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업(業)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비란다국의 성문 밖 연목수(練木樹) 밑에서 살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바라문의 출신으로 이 나라의 왕이 된 비란야는
어느 날 5백 명의 비구를 거느리고 계시는 부처님을 보고 크나큰 존경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부처님 전에 나아가 설법을 들은 다음 청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이시여, 3개월의 안거 기간 동안 부처님과 모든 스님들이 먹고 사용할 음식,
탕약, 의복, 침구 등의 일체를 제가 공양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이 청을 수락하셨고, 왕은 매우 기뻐하며 궁으로 돌아와 대신들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이 여름 3개월 동안 매일 열여덟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토록 하라.”
이어서 왕은 백성들에게도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누구일지라도 이 여름 3개월 동안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기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그날 밤, 왕은 하얀 차일(遮日)에 궁성이 뒤덮이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왕은 침상에 걸터앉아 방금 꾼 이상한 꿈에 대해 골몰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흰색 차일이 궁성을 뒤덮다니? 이 꿈은 불길한 징조임이 틀림없다.
왕위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 걸 예언하는 꿈이 아닐까?’
왕은 즉시 평소 존경하던 예언가를 불러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이 꿈은 좋은 징조이다.
그러나 좋다고 해몽하면 왕은 부처님을 더욱 후하게 공양할 것이다. 나쁜 꿈이라고 풀이하자.”
평소 부처님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예언가는 거짓 꿈풀이를 했습니다.
“왕이시여, 이는 나쁜 징조입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징조인가?”
“왕이시여, 이 꿈은 왕위를 잃든가 반란이 일어날 것을 알리는 꿈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예언가의 꿈풀이가 맞아떨어지자, 왕은 매우 놀라 물었습니다.
“왕위도 목숨도 버리지 않을 좋은 방법은 없는가?”
“이 여름 3개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마시고 궁궐 깊이 숨어 계시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 옵니다.”
왕은 즉시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 여름 3개월 동안은 그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보는 것을 금한다.
만일 이것을 범하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왕은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부처님과 한 약속을 까마득히 잊은 채,
포고령을 내린 뒤 궁중 깊이 숨어버렸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 부처님과 5백 명의 비구는 공양받기 위해 궁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왕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수문장은 출입을 봉쇄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시봉(侍奉) 아난존자는 수문장에게 말했습니다.
“국왕은 어제, 앞으로 3개월 동안 음식. 의복. 탕약. 침구를 공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처님께 청하였는데, 어찌 문조차 열지 않는 것이요?”
“아난존자시여, 국왕은 5백 명분의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씀만, 하셨을 뿐,
누구를 위해서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국왕께 여쭈어보시오.”
“아난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국왕께서는 이 3개월 동안 그 누구라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고,
만일 만나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제 머리가 두 개 있는 거도 아니온데 어떻게 임금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음을 안 부처님과 5백 명의 비구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양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목소리로 거절했습니다.
“우리 그 누구도 앞으로 3개월 동안은 공양을 바칠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공양을 올리고 싶지만,
국왕이 포고령을 내려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바치는 일을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금지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보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하였습니다.
이 무렵 5백 마리의 말을 끌고 북방에서 이 나라로 온 상인이 있었습니다.
아난은 그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밝힌 다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다. 왕의 포고령이 나에게는 미치지 않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그는 아난에게 말했습니다.
“아난존자시여, 저에게는 달리 양식이 없습니다. 오직 말들의 먹이인 말먹이 보리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보리라도 좋으시다면 부처님께는 하루 두 되, 스님들께는 한 되씩,
오백 마리의 말먹이를 공양하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아난은 부처님께로 돌아와 이 일을 아뢰었고, 부처님께서는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말먹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나의 업보요. 5백 비구의 업보이다.
나는 기꺼이 그의 공양을 받겠다.
비록 백 겁을 지날지라도 만들어 놓은 업은 사라지지 않느니 [정업난면(定業難免)]
인과 연이 다시 맺어질 때 그 업보는 나에게로 돌아오느니라.
아난아, 너는 주(사람 수를 세는 소찰)를 가지고 비구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3개월 동안, 말먹이 보리를 먹고서라도 부처님과 함께 머물러 안거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주를 가지라’고”
아난이 비구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자 498명의 비구는 주를 뽑아,
말먹이 보리를 먹더라도 부처님과 함께 안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두 비구는 주를 뽑지 않았습니다.
사리불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지금 이질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찬 성질의 말먹이 보리를 먹는다면 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목건련도 뒤따라 말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사리불을 간호해야 하므로 그와 함께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이리하여 부처님과 498명의 비구는 비란다 성문 밖, 연목수(練木樹) 아래에서
상인이 주는 말먹이 보리를 먹으며 안거하였고,
사리불과 목건련 장로는 삼봉산으로 가서 천인들의 공양을 받으며 여름 3개월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과 비구들은 말먹이 보리로 밀개떡을 만들어 먹었고,
아난은 밀개떡을 드시는 부처님을 뵐 때마다 매우 비통해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극히 담담한 모습으로 밀개떡을 드셨습니다.
3개월의 안거가 끝난 날, 비구들은 각자의 소지품을 챙겨 부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의혹을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복과 덕을 원만히 갖추셨고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서 어찌하여 말먹이 보리를 드시지 않으면 안 되었나이까?
또 저희 498명의 비구가 그것을 먹은 까닭은 무엇이오니까?”
“비구들이여, 이 모든 일은 피할 수 없는 업보이니라.
옛날 비바시 부처님께서 8만 4천 비구들과 친혜성 교외에 머물러 있었을 때,
친혜성 안에는 5백의 동자를 가르치고 있는 바라문이 있었느니라.
온 나라 사람들은 그 바라문을 존경하고 섬기고 공양하였으나, 비바시 부처님이 친혜성에 나타나자,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공양하는 사람도 크게 줄어들었느니라.
이에 그 바라문은 부처님에 대해 깊은 질투심을 품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바라문은 맛있는 음식을 발우 가득히 담아 가지고
돌아가는 비구들을 불러 세우고 시비를 걸었느니라.
“무엇을 얻었는가? 발우 속을 보여 다오.”
스님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정직하게 보여주자,
바라문은 5백 명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악담을 퍼부었느니라.
“이놈들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을 만한 자격이 없다.
말먹이 보리나 얻어먹는 것이 마땅한 노릇이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도 입을 모아 떠들었느니라.
‘그렇고말고요. 스승님이 말씀하신 대로 말먹이 보리를 먹는 것이 제격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두 명의 영리한 동자는 오히려 바라문을 나무랐느니라.
“스승님, 그런 욕을 하시면 안 됩니다.
귀하신 이분들은 오히려 천인의 공양을 받기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부처님은 결론을 맺었습니다.
“비구들아, 그때의 바라문은 나의 전신이요
5백의 어린 제자는 지금의 그대들이며, 두 명의 영리한 동자는 사리불과 목건련 이니라.
이 악담의 과보(果報)로 나와 너희 498명의 비구는 이 여름 3개월 동안 말먹이 보리를 먹어야만 했고,
사리불과 목건련은 그 악담을 꾸짖은 선한 인연으로 삼봉산에서 천인들의 공양을 받은 것이다.
내가 항상 말하였듯이 악업(惡業)에는 언제나 나쁜 과보(果報)가 따르고,
선업(善業)에는 언제나 좋은 과보(果報)가 따르기 마련이다.
어찌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랴.
너희들은 인과의 도리를 깊이 명심하여 더욱 수행에 힘써야 하느니라.”
<일타 스님> ;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