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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귀화 중국인의 후예이고 김알지가 흉노족의 후예라면 도대체 지금 우리는 상당수가 중국인의 후예(특히 경주김씨, 개성왕씨, 전주이씨)이고 결국 그들이 세우고 통치했다고 봐야 되는지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에 대한 아래 글(인터넷에서 퍼온 글)에 대해서도 설명바랍니다. 삼태극 카페 관계자는 서력기원 이전의 중국의 삼황오제도 우리 한민족(동이족)으로 주장하면서 왜 유독 조선왕조 5백년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는지 의문이고 그렇다면 조선 태조대왕의 조상이 한족이란 주장인지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인지 검증되지 않은 가설로 더이상 민심을 현혹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태조 왕건의 조상이 중국인이고 여말 왕조가 원(몽고)왕조와의 정략결혼으로 혼혈화 되었다면 태조 이성계의 건국은 그야말로 폐가입진으로 맹자의 정치이념인 역성혁명의 정당성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조선 태조의 조상과 형평성 차원에서 정확하게 답변해 주기 바랍니다. 또한 신뢰 할만한 고증학적인 사료나 인종학적 측면에서 망언의 당사자인 귀하와 추종세력들의 선조는 확실하게 현, 토종 한국인(순혈 토종이 진짜 존재하는 지는 모름)이 맞는지, 아니면 탐욕스런 중국인의 후손인지 밝혀 주세요.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 우리나라 역사와 전주이씨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그대들의 학자적 양심에 대하여도 밝혀주세요. 미국은 아프리카 이주민의 후손이 대통령을 하고 있어도 이런 문제를 당신들처럼 뒷담화 치는 식으로 소란을 피우지는 않아요. 무엇이 문제인지 왜 자꾸 무궁화 삼만리 유구한 1만년의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정통성을 훼손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때국놈 앞잡이 같은 발언을 하는지 혹시 그대들이 귀화 중국인의 후손이 아닌지 그래서 우리 역사 말살정책인 동북공정을 비호하는지 심히 우려가 되고 그대들이 정녕 대한민국 국적인인지 매우 의심스럽고 유전자 검사를 해서 순혈 한국인의 표준이 아니면 피가 많이 섞인 나라로 이민을 보내거나 강제 추방하도록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요임금 순임금도 노자도 다 동이족의 후예로 알고 있는데 맞는 것인지, 또한 중원(중국) 영토의 상당부분이 과거 우리 땅으로 알고 있으니 우선 간도부터라도 그땅 찾아오는 데 연구 성과를 조기에 내놓을 일이지 그야말로 때국놈 앞잡이 같이 제나라 역사를 폄훼하고 비하하는 괴설로 타국을 이롭게 하는 매국적인 작태로 이 국가유공자를 분개하게 하는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특히 상고사부터 근세사까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인식과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에 대하여 답변 바랍니다. 첨언 컨데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역사학자라면 특정한 한 왕조시대의 역사만을 추려서 폄하하고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의도가 무엇인지 묻고 싶고 그러한 주장으로 특정 성씨의 조상을 외국인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과연 이나라 장래와 현재의 국리민복, 국민화합 그리고 정통성있는 역사 발전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지 "삼태극"님은 이 게시판에 가급적 신속하게 귀하의 소견을 밝혀 주고 귀하의 조상과 현재 국적에 대하여도 공개하여 주기 바랍니다.
고려 의조
의조(懿祖,?~?)는 고려의 추존왕이며 고려 태조(太祖)의 할아버지로써 이름은 작제건(作帝建)이며 국조(國祖)와 정화왕후(貞和王后)의 아들이다. 918년, 고려 왕조의 성립 이후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조선 세종(世宗)때인 1449년, 정인지(鄭麟趾)가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김관의가 고려 의종때 지은 편년통록을 인용하여 의조 작제건의 탄생설화를 수록하고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는 목종(穆宗)의 재위 때인데 장난 삼아 황제의 용상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절[揖]하는 자세를 짓거늘 목종(穆宗)의 아들 무종(武宗)은 마음으로 그를 꺼려하더니 무종(武宗)이 즉위하매 선종(宣宗)이 궁중에서 해(害)를 만나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여 몰래 빠져 나와 멀리 도망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고루 세상의 험난함을 맛보았다. 염관(鹽官)의 안선사(安禪師)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우가 특히 각별하였으므로 염관(鹽官)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요 염관(鹽官)은 항주(抗州)의 속현(屬縣)이니 다 동해에 접하여 있어 상선이 왕래하는 지방이었으므로 화를 무서워하여 항상 깊이 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것으로 명목 삼아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선종이 마가갑(摩訶岬)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머무를 때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따진 곳을 꿰매 주기를 청하였다. 보육(寶育)은 중국에서 온 귀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음 속에 "과연 술사(術士)의 말과 부합된다."고 생각하고 곧 큰딸로 하여금 명에 응하게 하였더니 문턱을 넘다가 코에 피가 흘러나오므로 진의(辰義)를 대신으로 드디어 천침(薦枕)하게 되었다. 기월(期月) 동안 머무르다가 임신하였음을 깨닫고 작별할 때 말하기를, <나는 당(唐) 나라의 귀성(貴姓)이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라.>고 하였다. 곧 아들이 태어나니 작제건(作帝建)이다.
또한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가 왕에게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을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자 편년강목의 저자 민지가 대신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1][2]
기록에서는 작제건이 당(唐) 선종(宣宗)의 아들이라고 기록되고 있으나 고려 당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여지며 그 신빙성은 희박하다.
코리안 신대륙발견 -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고래사냥 '작살잡이'
신라금관에 작살(出자형) 상형이 있다면, 고려시조신화의 작제건은 작살잡이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선사시대 고래토템 숭배에서 작살잡이는 무속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중요한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샤먼의 위치에서 통치자들의 위치를 상징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왕 자신이 작살잡이의 상징으로 신라 금관의 출(出) 자형 상형은 작살을 상형한 것이라고 나는 이미 앞선 글에서 논했다. 이 글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작살잡이' 상징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토템 신화학적으로 분석해보일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고래잡이 자손이었다는 것은 이미 앞선 글에서 논했다. 고려시조 왕건은 작살잡이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작제건 신화는 얼마나 우리 민족이 고래잡이 토템숭배 전통이 고대 시조신화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작제건'이라는 이름 자체가 '작살잡이'라는 음운에 이어진 표현이라고 하면 음운학적인 추적의 모호함이 있을 것이다. '작살'은 한자말도 아니고 어원이 밝혀진 것이 없다. 시기적으로 신라시대 인물인 작제건(作帝建)이 고래 '작살잡이'에서 그 이름이 연유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거칠부'(거친 사나이), '지철로왕'(저절로 왕=지증왕), 노힐부득(노들부들한 인품), 달달박박(딱딱하고 빡빡하다는 성품)의 우리말 표현이 한자로 표현된 구결 이두 표현의 이름들은 아주 많이 등장한다.
한자 그 자체로 '황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作帝建이라고 한 것은 어딘가 인위적인 것이다. "작살잡이이니까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이기에 알맞는 기존 언어에 조합된 신라의 이두식 표기 한자 이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이름의 유래가 어떠한 배경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작제건은 작살잡이의 위치에 있었다고 나는 그 신화적인 구조에서 찾아내 보일 것이다. 여기 작제건(작살잡이) 신화의 그 간추린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장사꾼들과 배를 타고 그의 아버지를 찾아 바다로 나가고 있을 때 안개 구름으로 인하여 사흘간 배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죽음에 직면하자 뱃사람들은 점으 치게 된다. 바다가 사나운 것은 이 배에 삼한 사람이 있어서 용왕이 노한 것이라고 하며 삼한 사람을 찾아 바다에 버려야한다고 했다. 이에 작제건이 스스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머지 않은 곳에 바위가 있어 올라간다.
여기에서 배가 풍랑이 이는 바다에 천둥도 없이 안개와 구름만 있는 채 표류했다는 것은 범고래 떼를 만나 소용돌이 풍랑을 만난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풀이한다.
거기에 제물로 던져진 작제건이 올라간 '바위'는 고래 등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다. 요나와 작제건이 만난 풍랑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닌 고래떼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나가 들어간 고래 즉 네비아단은 바다의 괴수로 서양 역사의 중요한 대도시 문명의 상징으로 철학화되어온 배경에는 원시 고래토템 숭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고래)'에 백발 용왕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위=용왕=고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용왕(고래)이 백년 묵은 늙은 여우를 활로 쏘라고 작제건에게 요청한다. 바다에서 '바위'가 있고 거기에 '용왕'이 나타나 '늙은 여우'와의 갈등 관계가 나오는 장면을 바다의 현실로 바꾸어보면 그대로 수염고래류인 대왕고래와 이빨고래류인 범고래 또는 상어가 싸우는 장면을 드러내는 고래잡이들의 무속적 신화적 내용으로 나타낸 것으로 상징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의 이빨고래류 또는 상어를 '여우'라고 한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에게 여우와 늑대를 범고래의 지상 버젼 또는 그 대항마로 자주 묘사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작살잡이 작제건은 대왕고래 토템용왕의 요청으로 범고래를 활로 쏘아 죽인다. 범고래가 뜯어먹으면 결국은 작살잡이들의 고래사냥도 실패하기 때문에 범고래떼를 먼저 쫓아보내야 하는 것이 고래잡이들의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작제건이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작살잡이'의 지상버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작제건이 바다에서 활을 쏘아 범고래를 잡았다는 것은 작살을 던져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고래잡이에는 작살로 꽂은 다음에 여러 고래잡이들이 화살을 쏘아 고래를 확실히 힘을 못쓰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혼자 나선 작제건의 활은 작살로 상징되는 것이다.
용왕이란 고래토템 신으로 볼 수 있으며, 풍랑을 일으킨 것은 대왕고래를 공격하는 범고래떼 또는 상어가 나타나 물결이 요란하게 일고 그 속에 배가 들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 잘 쏘는 작제건이 '바다에 뛰어든다' 그래서 '바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작살잡이가 작살을 들고 고래 등에 올라타는 장면의 신화적 표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용왕 즉 고래해신에게 요청을 받은 작제건이 그때 부처로 보이는 여우를 쏘아 죽이는 장면은 고려시조 신화에서 불교적인 것보다 고래토템과 연관한 신선도가적인 전승이 얼마나 중요한 권위를 드러내주는 것인지를 보여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작제건이 작살(활)로 여우(범고래)를 찔러 죽이니 그 댓가는 대왕고래(Blue Whale)을 잡아낸 댓가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것을 '백발 용왕(대왕고래)'가 그 댓가로 칠보를 작제건에게 주고 그 딸 용녀를 데리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딸이란 대왕고래 새끼까지 데리고 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전체적인 작제건 신화 구조에서 작제건은 고래잡이배의 작살잡이의 혈통가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손자 왕건이 위대한 작살잡이 후손이라는 용맹있는 인물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백발 용왕은 대왕고래이면서 그 대왕고래는 아메리카 인디안 고래잡이 전통으로 말하면 추장의 화신이기도 하다. 토템 신화학에서 사냥하는 대상인 대왕고래는 해신이면서도 사냥대상인 복합적인 야누스 의미를 가진다. 그런 동시에 고래 자체가 대왕을 의미하며 작살잡이 자신을 의미한다.
공포에 떨면서도 모시는 것, 사냥을 하면서도 숭상한 것, 사냥 대상이 사냥하는 자신이면서 지상의 최대 통치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원시 토템숭배시대의 사슴사냥과 고래사냥에서 존재했다.
작살잡이 작제건은 그래서 황제를 대신한 '作帝建'이며 범고래를 물리치고 대왕고래를 잡아 그 댓가를 선장 또는 고래잡이 마을 족장에게 선물 댓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메리카 인디안 고래잡이에서 작살잡이가 성공적으로 고래에 작살을 던져 고래를 잡게 되면 고래고기 부위의 첫번째 배분의 자격을 가지며, 그 보상이 추가되어 마을 추장으로부터 포상이 있었다. 작제건은 '백발 용왕'으로 묘사된 '추장'으로부터 칠보를 보상으로 받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추장의 딸'과 추장가문의 작살잡이 심볼인 '휴대용 토템폴'까지 부여받는다.
훌륭한 작살잡이 출신이 명문가에 혼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 가문의 상징 홀(笏)을 전수받기도 하는 것이 용왕의 딸 용녀가 그 가문의 보물인 '버드나무 지팡이'를 전수받기를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서 모계 데릴사위 계승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원시 토템숭배시대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작제건이 용왕에게 받은 '버드나무 지팡이(楊杖)'는 발해의 토템폴과 유사한 모양을 한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그것은 가문의 족보와도 같은 토템 폴이기 때문이다.
고래(물고기) 위에 개구리가 있고 그 위에 태양새와 인디안 시세열(Sisuitl)의 조합인 용이 있다.
*인디안들의 휴대용 토템 폴인 '토킹 스틱(Talking Stick)'
개구리 기단부를 보여주고 있는데 꼬리가 거북과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http://www.islandnet.com/~hjrice/sticks.html
*하이다 인디안들의 무속적 지팡이.
Haida Spirit Cane. 19c
작제건이 받았다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는 인디안들의 토킹 스틱과 같은 휴대용 토템 폴일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가 어렸을 때 아버지 진평왕으로부터 받았다는 "어출쌍생성골남진(御出雙生 聖骨男盡)의 내용을 미세하게 새긴 그러한 왕가의 상징 물건과 같은 것이 작제건이 받았다는 '양장(楊杖)'이며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발해 토템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상에서는 장식이 정교하게 새겨진 장도칼과 그 칼집으로 나와 있지만, 무속적으로 본래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와 같은 토템 폴이 가문의 보물로 전승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왕건의 고려 창건은 천년 신라의 신화적인 전통과 그 권위를 극복하는 시조 강화가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왕건의 시조들은 '육조'는 고구려 계통의 산신인 호랑이 토템인 호경에서 시작하여 신라 계통인 해신인 작살잡이 작제건까지 동원하여야 했을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는 그래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올라탄 바위와 같은 고래잡이들의 고래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제건이 올라탄 바위는 처용암이며 대왕암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신라 왕실의 탈춤으로 들어간 처용탈춤의 근원지는 작살잡이 무속 춤이었다. 그래서 고려시조신화 속에서 작살잡이 작제건으로 상징적인 묘사 속에서 울산 반구대 고래 암각화 인근인 처용암 섬에서 비롯한 신라 왕실의 고래잡이 무속의 전승을 포함시켜야 했을 것이다.
더불어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문무대왕의 해중능인 대왕암의 물갇힌 모습이 고래를 닮아 있듯이 신문왕이 만난 대왕암 바위에서 나타난 신룡 대신에 작제건은 바위에 올라 용왕을 만난 것으로 고려 시조신화 속에 묘사시킨 것이다.
만파식적 이야기에 나오는대로 진평왕이 움직이는 바위산 위에서 신룡에게서 받았다는 그 진평왕의 옥대(玉帶)란 발해 노하침 고분군에서 발굴된 '허리띠 장식'과 같은 토템폴 장식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작제건이 받았다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은 그래서 신라 천년의 고래토템 숭배의 신화적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계승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고려시대 숟가락이 기존의 '제비닮은 모양'이 아니라 고래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 천년 고래토템 숭배의 전승이며, 고려시대 신주(신주) 또한 신라의 장보고의 신주의 전승인 것이며 여말선초의 거북선으로 이어져 임진왜란 때에 바다에서 대활약한 '고래토템' 전승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12/11/09 오두)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작살낸다'는 성적인 속어는 고래 작살잡이 제의(祭儀)에서 유래
Spoon
Field Museum 14521
Mountain sheep horn spoon with totemic carved mountain goat horn handle (black).
*Haida Horn Spoon
*고려시대 청동수저
제비 아닌 고래 형상
*속초 교동 출토 숟가락
*무령왕릉 청동 수저
전통 자물통
첫댓글 공지글이 공식입장입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조이기에 반성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한인 ,한웅, 단군의 후손임을 늘 명심하고 살고 있습니다....
귀하가 환인 단군의 후손인지 어떻게 입증 하실 수 있나요? 수천년 아니 일만년전의 조상과 현재의 우리가 동일한 혈통인지 어찌 알수가 있어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혈통 시비를 하면서요!
뭐 정 필요하다면 디엔에이 검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땅에 살아온 족적이 있으니 삼신반점도 있고요. 태조 이성계의 혈통은 ? 저도 모른다 입니다....
하늘미소님! 님의 이성계의 혈통에 대해서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가설을 사실인양 주장하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 현재 한국인입니다 설사 귀화한 외국인이라도 대한민국 국적법에 따라 한국인이면 한국인 인것입니다 역사적인 지식이 많은 것보다 우리 나라사랑과 선조들을 존중하고 온고이지신 하는 자세가 나라 발전과 민족 정통성 확립에 더 가치있고 중요하다고 봅니다
흉노족 ? 삼국시대 통치자들 고려 이씨조선으로 넘어 오면서 전부 같은 민족 이지요 흉노족도 우리와 같은 핏줄 이지요
나라를 500년 유지했으면 대단한 나라 아닙니까? 지구상에 흔적도 없이 멸망한 나라도 있는데....... 그리고 왜놈들처럼 이씨조선이라고 국호를 왜곡하여 부르지 마세요! 단군 조선하고 구분할려면 고조선, 근세조선 하면 되잖아요? 세계3대박물관 가보셨나요? 소위 선진 유럽이란 나라 다 약탈국가들입니다. 그래도 국민들이 자부심 느끼고 조상 자랑하며 삽디다. 조선이 그보다 훨씬 선한 나라입니다. 나라 빼앗낄때 귀하의 조상들은 뭐하셨을 까요? 아주 궁금합니다
귀하의 분노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늘미소님의 글이 이까페의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라 생각 합니다. 오늘의 조국과 민족은 혈통위주이기 보다는 문화주의 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하다고 봅니다; 어떤 절대자를 숭배하는것 보다 대다수의 보통 인들의 생각을 중시하는 문화라고 보는것이 중요 하다고 봅니다. 세종대왕은 중시하지만 이완용은 나쁘게 보는것이 모든사람들의 마음이지 않을까요? 즉 우리의 문화 천지인 혹은 인내천사상 이런것을 좋아하고 절대자의 피조물이기에 노예로서 행복함을 가르치는 문화를 싫어 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가진이가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에 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미리내 은하님의 말씀 대로라면 더우기 삼태극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상을 귀화 중국인이라고 매도 하면 모순이지요! 조국과 민족을 구분할때 혈통은 그 민족의 정체성과 계승성,문화의 동질성을 말할때 중요한 핵심 요소입니다. 현대가 다문화사회이고 혼혈이 증가해도 민족 공동체를 언급할때 혈통과 유전인자가 중요한 고려요소입니다 다만 단일 혈통만을 고집하면 폐쇄적인 혈통주의로 말 할수는 있으나 부계 든 모계든 혈통을 완전 배제하고 조국과 민족의 동일성과 동질성을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특히 한반도에서 500년 조선국의 공과를 말 할수는 있어도 태생적인 정권의 한계로 몰면 매우 부적절하고 그의도가 불순하다고 봅니다
미리내님글중 인내천사상,노예로서 행복함을 가르치는 문화를 싫어하는사람들 정확한 답변이심니다.
여기서 인내천사상이 왜 나옵니까? 그리고 노예 운운은 또 무슨 말입니까? 고조선의 개국이념은 홍익인간이고 근세조선의 개국이념은 양인(良人) 중심의 자주국가 건설이고 통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로 압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외교정책때문에 노예국가 운운하는 것 같은 데 어불성설입니다 조선은 중국을 제후로 받드는 봉건국가가 아닌 자주독립국입니다. 현대의 민주적인 제도 못지 않게 합리적인 제도나 정책이 많아요! 자꾸만 주종관계의 갈등이론과 지나친 주관적 관점의 사관은 균형적이지 못합니다 사실 위주의 가치 중립적 관점이 더 맞다고 봅니다
와~이사람 완전히 골수까지 전주이씨구만~ 조선시대는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모신 제후국이었습니다. 대가로 자주독립국의 명분을 얻은 것이죠~ 앙탈인가요?
한솔바람님, 당신 혹시 전주이씨 아니요? 먼저 님의 신분을 밝히시고 논하세요. 만약 전주이씨나 이성개와 조금이라도 족보적 혈연적 관련이 있다면 님은 위 이야기를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조상이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지 조상 편들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이 까페는 님의 기존의 역사지식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보자고 개설된 곳입니다. 끝없는 말장난하자는 글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까페는 이성개의 조선의 실체에 대하여 학교국사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이면을 자세히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 실사적 증거를 보시고도 저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 까페는 이성개조선의 실체를 논하는데 이와상관없는 고려나 다른 시대 역사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도적질'해 놓고, 왜 다른 사람의 이상한 점은 꾸짖지 않냐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이성계조선의 실체를 파해치고 그 5백년동안 우리역사가 얼마나 절단났으며 후퇴했고 현재까지도 어떤 악영향과 폐악으로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지 물적증거로 고발비판하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줄기를 무시해버리고 엉뚱한 것을 가져다가 이성개조선을 정당화 합리화 하려군요.
님하고 말이 통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죠, '고려사'를 들먹이며 여기에 나온 왕건조상을 얘기하며 중국인 타령을 하시는데, 님은 우리까페의 이성개조선에 관한 게시물을 안읽었거나, 읽어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고려사는 이조정권이 세계제국 고려를 애서 깍아 내리고 위화도 반란을 정당화 합리화 하기위해 쓴 이조문헌중의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참고할 수는 있어도 곧이 곧대로 믿을게 못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인양 들이대며 답하라고 악을 쓰면 되겠습니까,
이성개정권은 처음에 고려국사를 썼다가, 그래도 고려를 너무 좋게 기술했다고 하며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며 이 후 더 개작하여 고려를 형편없는 제후국 정도로 기록한 사실을 알면서 모른척 하나요? 사상적으로 짱개정권이었던 잇씨조선정권이 뭘 그리 잘했는지 개관적인 실사적 자료를 근거로 체계적으로 올려놓고 저런 아전인수적 주장을 하세요.
무엇이 검증된 고려사고 조선사입니까? 그리고 먼저 그대들의 정체부터 밝히시오! 여기서 전주이씨가 왜 나옵니까? 나라의 역사를 특정성씨의 가족사로 매도합니까? 나는 57세의 상고사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있는 평범한 국민이고 국가유공자입니다. 20대때 안호상박사님 동국대 임승국교수님의 글과 강의도 들어본 사람입니다. 삼태극에서 님들의 주장을 마치 정사인양 호도하는 문제는 향후 검증된 학설로 학계의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니 젊잖은 분들이 "이성개"니 "반란의 괴수"니 하는 부적절한 용어는 삼가하세요! 여러분들이 한민족의 역사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먼저 겸손하고 자중 자애하세요!
내가 특정 성씨를 논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님들과 주장이 다르다고 그렇게 몰아 세우세요? 이것은 우리 조상대대로 살아온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폄훼라서 쓴 글입니다 미륵님 당신은 화교입니까? 님들만 역사을 말할 자격이 있고 님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사람은 거부하고 매도합니까? 만일 삼태극 관계자들이 학자라면 좀더 객관적이고 포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기를 문란하는 발언을 과격한 용어로 표현하는 님들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렇게 순수해 보이지가 않아요 왕건의 조상이 중국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왜 침묵합니까? 사실이 아니라고 좀 해보시죠?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왕건의 조상이 중국인이라는 건 또 어디서 대충 듣거나 읽거나 하다가 끄적이는 소리냐요?.. 그건 고려시조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당나라 숙종을 살짝 끼워 맞추기한 애교짓거리지~ 마치 전주이씨들의 정통성을 찬양하기 위해 세종이 끄적여댄 용비어천가처럼 말이야요~ 그렇다면 전주이씨들은 중국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성씨를 논할 게재도 아니고 이성개가 혈통이 어케 되야도 아님니다 그러나 이성개를 나라 고유 핏줄이라봐도 조선건국때 잘한건 없습니다
조선건국전 우리민족은 언제니 북방정책을 썻었는데 조선이후론 점점 작져서 오히려 침탈만 수없이 당하죠 만일 이성개 그때 회군하지 안
코 북방 정벌임무를 수행했다면 영토문제도 지금과는 다를것이고 남북문제도 생기지 안을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성개의 혈통을 떠나 잘한건 하나도 없는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