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설계도를 원하는 대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 유전자의 치료는 물론이거니와, 키, 눈 색깔, 피부색 등의 외관, 심지어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 등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탄생 전에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 수정란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에 관한 찬반 논란이 작년부터 더 뜨거워지고 있다.
찬성 측은 유전자 질환 환자의 이익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반대 측은 유전자 가위 기술의 안전성을 문제로 삼는다. 배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제기도 있다. 아직 인간 배아와 태아의 유전자 치료가 금지된 국내 실정에서 위의 논점들은 시급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조건 금지만 하기에는 유전자 가위의 경제적, 과학적, 사회적 여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예컨대, 20세기 초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한 지점은 핵폭탄과 핵발전소였다. 위험한 것은 무조건 만들면 안 된다는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이미 개발 중이던 기술에 관해 눈을 가린들 기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단지, 핵물리학 연구가 도착할 지점이 핵폭탄과 핵발전소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더라면 역사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 편집이란, 유전자를 편집하여 인간을 원하는 대로 설계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줄리언 사블레스쿠 교수와 같은 이들은 생명공학을 도입해 인간을 향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은 기계와 인간의 결합, 즉 유전학을 통한 인간의 변화가 가져올 ‘인간 다음의 인간’을 말한다. 유전자 편집의 측면에선 아마도 인간의 육체적, 지적 능력의 개선을 통한 더 나은 인간의 탄생을 말할 것이다.
아직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서 포스트휴먼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의 향상 등 인간의 단점을 넘어서기 위한 기술 활용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유전자 편집으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 인간의 부족함을 덜어내고 더 낫게 만드는 것일까.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 <가타카>가 물었던 것처럼 삶의 가치에 대한 고민 때문일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은, 과연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는 조건으로 결정되는 걸까?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센델 교수는 <완벽에 대한 반론>이라는 책에서 인간 향상론을 반대하며 그 근거로 “삶은 선물”이라는 오랜 표현을 끌어들인다. 유전자 편집은 질병 치료를 위해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삶은 더는 인간에게 선물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삶에 존재하는 의외성 때문에 삶은 선물일 수 있다. 만약, 그 조건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의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아름은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며 조로증이라는 희소 질환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시간을 역전시킨다. 우린 때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쉴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보다 힘든 사람의 삶을 보면서 위안을 느끼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선물이 될 수도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삶이 선물’이라는 말은 그 안이 행복으로, 누릴 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일지라도, 인간은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삶은 선물일 수 있다.
유전자 편집이 새 생명에게 모든 조건을 결정하게 된다면, 조건을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없어진다. 아름이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보여준 것처럼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 삶은 선물이다. 그렇다고 고통과 어려움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편집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고, 삶의 가치를 위한 수단의 자리에서 계속 연구되어야 한다.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유전자 편집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숙의를 거듭할 때다.(김준혁 치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