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653
■ 2부 장강의 영웅들 (309)
제10권 오월춘추
제 39장 미인 서시(西施) (4)
제도공(齊悼公)은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반대파 대신들을 죽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제경공 시절을 그리워하며 제도공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찬 백성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이다.
BC 487년(제도공 2년, 오왕 부차 9년). 마침 적당한 빌미가 생겼다.
이웃인 노(魯)나라가 주(邾)나라를 침공한 것이었다. 주나라는 제나라의 동맹국이자
제도공의 여동생이 시집간 나라다.제도공(齊悼公)은 노애공이 주나라를 쳐
임금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에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
"노(魯)나라가 나의 매제인 주(邾)나라 임금을 잡아 감금했다는 것은 우리 제나라를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노나라를 쳐서 복수하리라!"
그런데 제경공이 죽은 이후 제(齊)나라 군사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단독으로 노(魯)나라를 쳐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 무렵, 중원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나라는
오(吳)나라였다제도공(齊悼公)은 오왕 부차에게 사신을 보냈다.
- 함께 노나라를 쳐 땅을 나누어 가집시다.오왕 부차(夫差)는 월나라를 쳐 속국으로 삼은 뒤
기고만장해 있었다. 천하에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도공의 청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 내가 전부터 산동 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기회가 왔구나.
그 해 여름, 부차(夫差)는 노나라에서 망명해온 공산불뉴(公山不狃)를 길 안내자로 삼아
노(魯)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공산불뉴는 노(魯)나라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그는 오군(吳軍)을 안내하면서 전날 자신을 핍박했던 땅에 이르러서는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약탈하고 살육했다.이에 맞추어 제도공(齊悼公)도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 땅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노(魯)나라 동쪽 일대의 땅을 빼앗았다.
제. 오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기겁한 것은 노애공이었다.노애공(魯哀公)은 자신의 힘으로
제ㆍ오 연합군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재빨리 사자를 보내어 제도공에게 화해를 청했다.
"이미 주(邾)나라 임금을 석방하여 돌려보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주나라를 괴롭히지
않을 터이니, 제공(齊公)께서는 그만 화를 푸시고 군사를 물려주십시오."
제도공(齊悼公)도 오랫동안 군사를 밖으로 내면 국내에 변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노(魯)나라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빼앗은 땅을 돌려준 후 노애공과 화해했다.
아울러 대부 공맹작(公孟綽)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어 말했다.
"우리는 이미 노나라와 화해했으니, 오(吳)나라는 더 이상 수고스럽게 노나라를 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같은 제도공의 변덕에 부차(夫差)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공맹작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었다."우리 오(吳)나라가 제나라 뜻에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줄 아느냐?"이때는 이미 해가 바뀌어 BC 486년이 되었다.
부차(夫差)는 노나라에 나가 있는 군대를 소환하기는 했으나 제나라에 대해
몹시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그 해 가을철에 부차는 한(邗) 땅에 성을 쌓고
장강과 회수를 연결하는 운하를 뚫었다. 언제든지 뱃길로 제나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한(邗) 땅은 오늘날 안휘성 양주 땅이다.한편, 노애공(魯哀公)은 오왕 부차가 제나라에 대해
화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 자기 나라를 쳤던 제도공에 대해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오(吳)나라와 연합하여 제(齊)나라를 치자!'
이렇게 마음먹은 노애공은 사자를 오나라로 보내어 연합을 청했다.
부차로서는 기다리던 일이었다.이듬해인 BC 485년 정월,
마침내 오. 노 연합군은 각각 서쪽과 남쪽 길을 통해 제(齊)나라 땅으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담(郯)나라 군사까지 가세했다.부차(夫差)는 눈 깜짝할 사이 제나라 남쪽 땅인
식(鄎) 땅을 점령하고 그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이 바람에 제(齊)나라는 큰 분란에 휘말렸다.
제도공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 우리 임금이 공연히 오(吳)나라와 노(魯)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이 모든게 주공의 책임이다.
이때 진걸(陳乞)은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고, 제나라 정권은 그 아들 진상(陳常)이
물려받고 있었다. 진상은 백성들의 원망을 잘 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기마저
돌팔매의 대상이 될 것 같았다.
진상(陳常)은 포목의 뒤를 이어 포씨 당주가 된 포식에게 접근하여 은밀히 사주했다.
"오늘의 화란(禍亂)은 모두 주공이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나라안이
전쟁으로 어지러우니, 이 기회에 주공을 죽여 오(吳)나라의 오해를 풀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합시다.
주공을 죽이는 일은 그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하오."
포식(鮑息)은 진상이 자기를 이용해 제도공을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소."
제도공이 아무리 폭군이라고는 하지만 포숙 이래 대대로 제(齊)나라 은혜를 받아온
명문가 후손으로서 난신(亂臣) 대열에 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진상(陳常)은 머쓱했다.
"그대가 못 하겠다면, 내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임금을 없애겠소."
며칠 후였다.
제도공(齊悼公)은 성밖으로 나가 싸움터로 나가는 군사들을 사열한 후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진상이 제도공을 위로한다는 핑계로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그 술에는 무서운 짐독(鴆毒)이 들어 있었다. 제도공은 술을 받아마신지 한식경이 못 되어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죽었다.
진상(陳常)은 오왕 부차에게 사람을 보내 지난날의 일을 사죄했다.
- 우리 주공께서 급살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해의 일은 오로지 선군(先君)의
독단이었습니다. 이제 그 선군도 죽었으니, 오왕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종묘사직만이라도
보존케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제(齊)나라는 은혜를 잊지 않고 대대로 오나라를 섬기며
우호를 다지겠습니다.
오왕 부차(夫差)는 제도공이 죽은데다가 항복이나 다름없는 화해를 청해오자 크게 만족했다.
영채 밖으로 나가 제도공의 죽음을 애도하는 척하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노(魯)나라도 군대를 철수시켰다.제(齊)나라 백성들은 제도공이 독살당한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그 일을 따지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기뻐했다. 그만큼 제도공(齊悼公)은 대부들과
백성들에게서 인심을 잃고 있었다.
오군(吳軍)이 회군하자 진상(陳常)은 제도공의 아들 공자 임(任)을 받들어 군위에 세웠다.
그가 제간공(齊簡公)이다.제간공은 군위에 오르자마자 진상(陳常)을 우상에 임명하고
함지(鬫止)를 좌상에 올렸다.그해 3월의 일이었다.
654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654
■ 2부 장강의 영웅들 (310)
제10권 오월춘추
제 39장 미인 서시(西施) (5)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시(西施)와 정단(鄭旦) 역시 범려의 집에 머물며 3년 동안 노래와 춤과 온갖 재주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들이 주렴을 두리운 비단 수레를 타고 거리로 나가면 온 성안에 향기가 가득 차는 듯했다.
마침내 범려(范蠡)는 서시와 정단을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월왕 구천에게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아.................!"구천(句踐)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할말을 잃었다.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어찌 이렇게 고운 여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구천(句踐)은 첫눈에 서시와 정단에게 반했다.'아깝도다.'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이 두 미인을 데리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원수인 부차에게 내주기가 아까웠다.하지만 범려(范蠡)는 냉정했다.
그는 구천의 마음을 짐작한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吳)나라가 멸망하는 날 왕께서는 이 같은 미인을 백 명, 천 명 데리고 살 수 있습니다."
구천(句踐)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얼른 변명을 했다.
"과인이 어찌 지난날의 치욕을 잊을 리 있겠소? 이번 미인계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오."
그러고는 궁중 여인인 선파(旋波), 이광(移光) 등 여섯 여인을 서시와 정단의 몸종으로 붙여주었다.
BC 485년(월왕 구천 12년) 5월.
월나라 재상 범려(范蠡)는 서시와 정단을 데리고 오나라로 건너갔다.
오나라 궁궐로 든 범려는 부차에게 절을 올린 후 월왕 구천의 말을 전했다.
"동해의 천신(賤臣) 구천은 먼저 제(齊)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신 왕의 노고를 치하드립니다.
신은 늘 태산과 같은 성은을 입으면서도 직접 왕을 모시지 못하는것이 한(恨)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미인 둘을 뽑아 왕께 보내오니 곁에 두시고 부리시기 바랍니다."
부차(夫差)는 전에도 월나라로부터 여러 미인들을 받아온 터였기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범려(范蠡)가 불러들인 두 여인을 보는 순간 그는 이미 예전의 부차가 아니었다.
눈빛부터가 달라졌다."음.............!"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있을까.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의 모습은 천상의 선녀 한 쌍이 하강한 듯했다.
그는 정신이 몽롱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자리에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오자서도 있었다.
그는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월나라가 미인계를 쓰고 있음을 알아챘다.
재빨리 일어나 간(諫)했다."왕께서는 두 여인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사치는
천화(千禍)의 근원이요, 음란은 만재(萬災)의 근원이라 하였습니다. 구천이 왕에게 두 미인을
바치는 것은 왕의 마음을 어지럽히려는 수작입니다. 당장 월(越)나라로 돌려보내십시오."
오자서의 말에 범려(范蠡)는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여차하면 몇 년 동안 공들였던 계책이 무너질 판이었다.
그때 부차(夫差)가 오자서에게 대답했다."영웅은 호색이오. 미인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진인데, 구천(句踐)이 저런 미인을 자기 곁에 두지 않고 나에게 바쳤으니
그 충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소. 재상은 공연히 남을 의심하지 마오."
범려를 의식해서인지 한껏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불쾌한 기색이 숨겨져 있음을 범려(范蠡)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가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 날부터 오왕 부차(夫差)는 서시(西施)와 정단(鄭旦)를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두 여인 모두 빼어났으나 요염하고 비위를 잘 맞추기는
정단보다 서시가 월등했다. 차츰 서시(西施)가 부차의 곁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그녀는 단순한 미인이 아니었다.
범려가 철저하게 훈련시킨 간자(間者)였다.그녀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서시(西施)가 부차에게 속삭였다."듣자하니 왕께서는 고소산에 아름다운 궁궐을
짓는다고 하였는데, 신첩은 언제쯤 그 궁궐을 구경할 수 있을는지요?"
그 무렵 고소대(姑蘇臺)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죽고 상하는 인부가 많아 공사가 조금씩 지연되고 있었다.
부차(夫差)는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귀여운 서시(西施)가 고소대를
보고 싶어하자 태재 백비를 불러 명했다."고소대 공사가 어찌 늦어지는가.
회계산에 주둔시켜 놓은 왕손웅(王孫雄)의 군사 3천 명을 불러들여 고소대 짓는 일에 투입하라!"
부차(夫差)는 월(越)나라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회계산에다 군사 3천 명을
주둔시켜 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서시(西施)가 고소대를 빨리 보고 싶어하자
그 군대를 거두어들여 노역부로 대용하게 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자서(伍子胥)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비분과 울화가 극도에 달했다.
그는 그 길로 궁으로 달려가 피를 토하듯 간언했다.
"어떻게 국경 수비의 군사를 노역부로 쓸 수가 있습니까? 무릇 군대란 나라를 지키는
간성(干城)입니다. 한시도 태만해서는 안 되는 터에 오히려 그들을 노역으로 전용하시니
이는 진실로 스스로 오(吳)나라를 멸하는 짓일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구천(句踐)이 서시와 정단을 보낸 것은 왕을 음란의 세계로 빠뜨리려는
수작입니다. 왕께서 서시와 정단을 옆에 끼고 향략에 빠져 계실 때 구천은 월나라를 강하게
키우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속히 고소대(姑蘇臺) 공사를 중지하시고,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구천에게로 돌려보내십시오."
하지만 부차(夫差)는 이미 오자서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오자서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태재 백비에게 명했다.
"한 달 이내에 고소대 공사를 마무리지으라."오자서(伍子胥)는 통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65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