은 신라 왕의 직계 가족인 여성, 남분에 묻힌 인물은 그녀의 남편이거나 아들일 것으로 추정한다. 서봉총이 처음 발굴된 지도 어느덧 한 세기에 가까워지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서봉총을 재발굴하여 그 결과를 공개하였지만, 이 무덤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도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서봉총 발굴 기록의 소재 확인과 더불어 활발한 연구를 통해 서봉총에 투영된 신라사의 수수께끼가 해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