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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음ㅡ뭐랄까.순간의 자유를 위해 남은 인생을 버리는 것?뭐.그렇다고 해두자.어차피
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만큼 용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까.생각을 마치고 내려놓았던 연필을 잡았다.아직도 빼곡하
게 밀린 학원숙제가 남아있다.지금의 나에겐 자살이란 시덥잖은 생각보다 학원숙제를 다 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정하게 들리는 초침소리에 시계를 봤다.젠장ㅡ학원시간이 거의 다 되간다.어쩌지?오늘도 숙제를 못해가면 선생님한
테 혼날텐데.부모님에게도 전화가 올텐데.으으.한꺼번에 여러 생각을 하니 골이 띵해져 왔다.이게 다 그 놈의 시덥잖은
자살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
"자,그럼 내일까지 풀어올 수 있도록.정라을!넌 선생님 따라오도록."
무료한 수업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야 집에 가는구나ㅡ하는 순간 아 이런.선생님이 날 부르신다.아마 숙제를 못해와서
또 뭐라고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학원책상위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져있는 지우개가루를 모두 책상아래로 흘려보낸 뒤
교재와 필기구를 가방에 넣고 가방이 열렸나 꼼꼼히 체크하며 선생님을 따라갔다.아래로 향해있던 시선을 위로 올리자
상담실이 보였다.아 이제 난 죽었다.입술을 혀로 한번 빙 둘러준뒤 조금 있으면 시작될 잔소리에 대비해 귀를 한번 후비
고 후 불었다.그런 내 모습이 영 거슬리는 모양인지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날 째려보고 계셨다.죄송합니다ㅡ선생님을 따
라 자리에 앉았다.음.이제 시작이구나.
"그래.정라을.숙제를 못해 온 동기는?"
"...."
"뭐ㅡ타당한 근거를 말한다면야 봐줄 수 있어.어서 말해보시지?"
"...."
"너 어제도 숙제 안 해왔잖아.안그래?맞지?"
"어젠 가족끼리 어디 갔다와서 못했다고 했잖아요.선생님이 부탁하신거
안사와서 그러시는 거에요?"
"시끄러!버릇없이 누가 말대꾸 하래!건방진게!너 진짜 혼나볼래?어?!"
"전 어제 이유는 타당하니까 말씀 드린거에요.왜 여기서 버릇이ㅡ"
"말대꾸 하지 말랬지!됐어.집에나 가 봐!"
"...안녕히계세요."
결국 난 억울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날 특히 싫어하던 선생님이었다.그런데 왠일인지 갈 곳이 있어 학원에 빠지게
됬다고 말하자 어디에 가냐고 물었다.난 당연히 질문에 답을 했고 선생님은 마침 거기서 살 것이 있었다며 나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 결국 사오지 못했다.그 다음부턴 나에게 생트집을 다 잡
아대곤했다.결국 그 날 선생님 때문에 난 엄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특히 공부가 최고인 엄마에게 숙제를 안 해간것
은 미친짓이였다.그렇게 두들겨 맞고 난 찔찔 울면서 밤까지 숙제를 해 겨우밀린 숙제를 다 할 수 있었다.결국 다음 날 아
침에 늦게 일어나 처음으로 지각이란 걸 했다.찌뿌둥하게 가라앉은 몸으로.
.
.
.
이상하게도 늦게 도착한 교실은 침묵이 깔려있었다.심지어 내가 오면 평소에 달려와 왓 졉,정라! 하고 소리 칠 정혜마저
조용했다.무슨일이지?그러고 보니 우리 반 반장, 구경태가 학교에 나오질 않았다.설마 반장 하나 안나왔다고 이럴 분위
기는 아닌데.크게 물어보기도 뭐한 상황이라 나는 내 짝궁인 정혜에게 귓속말로 물어봤다.무슨 일이냐고ㅡ
"..흑."
갑자기 정혜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그리고 정혜를 시작해서 여러 아이들이 저마다 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당황한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에게 정혜가 입을 열었다.
"반장이..구경태가..흐윽.으으으ㅡ"
"경태야!구경태ㅡ!아아악!흐으.개새끼야!이런게 어딨어!이런게 어딨냐고!!!!!!!!"
정혜가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하자,구경태와 가장 친하던 친구 강미르가 구경태의 이름을 부르며 악을 썼다.그리고 이제
서야 나는 구경태에게 무슨일이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학교에서 질이 나쁘다ㅡ하는 아이들과 다녔지만 학교는 언제나 꼬
박꼬박 나왔던 구경태.그리고 착하고 상처도 잘 받는 성격이었던 구경태.갑자기 내가 알고있던 구경태에 대한 모든 것이
엉키면서 마음 저 한 구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갑자기 손이 덜덜 떨렸다.설마ㅡ설마 그 아이가.말도 안됀다.정말 이건.
"경태가.죽었어.흐윽.경태가 죽었어 라을아ㅡ자살이래.아픈건 진짜 못 참는 놈이.그런 놈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대.
그 병신같은 놈이.구경태,구경태 그 놈이ㅡ"
강미르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내 생각은 설마였다.설마ㅡ그런 아이가 그럴리가 없어.그럴리가 없는데.그렇게 생각
했는데.이젠 덜덜 떨리는 손의 느낌도 느껴지지 않는다.그저 머리에 하얀 도화지가 가득 차서 생각을 없애버린다.이럴수
가.하ㅡ말도 안돼.어제까지도 학교가 끝나고 잘가라고 인사했단 말이야.그런 얘가 하루사이에.어떻게 이럴수가.
"ㅡ이유가.이유가 뭐야.부,분명히 어제만 해도 나한테 인사했단말이야.잘가라고 나한테 인사했단 말이야ㅡ!"
나는 나름 구경태와 친한 사이였다.그리고 난 그 아이를 잘 안다고 자부해 왔었다.내 나름 널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으으ㅡ경태엄마가.어제도.어제도 부부싸움을 하다가.으.흐윽.하다가 넘어지셨는데.으으.흐으.그러다가ㅡ"
어제도ㅡ어제가 아닌 어제도.
널 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난 널 가장 몰랐다.
*
'야,정라을.난 자유가 뭔지 궁금해.솔직히 그렇지않냐?우리 나이가 딱 호기심이 많을 나이잖아."
'뭔 헛소리야.호기심이고 뭐고 조용히 있으셔.아ㅡ그나저나 엄마때문에 짜증나 죽겠어!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학원숙제 못한건데 맨날 뭐라그래!가끔 엄마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잔소리고 뭐고 안 들을 수 있는데!'
'엄마?야 임마ㅡ함부로 그런 말 하지마.난 엄마 없으면 못 살아.엄마가 내 목숨이거든!'
'넌 참 마마보이다.마마보이야.'
엄마가 목숨이였던 구경태는 그렇게 죽었다.자신의 앞에서 술을 먹고 들어온 아버지와 대판 싸우다 죽어버린 엄마를 보
고 구경태는 목숨을 버렸다.엄마가 목숨이였지만 어쩌면 구경태는 자유를 위한 일탈이였을지도 모른다.매일 싸우는 엄
마아빠를 보는 괴로움.그 괴로움에 짓눌려 자신의 목숨이라 여겼던 사람의 죽음과 동시에 자유를 얻고 싶은 마음에 구경
태는ㅡ
죽었다.더 자세히 말하면 자살이였다.
自殺ㅡ그 아인 스스로를 죽였다.
천천히 구경태의 인생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봤을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그 아이는 이렇게 까마득하게 높은 옥상에서 홀
로 뛰어내렸다.
난간위로 올라섰다.차가운 시멘트의 느낌이 발에 전해졌다.
학교갔다 돌아오면 싸우다 지쳐 자고있는 아빠와 한 웅큼 뽑힌 자신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있는 엄마.괴로움.자유를
향한 갈망.구경태.
반복되는 일상.학원 학교.나에게 시선하나 주지않고 바깥일이 최우선인 아빠.공부가 최고인 엄마.그저 자신이 불리
해지면 어른임을 내세워 아이를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어른들.평소에도ㅡ하며 기회조차 주지않는 어른들.정라을.
갑자기 심장박동이 거세졌다.알 수 없는 희열이 날 덮쳤다.뭔가 갈구하고있다.원하고있다.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그런데 지금 그것이 눈 앞에 있다.나는 그렇게.그렇게ㅡ
내가 원하던 것을 구경태의 죽음으로.순간적인 충동으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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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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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던 세상에서 제일 거대한 것을 나는 가졌다.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음ㅡ뭐랄까.순간의 자유를 위해 남은 인생을 버리는 것?뭐.그렇다고 해두자.어차피
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만큼 용기가 많은 것도 아니니까.
자살ㅡ순간의 자유.무료함.더 이상의 미련따위.인간의 본능의 까마득한 바닥에 붙어있는 작은 기생충.
"너 어제도 숙제 안 해왔잖아.안그래?맞지?"
"어젠 가족끼리 어디 갔다왔다고 말씀 드렸잖아요.선생님이 부탁하신거
안사와서 그러시는 거에요?"
"시끄러!버릇없이 누가 말대꾸 하래!건방진게!너 진짜 혼나볼래?어?!"
"전 어제 이유는 타당하니까 말씀 드린거에요.왜 여기서 버릇이ㅡ"
그저 자신이 불리해지면 어른임을 내세워 아이를 나쁘게 만들어버리는 어른들.
난 엄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특히 공부가 최고인 엄마에게 숙제를 안 해간것은 미친 짓이였다.그렇게 두들겨 맞고 난 찔찔 울
면서 밤까지 숙제를 해 겨우밀린 숙제를 다 할 수 있었다.
공부가 최고인 엄마와 현실.
"경태가.죽었어.흐윽.경태가 죽었어 라을아ㅡ자살이래.아픈건 진짜 못 참는 놈이.그런 놈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대.
그 병신같은 놈이.구경태,구경태 그 놈이ㅡ"
자살.그리고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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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9.정라을 사망.
첫댓글 올. 상램이 글 져다잘쓰네
ㅋㅋㅋ고마어둥언니.아엠둥블리!
아 뭔가 슬퍼요............
슬픔이전해졌다면다행이에요ㅠ.ㅠ전혹시안될까봐덜덜감사합니다^.^
공감이 정말많이 가는 글인거 같네요 ... 잘읽구 갑니다
공감가서다행이에요~감사합니다^.^
우와-뭔가정말인상깊어요!잘읽었습니다!
네넵.인상깊었다니다행..감사합니다^.^
무섭다잉..........
글씨체가무섭징..
니 얼굴이 무섭다잉...
헉다소뮈언니..난현우가젤무셔
멋졌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살기 괴로워서 자살하는데… 정말 멋질 글입니다.
칭찬에북9북9ㅋㅋㅋ..감사합니다^.^
음..글이 정말 아름다워요 ^_' ~ 마지막 완전 짱임-
ㅜㅜㅜ전마지막이좀그럴까봐조마조마했는데..감사합니다^.^
꺅.... 제생일날 죽어 버렸어요 ㅠ 잘읽고 갑니다. 상램 씨 ㅋㅋ
헉덜덜..생일축하드려요~감사합니다^.^
오빠짱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