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소산 ‘국민성’이란
‘편견(偏見)’이라는 것이 참으로 범상치는 않은가 봅니다.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의 불후의 명작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 1813년에 발간된 이래 성서(聖書)보다 더 팔렸다고 하는데도 편견은 여전히 횡행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 오래전부터 인종적 편견에 빠지는 것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뚜렷합니다. 우리보다는 분명 그러합니다.
근래 영국 총리로 선출된 인도계 출신 리시 수낙(Rishi Sunak, 1980~ )이 한 본보기입니다. 그만큼 영국 사회는 진화하였고 변화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한국 입양아 출신 펠르랑(Fleur Pellerin, 1973~ )이 프랑스 문화부 장관까지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수낙 영국 총리의 행적에 버금가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 분위기가 덜 개방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독일에서도 베트남 입양아 출신 필리프 뢰슬러(Philipp Rössler, 1973 ~ )가 앙겔라 메르켈 내각에서 부총리직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반세기 전 상황을 돌아보면,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수년 전 제19대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입한 이 자스민(Jasmine Lee, 필리핀계 한국인, 1977 ~ ) 의원이 생각납니다. 필자는 당시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에게, “앞서가는 정치적 행보를 축하한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당 안팎에서 “크게 혼났다.”라며 씁쓸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이 자스민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응원하는 뜻으로 국회 입성을 축하하였더니, “왜 필리핀 출신이 우리 국회의원이냐”고 엄청나게 시달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듣기가 거북하고 부끄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와 관련해, 독일 생활 초기, 1960년대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프랑스처럼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군중이 몰려와 기차역 안으로 들어설 때, 역무원이 “기차표?” 하면 성난 군중은 말없이 돌아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독일 국민성(Der Nationalcharakter)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독일 주간지에 실린 시사만화가 생각납니다. 전쟁터에서 탱크가 갑자기 도로 표지판 앞에서 멈춰 서더니, “장교님, 여기 도로 표지판은 ‘디젤 차량’은 출입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만큼 독일 사회는 조금은 융통성이 부족하다 할 정도로 교통 규칙을 비롯하여 여러 사회 법규를 잘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독일인들도 자랑스러운 ‘국민성’ 덕분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1968년, ‘원외 야당(APO, Außer Parlamentarische Opposition)’이라는 젊은 층이 중심이 된 항쟁은 독일 사회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이어진 ‘바더 마인호프(Baader-Meinhof)’ 폭동은 내전(內戰)을 방불케 하였습니다. ‘독일 국민성’ 운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독일 사회는 국민(Volk)이라는 낱말에 거리를 두면서 시민(Bürger)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근래 “아슬아슬한 대한민국”이란 제하의 칼럼에서 철학자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1959 ~ )는 근대사에서 우리가 스스로 쟁취하지 못하였기에 “국가를 이익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민족 공동체로 받아들인다.”라며,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익보다는 민족의 이익에 몰두하였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중앙일보》, 2022.12.09.) 우리 사회에 던지는 따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오래 머무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1941 ~ )’가 생각납니다. 그는 한국을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면서 산문 형식의 책자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1980년대 그의 글은 참신한 부분이 있어 비교적 많이 읽혔습니다.
그는 한국을 안다는 ‘지한파’ 기자로 두드러지더니 어느 날부터 ‘혐한(嫌韓)파’ 기자로 일본에서 더 알려졌습니다. 일본 서점가 ‘혐한 코너’에는 그의 책이 필독서로 자리매김돼 있는 것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구로다는 “한국 사람을 왜 ‘프로이센(Preußen, 독일인)’과 비교하냐?”고 의문을 표하며 한국인은 ‘이탈리아 사람’과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일본인이 독일 사람과 더욱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깎아내리면서 이탈리아를 함께 깎아내린 우를 범한 것입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가 1786~1788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쓴 《이탈리아 여행(Italienische Reise)》에서 “로마에 들어서자, 그날 거듭 태어남을 겪었다. [Eine wahre Wiedergeburt von dem Tag, da ich Rom betrat(1787.01.20.)]”라고 하면서 이탈리아문화에 끝없는 숭앙심을 표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탈리아를 구로다는 깎아내린 것입니다. 이탈리아문화도 모르는 ‘문맹(文盲)’인 셈입니다. 편견의 소산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구로다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그 점에서 얼마나 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돌아보게 됩니다. ‘국민성’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민감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편견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분명한 것은 각 나라가 품고 있는 사회정서 또는 그 사회에 일고 있는 바람[香]은 각기 다를 수 있고, 대체할 수 없는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예로, 국경을 공유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면, 아주 다른 생활 양식을 어렵지 않게 느끼고 보게 됩니다. 지역마다 건물 모양새가 다르고, 일상 언어도 달라서 들려오는 언어의 음향(音響)도 다르게 다가옵니다. 바로 그 사회의 특유한 정서를 가슴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1960년대 초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에 가면, 전해오는 ‘자유의 바람’에 왠지 그저 행복해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독일에서 어떤 억압감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바로 각기 다른 ‘사회정서’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행객이 자기 일상의 생활권을 떠나 여행길에 오르는가 봅니다. 각 사회의 고유한 정서를 ‘국민성’이란 개념의 편견으로 보아서 아니 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