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라디오 추천 소설
아빠가 너희들 학원 하원을 시켜주려고 갈 때,
차 안에서 라디오를 자주 듣곤 한단다.
마침 그 시간에 소설가 윤고은 님이 진행하는 <윤고은의 EBS 북카페>가 방송돼서 가끔 들어.
오늘 이야기할 책은 그 프로그램에서 소개해 주어 알게 된
조해진 님의 <우리 세희>라는 책이란다.
방송에서 <우리 세희>를 소개할 때,
이 책이 '자이니치'에 관한 책이라고 했어.
자이니치는 한자로 ‘재일(在日)’이라고 쓰고, '일본에 거주한다'는 뜻이란다.
주로 일제강점기 등 과거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한국 및 조선 국적의 재일동포와
그 후손을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이지.
단순한 단어의 뜻으로만 쓰이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자이니치'라는 말 속에는 오랜 차별과 배제의 시선이 겪어낸 아픔이 담겨 있단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이지.
예전에 읽은 <파친코> 독서편지에서도 이야기해 주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우리 세희>에서는 자이니치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보자꾸나.
지은이 조해진 님은 <로기완을 만났다> 등 여러 유명한 소설을 쓰신 분인데,
아빠는 이번에 읽은 <우리 세희>가 이 작가님의 첫 책이 구나.
1. 북한 출신 자이니치
주인공 문연주는 미술평론가로 일하는데,
일본계 영국인 제이비 류의 전시회에 참석하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런던 출장을 오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곳에서 서정우 선생님이 위중하시다는 연락을
그의 아내인 '센세'로부터 받게 돼.
서정우 선생님은 3년 전 돌아가신 엄마의 소중한 지인이었단다.
…
문연주가 여덟 살 때,
엄마와 북촌에 갔다가 우연히 엄마의 일본인 지인들을 만난 적이 있어.
그들이 바로 서정우 선생님과 그의 아내 기쿠치 사치에 센세였지.
서정우 선생님은 엄마를 ‘히로코’, ‘오 선배’, 또는 ‘세희 누나’라고 불렀어.
엄마가 일본에서 살았을 때 알고 지내던 분들이라,
북촌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한국에 오실 때마다 늘 함께 시간을 보냈단다.
엄마 오세희와 서정우 선생님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대학교 때 엄마가 서정우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대.
엄마는 일본에 계실 때
자이니치 차별을 반대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는데,
서정우 선생님이 기억하는 엄마는 매사에 박력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단다.
한편, 서정우 선생님의 형님은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셨는데,
젊었을 때 북한에 다녀온 이력 때문에
북한 스파이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받으셨다고 하는구나.
그 시절이 바로 1970년대 초, 서슬 퍼런 독재 시대였단다.
서정우 선생님은 형의 구명 운동에 온 노력을 쏟으셨어.
미국까지 가서 구명 운동을 펼쳤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형님은 여전히 출소하지 못하셨지.
그렇게 형의 구명 운동을 하던 중에
미술 교사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셨다고 해.
하지만 처가에서도 자이니치인 서정우 선생님과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하는구나.
…
연주가 대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서 1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서정우 선생님 댁에서 지냈단다.
이때부터 두 분을 각각 ‘서정우 선생님’과 ‘센세’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센세라는 일본말도 결국 ‘선생님’이라는 뜻이지만,
아내분이 일본인이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구별해 부르게 된 것 같구나.
아무튼 서정우 선생님 부부는 아이가 없어서
연주를 친딸처럼 아주 다정하게 대해 주셨단다.
…
연주의 엄마 오세희는 일본에서 태어나셨지만,
외조부모님의 고향은 본래 북한이었어.
그리고 연주의 외삼촌은 결국 북한에서 삶을 마감하셨단다.
원래는 일본에 사셨는데,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한 ‘북송 사업’ 때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신 거야.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북한 생활이 무척 힘드셨는지,
외삼촌은 북한에 가신 지 5년 만인 1970년,
부인과 두 아이를 남겨둔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는구나.
일본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셨기에 그 충격이 더 컸을 거야.
엄마 말로는 외삼촌이 팝송을 엄청 좋아하셨는데,
북한에서는 팝송조차 듣지 못하게 통제하니 견디기 더 힘드셨을 거라고 하셨어.
자유롭게 팝송만 들을 수 있었어도 그러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엄마는 자주 말씀하셨어.
…
연주의 외조부모님은 계속 일본에 사셨고,
연주가 열한 살 때 처음으로 두 분을 만나러 일본에 갔었단다.
외할아버지 박태식과 외할머니 정순애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2월,
두 살 된 어린 아들(외삼촌)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셨어.
해방이 되고 몇 달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부산까지 오셨지만,
외할아버지가 먼저 고향인 원산에 가서 자리를 잡고 연락하려다 일이 틀어지고 말았단다.
원산으로 가던 도중 동두천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유치장에 한 달 동안 갇히게 되신 거야.
그곳에서 당한 온갖 고문으로 외할아버지는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마셨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박태식은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했던 조국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셨단다.
그리고 1949년, 연주의 엄마가 태어나게 된 것이지.
2. 제주 출신 자이니치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연주는 런던에서 미술가 제이비 류와 인터뷰를 가졌어.
제이비 류는 일본계 영국인이라고 하지만,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자이니치였단다.
제이비 류의 할아버지는 ‘류성철’로 제주도 출신의 자이니치였다고 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가
해방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셨지.
하지만 해방 후의 제주는 혼란 그 자체였단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거든.
류성철의 형님은 사회주의 조직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어.
그렇게 어지러운 세상이었지만
류성철은 어떻게든 고향 제주에 정착하려 노력했단다.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게 되면서
동료 교사인 고미현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
그런데 1948년, 4·3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미현이 사회주의 단체의 연락책으로 일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말았어.
류성철은 미친 듯이 고미현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절벽에 매달린 채 싸늘하게 죽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된단다.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류성철은 고미현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주었다는 이유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어.
급히 사촌의 집에 숨었지만,
사촌은 류성철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도리어 사회주의 조직 동료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지.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단다.
다시 도망쳐 본가로 돌아왔을 때,
이미 부모님마저 모두 총살당해 돌아가신 뒤였어.
해방의 기쁨을 안고 따뜻한 고향을 기대하며 찾아왔던 제주는,
그에게 지옥보다 더 잔인한 곳이 되어버린 거야.
이곳에 더 있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류성철은,
고미현 오빠의 도움으로 배를 구해 목숨을 걸고
제주를 탈출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단다.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실제 역사적 비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읽는 내내 가슴이 너무나 먹먹했어.
그런 모진 풍파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은
평생 치유 받지 못할 깊은 흉터로 남았겠지.
아직도 그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가슴 아프구나.
…
제이비 류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연주에게 센세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어.
서정우 선생님께서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이었지.
그렇게 소설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난단다.
…
이렇게 아픈 역사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비록 일상에서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소설 속 비극들이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우리 역사의 실제 이야기라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아.
우리 세대는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고 깊이 다짐하게 된단다.
…
그런데 편지를 쓰다 보니 한 가지 문득 의문이 생기는구나.
외할아버지의 성은 ‘박’씨(박태식)인데,
엄마의 성은 왜 ‘오’씨(오세희)일까?
아빠가 소설을 읽다가 놓친 것 같네.
일본은 남편의 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주인공이 남연주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이것 때문에 소설을 다시 읽을 수도 없고,
나중에 너희들이 알게 되면 알려주길 바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고 있을 때 살짝 열린 욕실 문 사이로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책의 끝 문장: 내 눈에만 보이는 작은 눈보라를 맞으며 터덜터덜 기차를 따라오던 선생님이 점점 멀어지다가 끝내 어둠 속으로 소멸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제목 : 우리 세희
지은이 : 조해진
펴낸곳 : 현대문학
페이지 : 176 page
책무게 : 246 g
펴낸날 : 2026년 05월 05일
책정가 : 15,000원
읽은날 : 2026.06.28~2026.06.28
글쓴날 : 2026.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