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100]송지문(宋之問).李頻(이빈)5절-渡漢江(도한강)
출처=당시삼백수 권5 오언절구250.
渡漢江(도한강)-〈漢水를 건너며〉
李頻(이빈)
嶺外音書絕(영외음서절),
經冬復立春(경동부립춘).
近鄉情更怯(근향정갱겁),
不敢問來人(불감문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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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외(嶺外)에는 소식조차 끊어졌는데
겨울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구나
고향에 가까울수록 마음은 더욱 두려워
그곳에서 온 사람에게 감히 묻지도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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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釋] 영외(嶺外)에서 나그네 된 지 하도 오래라
집에서 오던 편지가 끊어진 지도 한참 되었는데,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다. 한수(漢水)를 건너고 있는 지금
고향과는 점점 더 가까워지지만 혹 그 사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었을까
더욱 겁이 나, 고향에서 온 사람에게 소식을 자세히 묻지도 못한다.
[解題] 이 시는 오랜 객지 생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였다. 타향에서 머문 지가 오래되어
고향의 소식이 끊어지고 벌써 새해가 되었다.
한수(漢水)를 건너니 집은 가까워지는데 시인의 마음은 한편으론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움이 생긴다.
오랫동안 편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사이 혹 집안에
변고(變故)가 있지는 않았는가 걱정하는 것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나그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자연스럽고 소박한 언어가 고향을 향한 친근한 감정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귀향하는 나그네가 집에 도착하기 전
느끼는 복잡한 심리와 긴장된 정서가 짧은 시 안에 선명하게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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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江(한강) : 한수(漢水)이다. 장강(長江)의 가장 긴 지류(支流)로서,
섬서(陝西)에서 발원(發源)하여 호북(湖北)을 거쳐
무한(武漢)에 이르러 장강(長江)으로 유입(流入)된다.
<참조>[당시삼백수]漢江臨眺(한강림조) - 王維(왕유)
http://blog.naver.com/swings81/220966861110
○ 李頻(이빈) : 818~876. 자(字)는 덕신(德新)이며
목주(睦州) 수창(壽昌:지금의 절강성 건덕현) 사람이다.
대중(大中) 8년(854)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교서랑(校書郞)‧시어사(侍御史) 등을 지냈으며,
훗날 건주자사(建州刺史: 지금의 복건성 건구현)가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저서에 《李建州刺史集(이건주자사집)》이 있으며,
《唐才子傳(당재자전)》에 소전(小傳)이 있다.
○ 嶺外(영외) : 嶺南(영남)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광동(廣東)‧광서(廣西) 일대를 포함한다.
○ 來人(내인) : 고향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본 자료의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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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삼백수에는 작자가 이빈으로 되어있으나
전당시에는 작자가 송지문으로 되어있다.
渡漢江 (宋之問)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全唐詩 卷五十三
渡漢江 , 作者:宋之問 唐
嶺外音書斷,經冬復歷春。
近鄉情更怯,不敢問來人。
이하=동아일보 입력 2023-04-28 03:00
어떤 귀향[이준식의 한시 한 수]〈21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영남 밖으로 내몰려 가족과 소식 끊기고,
겨울 나고 또다시 봄이 지나네.
고향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지는 심정,
그곳서 온 사람에게 차마 집 소식 묻지 못하네.
嶺外音書斷, 經冬復歷春.
近鄉情更怯, 不敢問來人.
―‘한수를 건너며(도한강·渡漢江)’·송지문(宋之問·약 656∼712)
오래 객지에 머물다 귀향길에 나선 나그네라면
가까워지는 고향을 떠올리는 일이 더없는 설렘이자 벅찬 감격일 것이다.
그 경쾌한 발걸음이며 달뜬 심경을 무엇에 비기랴.
한데 시인은 ‘고향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지는 심정’이 된다.
심지어 고향 사람을 만나고서도 ‘차마 집 소식을 묻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다.
궁금하지만 묻지 못하는 모순심리는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가족이 평안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깨트리고 싶지 않기에
애써 궁금증을 억누르려 한 것이다.
이는 또 당시 시인의 처지와도 무관치 않다.
유배지 영남 땅 광둥(廣東) 지방에서 몰래 도망 나와 귀향길에 올랐기에
신분 노출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무측천(武則天)의 측근으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던 시인은
여황제가 축출되면서 황량한 오지로 좌천되었고
낙양 귀환이 아득해지자 탈출을 결행한 것이다.
시인의 은밀한 귀향이 환희로 이어질지는 미지수.
낙양과는 꽤 먼 거리인 한수(漢水)를 지나면서도
‘고향과 가까워진’ 걸 느꼈다니 심리적으로 이미 귀향의 성공을 예감했는지 모른다.
송지문은 당대 율시의 초석을 다진 인물.
뭇 신하들과 시재를 겨루어 즉석에서 황제의 비단 두루마기를
하사받을 정도로 시재가 출중했다. 출세를 위해
여황제의 남총(男寵·성적으로 여황제의 총애를 받는 미남자)에게
아첨도 하고 스스로 남총이 되려다가 좌절되었다거나,
조카의 시구를 뺏으려다 실패하자 그 목숨을 앗았다는 일화가 오명으로 남아 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