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563
4월18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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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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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03yxh6EOvA
[수원교구 허규진 메르쿠리오(제2대리구청 북음화3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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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I21qRWHG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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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성체성사의 표징이다>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0-2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는 거대한 '양식의 표징'과, 다음 주부터 이어질 '생명의 양식'에 관한 심오한 담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사건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다(Ego Emi)"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그의 서간에서 명확히 선포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면, 그것이 곧 내가 성체와 한 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빠서 두려운 줄 압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려움은 '하느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확신에서 오는 독극물입니다. 이 감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짐승의 본성으로 퇴행합니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 배경이 된 실제 사건입니다. 1816년 세네갈로 향하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되자, 고위층은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갔고 150명의 선원은 급조한 뗏목에 버려졌습니다. 13일간의 표류 동안 그들을 죽인 것은 굶주림보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존재의 빽)을 잃어버린 순간,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즉시 지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끔찍한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15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성체적 평화가 없는 영혼이 마주하게 될 감정의 종착역은 이처럼 처참한 짐승의 상태입니다. (출처: 조나단 마일스, 『메두사: 난파선과 지옥의 기록』)
두려움은 우리를 현실보다 더 큰 공포의 환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우리를 죽이는 창칼이 되게 만듭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왜일까요? 주님을 사랑의 주권자가 아닌, 내 삶을 위협하는 낯선 타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냉담자 방문을 할 때 어떤 분들의 시선도 그랬습니다. 저를 보지 않기 위해 문을 빨리 닫았고, 빨리 가라고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Ego Eimi).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신성 선포입니다. 이 목소리가 들리고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을 모시는 순간, 풍랑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풍랑 한복판에서도 내 감정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비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존재의 현존'을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합니다. 영화 ‘127시간’에서도 돌에 손이 눌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 자신의 손을 자를 용기는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단순히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실재적인 믿음에서 옵니다.
'개미 마을의 마리아'라 불리는 가톨릭 복자 후보 기타하라 사토코(Satoko Kitahara)의 사례입니다. 명문가 출신의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는 일본의 가장 비참한 빈민가인 '개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오물과 악취, 질병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금방 두려움과 혐오감에 질려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토코는 그곳에서 평생 본 적 없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미사에서 모시는 성체를 통해 "예수님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이 가난한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평화로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치의는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가면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가 느껴졌다. 그녀의 감정 자체가 그녀가 믿는 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사토코의 평화는 그녀가 성체와 온전히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부신 표징이었습니다.(출처: 마쓰이 토오루, 『기타하라 사토코: 개미 마을의 천사』)
성당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세상 걱정에 가슴이 답답하다면, 우리는 아직 성체를 '음식'으로만 먹었을 뿐 '생명'으로 합일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면 죄도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말고 평화를 선택합시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고백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읍시다. 그는 1544년 1월 15일, 인도 코친에서 사프란스(Saffrans) 섬으로 향하는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다는 사납게 울부짖었고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내적인 위로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며, 저의 모든 고난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 바다가 나를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의 생명보다 하느님의 평화를 더 크게 맛보았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간집』, 1544년 1월 서한 재구성)
그가 인도와 일본의 낯선 땅,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으로 기쁘게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체를 통한 '감정의 정복'이었습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성사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가 모시는 성체는 단순히 빵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구원의 방주다. 풍랑이 일어날 때 배 바깥을 보지 말고,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대의 심장은 고요한 항구가 될 것이다. 감정의 평화가 곧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사신다는 가장 고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St. Ambrose, De Sacramentis, 4, 4)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평화로울 때, 여러분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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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집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개의 원이 겹치면 그 가운데에 공통되는 부분이 생깁니다.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만나서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그런 교집합을 보았습니다. 킬린(Killeen)의 한인 공동체를 다녀왔습니다. 그 공동체에는 10년 동안 한국인 사제가 없었습니다. 한국어 미사도 없었고, 한국어 고백성사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어로 신앙을 나누는 사순 특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교우들이 오후 1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함께했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를 봉헌하고, 사순 특강을 들었습니다. 다섯 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는 신앙에 대한 갈망과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중용’ 23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면 참됨이 생긴다. 참됨이 드러나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이면 변화가 일어나며 마침내 세상이 변화된다.” 신앙은 결국 정성에서 시작됩니다. 본당에서도 특강이 있었습니다. 보통 특강은 한 시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은 묵주기도, 강의, 성시간을 함께 하셨습니다. 네 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체 강복을 해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바쁜 현대 사회는 빠른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에도 ‘빨리빨리’가 있습니다. 짧은 기도, 짧은 강의, 짧은 미사. 편리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깊은 울림이 부족합니다.
이번 특강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공동체가 커지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공동체를 돌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이렇게 해서 부제들이 선발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협력 사목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농담처럼 ‘땜빵 사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교회의 지혜였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고 다른 이들은 공동체를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교회는 이렇게 성장해 왔습니다. 교구는 공동체를 조직하고 이끌어 왔고, 수도회는 교구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영적인 갈망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수도회에는 재속회가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의 역사는 정성을 다하는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 정성을 다해 미사를 봉헌하는 사람 정성을 다해 신앙을 나누는 사람 그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바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신앙은 빠른 속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만남에서 옵니다. 정성스럽게 드리는 기도, 정성스럽게 드리는 미사, 정성스럽게 나누는 신앙,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그 음성은 우리의 삶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시킵니다. 중용의 말처럼 정성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이 움직이면 세상이 변화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정성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정성 위에 은총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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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춘천교구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은 큰 바람을 만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병행 구절을 보면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썼다.]”(마르 6,48)라고 나옵니다. 역풍을 만난 배는 뜻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돕니다. 지친 몸, 어둠, 멈추지 않는 역풍, 보이지 않는 예수님 …….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점점 짓눌립니다.
제자들에게 닥친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역풍이 불고는 합니다. 언제나 상승할 것만 같다가도 롤러코스터를 타듯 한순간에 갑자기 뚝 떨어지는 때가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에도 깊고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오늘 복음을 떠올려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역풍에 시달리던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 가까이 오시고, 그분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습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건너가며 갖은 역풍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험난한 파도와 어둠이 우리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마음이 굳어지며, 받은 은총을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풍랑과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걸어오십니다. 우리가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해도, 그분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그분께서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건네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삶에서 뜻하지 않은 역풍을 겪을 때마다, 고통으로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인생의 배 안으로 언제든지 다가오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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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오늘 복음은 바다 위의 풍랑 가운데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며 하신 말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를 들려준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공포를 진정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신비의 계시다. 제자들은 어두운 밤, 거센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음을 크게 두려워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험 가운데 잠시 버려두셨다. 그들이 두려움 속에서 더욱 그분께 달려가게 하시고, 당신이 나타나셨을 때 더 큰 위로를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Homiliae in Ioannem, 43,1) 우리의 삶에도 주님께서 침묵하시고 보이지 않는 듯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도 우리를 단련하시고, 당신의 현존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위한 준비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파도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다. 이는 창조주께서 혼돈의 바다를 다스리시는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물결 위를 걸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피조물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다. 바람과 바다는 그분께 순종한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1,6) 풍랑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폭풍 위에 서서 계시는 분이다. 그분과 함께라면 세상의 어떠한 혼란도 우리를 집어삼킬 수 없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다. 헬라어 “Ἐγώ εἰμι”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쓰신 말씀(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과 같은 표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강조한다. “그분은 ‘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나다’라고만 하셨다. 사람들이 그분을 단순한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In Ioannem Tractatus 25,5)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는 곧바로 목적지에 닿았다. 이는 주님을 맞아들일 때, 우리의 여정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곧, 항구이다. 설사 파도가 거세다 하더라도, 그분과 함께라면 안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De Unitate Ecclesiae, 7) 우리의 목적지는 세상 너머의 하느님 나라다. 그 길은 풍랑과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닿은 것과 같다.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분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우리가 주님을 배 안에, 곧 우리의 삶 속에 받아들일 때, 우리의 여정은 안전하게 완성된다. 주님을 모시는 삶, 곧 기도와 성사, 말씀 안에 머무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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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기에>
요한 6,16-21 (물 위를 걸으시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당신이기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멈추지 않는
나를 향한
믿음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믿음
바로
당신의
믿음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믿음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바래지 않는
나를 향한
희망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희망
바로
당신의
희망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희망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마르지 않는
나를 향한
사랑이
때론 오히려
두렵기 그지없으나
그 사랑
바로
당신의
사랑이기에
두려움 없이
같은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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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려움은 최선을 다할 기회>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하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이다.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다.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자체를 말한다.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모든 방해물을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도 우리 자신이다. 든든한 후원자 예수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나는 밖에서 허둥거린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 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이다. 그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옆에 계신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위기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고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게 된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다.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앞세우는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서 반드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도록 기도하길 바란다. 나의 능력은 작고 적어도 주님의 은총은 언제나 크고 많으시다.
“주님,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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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다섯 번째 표징으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또한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죽음을 제압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떠나온 제자들의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밤’은 어둠의 세력이고 ‘큰 물결’은 죽음의 세력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곧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이는 갈대 바다를 건넌 이야기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와 연결됩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라 일컬었듯이,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며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카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으로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요, “나다.”라고 당신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자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건너와’ 파스카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라야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흔들림 속에서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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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주님!
오늘도 끊임없이 항해하게 하소서.
항구에 평온히 정박해 있기보다 어두움을 헤치고 풍랑을 뚫고 가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 믿음과 의탁을 배우게 하소서.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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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다. 철학자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는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는 서로 인격체로 존중해 줌으로써 사랑과 신뢰를 맺는 ‘나와 너’의 관계를, 또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이용 가치나 상품 가치로 취급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변화는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사심이 가득한 ‘나와 그것’의 관계일까요? 주님과의 관계도 바로 이 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과 당연히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마음, 하느님 사랑을 보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세상 중심의 마음 등으로 주님과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고 맙니다.
주님 사랑에 온전하게 집중해야 ‘나와 너’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고, 주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6,17.18)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빛’ 이십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다는 것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을 뜻함과 동시에, 빛이신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제자들의 내면적, 영적 어둠을 상징합니다. 여기에 높은 물결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악, 죽음, 혼돈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거센 풍랑 속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삶의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오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가 닿습니다. 즉, 제자들의 힘만으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들지만,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을 배 안으로 표현되는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였을 때 참된 안식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자기 안의 욕심과 이기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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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16-21)
1)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일에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4-15)
‘기적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다음에 군중을 해산시키셨습니다(마태 14,22; 마르 6,45). 제자들과 군중을 곧바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군중 심리에 더 이상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과 군중을 분리시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보내신 것과 그들이 호수에서 바람과 파도를 겪게 하신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고, 그리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를 원하는지,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을 때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면서 응답했는지를 다시 잘 성찰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이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이야기는 분명히 상황도 다르고, 뜻도 다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서 고생할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마태 8,23-24). 그 이야기에서 ‘큰 풍랑’은 교회와 신앙인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안 계신다고 오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겪은 맞바람과 파도는 그들 내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들도 예수님 옆에서 고위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 등으로 들뜨고 흥분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옆에 안 계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또는 그들의 믿음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었고, 흔들리고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3)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가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일, 즉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만물의 주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임금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님이신 분께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만을 위한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믿음 없는 일이기도 하고, 무례한 일이기도 합니다. 20절의 “나다.”는, 원문으로는 탈출기 3장 14절에 있는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말씀이고, 그래서 이 말씀도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마태 14,33)
4)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8,36) 메시아의 나라는 이 세상에 건설되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건설됩니다. 그 방식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를 인간 세상의 왕국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현세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로 오해합니다. 그 오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은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9; 루카 4,6-7)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그 유혹을 간단하게 물리치셨지만, 신앙인들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인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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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삶의 풍랑에 개입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 복음 6장 17절)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복음 6장 18절)
물 일에 익숙한 제자들이 큰 바람을 예견 못하고 배에 오릅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환경적 어려움을 맞닥뜨린 것이 오늘 제자들을 뒤흔든 첫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요한 복음 6장 19절)
두 번째 두려움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옵니다. 사람이 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물에 잠기거나 헤엄치거나 둘 중 하나니까요. 체험했든 전해 들었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월적으로 보면 신비일 테지만 기괴하게 보면 유령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복음 6장 20절)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시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주님의 소리가 물 위에 머물고 ... 주님께서 크나큰 물 위에 계시네."(시편 29장 3절)라는 시편 작가의 고백처럼, 물 위를 걸어 호수의 성난 힘 위에 우뚝 서신 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의 내적 동요까지 가라앉혀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부재가 그분 현존의 권능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여정이 되기도 하지요. 없어 보아야, 잃어 보아야 현존의 행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영성 생활에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주님의 부재 상황이 우리를 갈증과 두려움으로 삼켜 버리게 허락하지 않으려면,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성난 힘 위를 당당히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리라는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6장 1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며 유다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이들 안에 갈등과 소요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뜨거운 마음과 선의로 시작한 길이어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도 새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들이 느낀 차별과 불공정은 공동체의 수치스런 흠집이 아니라, 개선하여 더 나아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오늘의 독서 대목은 사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를 잘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행전 6장 4절)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지키면서, 다른 선량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봉사의 직무로 초대합니다.
주님의 지체가 저마다 받은 모든 소명이 소중하고 가치로우며, 사람들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참여함을 한 걸음씩 익혀 나가는 여정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세상 안이든 교회 안이든 왜 불일치와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어려움의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고 지혜를 모아 찾아 나가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잠시의 혼돈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사도행전 6장 7절)는 놀라운 체험까지 덤으로 받을 겁니다. 교회는 넘실거리는 어둠의 물 위를 항해하는 배입니다. 우리는 그 배 안에서 외부적 어둠과 바람과 파도는 물론, 내부적 갈등과 충돌의 아픔까지 떠안고 가야 하지요.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분 몸의 지체인 서로를 믿고 기다려 주며 무지와 의혹의 밤바다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등대와 같은 위로이고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위로와 힘을 받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문제들을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압도해 짓밟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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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온갖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없이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제자들 얘기인데, 올해는 다른 주제로도 묵상할 수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묵상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어떤 두려움이 있으며, 왜 있는지 뭐 이런 것들에 대한 묵상이지요.
두려움이란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라는 사전적 정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내게 닥칠까? 꺼리는 극도의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는 만나게 될까 두려운 존재였지요. 그러니까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울 것까지 없지만 너무 싫어하면 싫어하는 일이 내게 닥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그 싫어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두려움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첫째는 존재적인 두려움입니다. 존재적인 두려움이란 존재의 안위와 생사와 관련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은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죽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같은 맥락에서 병고를 두려워하고 요즘 같으면 코로나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일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길 바라고, 특히 남자들은 일의 성공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데, 그만큼 일의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자기 전부를 걸다시피 하고, 반대로 실패할까 봐 아예 일을 벌이지도 않거나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도 하지요.
셋째는 관계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관계의 단절이나 이별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거절이 두려워 부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밤에 두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밤이 볼 수 없게 하고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같고,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종합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필이면 어두운 밤에 길을 떠납니다. 풍랑이 일어 몽땅 죽을 지경입니다. 갖은 애를 써도 헛수고이고 그래서 기진맥진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시는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니 유령 같습니다. 낮이면 주님인 줄 금세 알아챘겠지만 밤이어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자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다다르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고 같이 계시면 두려움은 즉시 사라지며 우리는 목적지에도 어느새 도달케 됩니다. 주님 없이 길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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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임마누엘이신 주님!>
오늘 복음(요한6,16-21)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게 이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풍랑이 이는 거친 물결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모습이라는 것도 함께 묵상해 봅니다.
우리네 삶의 자리 안에는 풍랑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시련들이 늘 함께 합니다. 공존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공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믿고 따라가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네 삶의 자리 한 가운데에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미사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만나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잉태 예고 때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신 말씀이며, 열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또 하나의 제자들인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풍랑을 이겨냅시다! 크고 작은 힘듦과 난관들을 주님의 손 잡고 이겨냅시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가 됩시다! 지금 우리농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ㅎㅎ
"그들은(열두 사도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봉사자로) 뽑았다."(사도 6,5)
오늘은 마산교구 60주년 기념미사와 그동안 미루어져 왔던 교구청 봉헌식이 있는 날입니다. 기도해 주시고 축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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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요한 6,19)
익숙한
방식이 아니라
열린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기대한 길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파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밤의 호수는 더 이상
길을 잃은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됩니다.
불안은 현실을 왜곡하지만,
믿음은 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자유로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든 테두리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내면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호수는 여전히 호수이고,
바람은 여전히 불지만,
판단이 멈추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호수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건너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안개가 걷히는 순간,
두려움의 대상은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남습니다.
익숙한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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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구 마르코 신부님의 온라인 피정
<애쓰는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당신의 영혼이 쉴 수 있도록>
"https://youtu.be/1bBmyTIEatM?si=IT4phqjMrJ4KZw0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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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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