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세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작년에 썼던 기사
재작년 가을 국정원의 전 고위간부를 만났더니 피눈물을 씹는 듯한 말을 했다. 평생 대북(對北)공작 부서에서 근무한 그는 국내 정치엔 관여한 바가 없는데도 미국 내 김대중 비자금 중 일부가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 이를 추적하도록 지시한 것이 부당한 정치 간여라고 하여 구속 기소되어 실형을 살고 나온 사람이다. 옥중에서 병도 얻었다.
“잠이 안 옵니다. 저는 이재명이 당선되면 자유민주체제를 지킬 수 없다고 봅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나를 구속한 윤석열이지만 피눈물을 삼키면서도 그를 찍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실제로 윤석열 주도의 이른바 적폐 수사로 고초를 겪었던 전직 국정원 직원 상당수가 윤석열 지지운동을 벌였다. 작년 염돈재 전 국정원 제1차장은 언론 기고문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정원 학살’은 문명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참변이라면서 이렇게 정리했다.
〈서훈 국정원장은 취임 직후 적폐청산TF를 출범시켜 소위 ‘27개 의혹 사건’의 전면 조사에 들어갔다. 현직 257명, 전직 94명 등 351명이 검찰조사를 받았고 현직 7명, 전직 39명 등 46명이 재판을 받았다. 현재까지 38명이 유죄가 확정됐고 4명이 재판계류 중이며 4명은 무죄가 됐다.
이와는 별도로 500명이 넘는 직원이 마구잡이 감찰조사를 받았다. 그 큰 소동 끝에 ‘적폐 사건’ 연루가 확인돼 징계받은 직원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과거사 청산 작업에 협조한다면서 국정원 서버와 문서를 샅샅이 뒤져 부마항쟁 자료 132건 1447쪽, 5·18진상규명 자료 101건 6888쪽 및 영상자료 258건, 세월호 관련 자료 68만여 건을 마구잡이로 외부에 제공해 국정원에는 비밀이 없어졌다. 이제 국정원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네 국정원장에게 도합 징역 20여 년 선고!
정보기관에 비밀이 없다면 정보기관이 아니다. 국가정보기관의 서버를 샅샅이 뒤진다면 혁명 세력이 접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소동에 비해 ‘성과’는 미미했다.
학구파로 유명한 염돈재 전 성균관대 교수는, 전직 원장 4명에게 적용된 죄목과 형량을 보면 기가 막힌다고 표현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41개 혐의로 8년간 200회 넘게 재판을 받은 끝에 26개 혐의가 인정돼 총 14년2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대부분 혐의가 국정원법 위반 범주인데 개개 혐의를 살라미식으로 잘라 2018년 한 해 동안 모두 아홉 번 기소됐고, 나중 법원의 병합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8개의 재판이 동시에 열려 원 전 원장은 하루에 세 차례씩 각각 다른 법정을 오가며 재판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구속, 수사, 재판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원세훈 전 원장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대단한 정신력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전 원장은 국정원 특별활동비(특활비) 청와대 지원이 문제가 돼 특가법상 국고손실죄 등으로 각각 1년6개월, 3년, 3년6개월의 중형이 선고됐다. 네 국정원장에게 확정된 형량을 합치면 징역 20년이 넘는다. 연쇄살인범급이다.
공통적으로 적용된 국고손실죄는 법리적으로 무리가 많다. 국고손실죄는 회계관계직원에게만 적용되는 신분범(身分犯)인데, 국정원장은 회계관계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계관계직원등의책임에관한법률’에 규정된 직원의 범주에는 중앙관서의 장(長)은 포함돼 있지 않다. 국고금관리법에 의하면 회계관계직원은 반드시 재정보증에 가입해야 하나 국정원장들은 재정보증에 가입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중앙관서의 장을 회계관계직원으로 판단한 대법원 판례가 단 한 건도 없었다.
국고손실죄는 ‘국고손실’ 인식이 있어야 되는데 국정원장들은 그런 인식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특활비의 청와대 지원은 역대 정부에서 지속돼온 오랜 관행이고 예산 전용(轉用)은 정부 부처에서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부도 국정원 예산을 활용한 사례가 있다면서 이병기·이병호 원장은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라 언급했고, 박지원 국정원장도 인사청문회에서 똑같은 말을 했다.
문명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
1심에서 국고손실죄와 뇌물죄를 적용한 것과는 달리 항소심에서는 국고손실죄와 뇌물죄를 부인하고 형량이 훨씬 가벼운 횡령죄를 적용한 것도 국정원장을 회계관계직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은 그러나 국정원장이 회계관계직원이라고 최종 판단함으로써 중형을 받게 했다. 염돈재 전 차장은 이 점이 바로 국정원장 단죄의 정치적 의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장들에 대한 중형 선고가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적폐 청산을 합리화하고 국정원을 무력화하기 위한 억지춘향식 꿰맞추기가 아닌가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은 2013년의 윤석열 수사팀장은 국정원 직원들이 종북 성향 정치인의 반(反)국가적 언동을 비판한 댓글을 불법으로 판단했다. 여기서 파생된 수사가 결국 네 국정원장을 감옥으로 보냈고, 그 여파로 부각된 윤석열 검사는 문재인 정권 들어 승승장구하더니 조국 수사를 계기로 방향을 틀어 야당 대통령 후보로 변신, 당선되었다. 염돈재 전 차장은 이렇게 변호한다.
〈북한이 1000여 명의 댓글부대를 동원해 추진하고 있는 광우병·천안함·세월호 괴담 전파 등 사이버 심리전에 대처하기 위한 방어 심리전 활동을 하다가 소위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유 모(某) 단장의 경우 정치 관여성 댓글로 특정된 댓글이 총 2200여 건으로 전체 댓글의 0.0045%에 불과하고 정치 관여성 댓글에 투입된 예산도 총 10만원 정도인데 국고손실죄로 1년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김 모 국장은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단한 단체 간부의 동향 수집을 했는데 불법사찰로 7개월 실형이 선고됐다. 다른 김 모 국장은 해외 첩보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1억 달러 대북(對北)송금설 확인 활동을 했다가 2년 형이 선고됐다. 《월간조선》에 의하면 문제의 비자금 의혹은 10억 달러가 넘는 규모이고 미국 FBI도 내사 중이던 사건이었다. 염 전 차장은 “이런 정보 활동은 세계 어느 정보기관이든 추진하는 가장 기본적인 업무인데 이를 불법사찰이라 한다면 정보기관은 무슨 일을 하라는 것이며 국가 안보와 국가 이익은 어떻게 지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네 국정원장은 애국자!
대법원 판결대로 최고 정보기관 수장(首長)들이 대통령에게 불법자금을 바쳤다가 4명이 동시에 감옥에 갔다는 것은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참사이고 형편없는 후진국이나 3류 정보기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런 정보기관과 외국의 전통 있는 정보기관이 협력하려 할 것인가?
염돈재 전 차장은 윤석열 정부에 주문한다.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적폐 청산의 진실을 알리고, 각국 언론과 정보기관 파일에 입력돼 있는 잘못된 기록들을 수정하여 바닥에 떨어진 대한민국의 국격(國格)과 국정원과 전·현직들의 명예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정보기관은 절취, 유인, 기만, 흑색선전, 암살, 테러 등 ‘더러운 일(dirty work)’을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조직이다. 정보기관이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 이들이 국가를 위해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더러운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염돈재씨는 네 국정원장을 애국자라고 했다.
김정은과 싸운 게 죄?
나는 52년째 기자 생활을 하면서 깊게 취재를 하다 보니 정보가 많은 정보부, 안기부, 국정원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 정보부(안기부)에 세 번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세 번 신문사에서 해직된 기록도 남겼다. 세상이 민주화되니 나를 조사했던 국정원 직원들과 친해졌다. 북한노동당 정권이 공통의 적이 되니 서로가 편해진 것이다. 수감되었던 네 국정원장은 취재 과정에서 익히 알게 된 분들이고 이들에 대한 나의 평가도 염돈재 전 차장과 같다.
그들의 공통점은 애국자이고, 반공전사(反共戰士)란 점이다. 모두 우직한 모범 공무원이었다. 그들의 형량만 보면 살인이나 강도라도 저지른 것 같은데 네 사람 다 자나 깨나 나라를 걱정했던 분들임을 기자의 양심으로 증언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국정원 전직이 그런 사람들이다. 간첩을 잡는 일은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린다. 큰 공장을 짓는 것보다 더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미국 CIA의 부훈(部訓)이 “익명(匿名)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인데 이런 정보맨들은 언론이 알아주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국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사건의 판사라면 국정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국고손질죄 등의 혐의에 대하여 다 무죄를 선고하고 훈장을 주라고 권했을 것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국정원의 역량을 동원, 김일성 세력 및 그들과 연계된 종북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이 감옥에 간 근본 이유는 김일성주의 운동권(주사파)에 장악된 문재인 정권에 깃든 김일성의 악령이 작용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문재인 치하 검찰과 법원은 촛불정신이나 적폐 청산이란 미명으로 내리누르는 정치권력에 저항할 용기가 없었거나 부화뇌동하여 출세를 노렸을 것이다. 김정은 정권하에서도 모범적으로 열심히 일할 준비를 갖춘 법률 기술자들이 많다. 김대중 비자금 추적 사건 재판을 방청한 적이 있다. 재판장은 국정원이 입수한 김대중 비자금 13억 달러 의혹의 사실 여부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추적 작업에 쓰인 예산이 국정원 내부규정에 위반되는지의 여부만 따지겠다고 공언했다. 징계처분 정도로 그쳐야지 왜 감옥에 보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국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든 세력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들이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이게 정의구현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