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내게로 왔다
유 정
열대야가 데리고 온 걸까. 놓쳐버린 잠은 창밖으로 달아난 지 오래, 심야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안 되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 휘파람을 불고 있다. 기타 줄 하나를 튕기듯 짧고 섬세하게 울리다가 툭 멈추고 다시 휘리릭 입술을 오므려 바람을 휘감는다. 떠나간 사랑의 찬 이마를 떠올리며 밤을 지새우는 어느 연인의 빈 가슴으로 날아가 청량한 기운이라도 채워주고 싶은 걸까. 안단테로 연주하는 천상의 선율이 정갈하고 투명하게 숲 언저리를 어루만진다.
휘파람은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이파리 사이를 넘나들며 시간이 지날수록 청아하고 긴 여운을 은가루처럼 흩뿌려 놓는다. 밤을 반납한 내가 허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올려다본다. 휘파람은 벌써 낯선 나무의 빨간 열매를 지나고 있다. 작은 새의 목청이 댓잎을 건너온 바람을 닮았다. 상큼하게 스며오는 새벽이 청록의 바람으로 숲을 꽉 채운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만 새 한 마리가 열기로 후끈거리던 밤의 적막을 서늘히 식혀 주고 나면 주춤주춤 앞치마를 두른 아침이 창 안으로 들어온다. 서둘러 밥솥에 쌀을 안치고 돌아서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율무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볼을 쓸어안고 흔들며 아침 인사를 나눈다. 작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율무를 보면 이 생각 저 생각에 숙면하지 못하고 뒤척이던 마음의 갈피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11월의 나무처럼 바스락대며 기울어가던 내 몸의 중심을 잡아 주고 헛헛한 가슴을 생기로 채워주고 있는 게 강아지 율무다. 강아지와 사랑의 교감이라니 전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삶이다.
지난겨울, 불현듯 강아지 율무가 내게로 왔다. 딸로부터 사진 몇 장이 카톡으로 날아오고 열흘도 되지 않아서다. 회사 지인이 키우던 강아지가 애완견이 금지된 오피스텔로 이사를 가게 되어 부득이 입양할 사람을 구한다는 거였다. 보내온 사진은 곰돌이 푸처럼 생긴 세 살 된 푸들이었다. 살짝 마음의 동요가 일었지만 ‘절대’라는 말을 강조하며 단호하게 잘랐다. 며칠 동안 딸의 애원과 설득으로 동요 되던 내 마음이 올가미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입양이 결정되고부터 조용하던 가족 단톡방은 강아지 새 이름을 짓는 문제로 하루 종일 소란스럽더니 털 색깔이 율무차 빛깔과 똑같다는 의견 일치로 율무라는 이름이 결정되었다. 강아지가 오기로 한 날, 마음이 산란했다. 괜히 허락했나 싶어 불안하기도 하고 한 편으론 은근히 빨리 만나고 싶어 기다려지기도 했다.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잠깐 마음이 무거워 지기도 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뚫고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율무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그 작은 생명이 우리 가족의 일상을 은사시나무의 이파리처럼 눈부시게 바꿔 놓았다.
4.7킬로 크림 푸들 강아지 율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휘파람새의 여린 노래가 고층 아파트 곳곳에 스며들어 무더위에 지친 새벽을 신선하게 깨우듯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는 생기로움은 놀라웠다. 다 자란 아들과 딸은 어릴 때와 달리 말수가 줄어 가족 간의 대화가 빈곤해진 터였다. 바쁜 직장 생활로 얼굴 보기도 힘들 때가 있어 집안에 정적이 일었다. 간혹 스트레스를 받고 들어 온 날은 찬바람이 돌아 말 붙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율무가 오고부터 모두가 달라졌다. 행여 밖에서 기분 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와 율무를 보면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사람이 있어도 텅 빈 것 같은 허허롭던 공간이 갑자기 활기로 가득 차고 나른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연둣빛으로 반짝거렸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밖에 나가면 율무의 안부가 궁금해 단톡방 문을 수시로 두드린다. 화가 났다가도 율무를 보면 말이 부드러워지면서 스르르 풀린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무릎까지 타고 올라와 반기는 율무를 보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율무가 주는 사랑의 에너지가 집안을 꽉 채우고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강아지를 쓰다듬고 안아주면 사람의 뇌에서 사랑의 물질이 나온다는 의학적 보고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황무지로 변하고 있던 내 의식에 다시 새순이 움트고 꽃이 피고 있는 건 확실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강아지를 사랑하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은 남은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살라고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라는 어휘를 써가며 반대했던 내가 새벽에 일어나 율무를 데리고 아파트 숲을 산책한다. 아침잠이 많았지만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율무와의 산책은 내게 새로운 일상이고 즐거움이다, 씻기고 닦고 치우는 일이 하나도 귀찮지 않은 나의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채워지고 있다.
뻐꾸기가 다섯 번을 울고 들어간 지 30분이 지났다. 목줄을 채우고 신발을 신는 사이 율무는 벌써 두 발로 서서 현관문을 밀고 있다. 새벽 다섯 시 반의 공기는 경쾌하다. 아파트 뒤뜰을 한 바퀴 돈다. 감나무 자두나무 대추나무가 서 있는 산책길은 하루 종일 그늘이 살고 있다. 여름엔 초록 향으로 가을이면 우수수 이파리들을 떨어내며 엉클어진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주기도 하고 푸른 너울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계절마다 변화하는 이 자연의 신비 속으로 강아지 율무가 들어왔다.
율무와 함께 나무 의자에 앉아 키 큰 나무를 올려다본다. 어둠 속에서 휘파람으로 청청한 새벽을 깨우던 작고 여린 휘파람새의 여운을 더듬는다. 새가 날고 나무들이 부스스 잠을 털고 일어난다. 율무와 함께 다시 걷는다. 생글거리는 하루가 가만히 내게로 걸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