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 시내의 무후사, 두보초당 등 문화재를 돌아보며>
오늘은 청두(成都) 시내에 있는 무후사, 청양궁, 두보초당 및 문수원 등 문화재를 돌아보려고 했다. 저녁에는 문화공원 안에 있는 건물에서 공연하는 쓰촨 오페라, 천극 "촉풍아운(蜀風雅韻)”을 볼 예정이다. 오늘 볼거리는 모두 청두 시내에 있기 때문에 아침 8시에 숙소를 출발하기로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같이 가는 4명이 일찍 나오는 바람에 20분 빨리 출발했다.
우리는 숙소 직원이 알려준 대로 고가도로를 건너 왼쪽으로 직진하다, 사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1번 버스를 타는 정류장으로 갔다. 당초에는 숙소에서 가까운 “문수원”부터 보려고 했으나, 버스가 “무후사”를 지나가는 것을 알고 그곳을 먼저 갔다. 버스비가 1위엔 인 줄 알았더니, 이 버스는 차량 2대를 연결한 것이라 2위엔이었다.
"무후사(武候祠우허우쯔)”는 “삼국지연의(三國地演義)” 주인공인 유비(劉備) 현덕(玄德)과 그의 가신들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명칭은 “한소열뵤(漢昭烈墓)"이다. 청건 시기는 정확치 않으나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하며, 14세기에 이르러 유비(劉備)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사당이 합쳐져 무후사(武候祠)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군과 신하가 같이 모셔진 사당은 중국에서도 무후사가 유일했다.
만 69세 이하인 3명은 입장료 반값(60위엔 중 30위엔)을 내고 들어갔고, 1명은 70세 이상이라 무료로 들어갔다. 정문 현판은 “곽말야”가 행서로 쓴 것이란다. 입구의 정문을 들어가자 뜰이 있는데, 오른쪽엔 당비(唐碑)가, 왼쪽엔 명비(明碑)가 있었다. 그 중 당비는 글씨, 문장, 조각 모두 뛰어나서 삼절(三絶)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두 번째 문 안에의 소열사(유비사당)에는 유비를 중심으로 왼쪽에 관우(關羽), 오른쪽에 장비(張飛)가 있고, 관우 상 옆에 유비의 가족상이 있었다. 사당 앞 회랑에는 문을 들어가면서 오른쪽에 유비의 문신들 상이 있는 문신랑(文臣廊)과 왼쪽에 그 때의 무신들 상이 늘어서 있는 무장랑(武將廊)을 보았다.
무장랑 입구에는 재갈공명이 위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주군인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가, 문신랑 입구에는 “후 출사표(後出師表)”가 걸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특히 출사표 전. 후편은 남송 충신 “악비(岳飛)”가 초서체로 쓴 것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모시는 무후사(武候祠)는 한소열사(漢紹烈祠) 안쪽에 있는 데, 가신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한소열사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었다. 이상하게 제갈공명 상 옆에는 아들이 아니라, 그의 손자 상이 있었다.
한소열사(漢紹烈祠) 왼쪽 뒤편의 붉은 벽을 따라가니, 유비의 능인 "혜릉(惠陵)"이 있었다. 왕이기 때문이겠지만 작은 산 하나가 능이었다. 능위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한 바퀴 도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무후사 뒤편에는 전시관이 있어 촉, 위, 오 삼국시대의 전쟁 상황과 그 시대 전쟁지도 및 촉의 의형제(3명)가 사용하던 무기를 든 상이 진열되었다. 제일 뒤(남쪽) 건물은 “삼의묘”였으며, 그 앞에는 도원결의를 한 3명의 형제 상이 있었다.
무후사를 나와 바로 오른편에 있는 금리(錦里진리)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삼국시대 저자거리를 재현해 놓은 풍물거리로 가게가 오밀조밀하게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옛 풍물부터 커피전문점까지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울려진 멋진 곳이었다. 우리는 진리를 돌아보고 입구에 있는 분식집에서 국수와 만두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많던 택시 중에 빈차로 오는 것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청양궁으로 갔다. 그러나 택시기사가 ‘다 왔다고 내리라.’고 한 곳은 목적지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현지인에게 물으며 300m 이상 걸어가서 만69세 이하 3명은 입장료 5위엔을 주고(만70세 이상은 무료) 안으로 들어갔다.
“청양궁(靑羊宮칭양궁)"은 도교(道敎)의 발상지로, 성도(成都청두)에서 가장 큰 도교사원이다. 칭양궁은 ‘도교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파란색 양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갔다.’는 고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청대에 재건된 것이고, 경내에는 팔괘정(八卦亭), 삼청전(三淸殿) 같은 주요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특히 노자 옆에 서 있는 동상들이 모두 칼을 메고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였다.
삼청전(三淸殿) 옆에 있는 기묘한 동물상은 12지상을 나타내는 동물의 각 부위를 가지고 있는 전설의 동물로 만지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어, 이 동물은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팔괘정(八卦亭)은 중심에 있는 건물로 도교 이론인 음양오행과 팔괘를 건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각형의 기반 위에 여덟 마리의 용이 떠받들고 있는 팔각형의 지붕과 돔 형태의 천정은 도교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어서 두보초당을 택시를 타고 갔다. 두보는 당나라 때 시인으로 수도인 “장안(長安, 현재 西安)”에 온지 10년 만에 하급관리를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현종과 양귀비를 쫓아내려는 “안사의 난”이 발생했다. 두보는 처자와 함께 장안(長安)을 탈출해 청두(成都)로 왔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759~763)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서 240편 이상의 시를 지은 암자로 “두보초당(杜甫草堂두푸차오탕)”이라고 한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육로, 철도, 비행기 등이 쓰촨성 청두(成都)를 왕래하나, 전에는 오지이며 험새(險塞)로 다니기 불편했다.
그가 살던 “모옥고가(茅屋古家)”는 복원한 것으로 북송 때 사당이 지어졌고, 청대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규모(20만㎡)의 공원이 만들어져 대나무와 동백나무 등이 울창했다. 그의 시는 “시사당(詩史堂)”을 중심으로 “추천성시(秋千聖詩)”가 석조와 목조로 판각되어 회랑을 따라 늘어섰고, 서예가들이 다양한 서체로 쓴 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초당 곳곳에는 두보의 두상이나 전신 동상이 있었는데, 그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인이라 예민한 탓인지는 잘 몰라도 몸이 마른 편이었다. 특히 이백 등 여러 시인들과 서로 시를 지어주며 즐긴 흔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후사와 청양궁은 나이 드신 분이 많은데 비하여, 이곳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아마 넓은 자연과 마주하며 시와 접할 수 있고, 의자가 여러 곳에 있어 조용하게 연인들이 대화를 나누기가 좋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중요한 곳만 짚어보고 두보초당을 나와 택시로 문수원(입장료 없음)을 찾았다. “문수원(文殊院원슈웬)"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선종불교사원으로 남북조시대인 수나라 때 창건됐다. 그 후 수차례 소실과 중건과정을 거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청의 강희황제 때 중건된 것이다.
사원은 남북방향으로 조성돼 있는데, 입구를 들어가니 천왕전(天王殿), 삼대사전(三大士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설법당(說法堂)이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이 사원은 전형적인 청대의 건축양식이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 중에는 불경을 구하러 목숨을 걸고 인도에 다녀온 당나라의 “현장”법사도 있으며, 그의 유골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입구 오른쪽에 금종(金鐘)이 왼쪽에는 법고(法鼓)가 있으며, 법고 뒤로 돌아서 10분정도가자 “문수각(文殊閣)”이 있었다. 그곳에는 승려와 함께 밤색 법복을 입은 신도들이 법당을 돌며 목탁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불공시간이었다. 불공을 드리는 신도가 많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청두(成都)의 문화재 관람을 마치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14:30). 17시에 일행과 만나기로 했으므로 아직 시간이 많았다. 목이 컬컬하여 무엇인가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부부 중의 한명이 맥주를 4캔 사가지고 왔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니 그동안의 모든 피로가 싹 가셨다. 나는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일정을 정리했다.
오늘 저녁에 일행 대부분이 19시에 “천극”을 보러 문화공원으로 가기 때문에 17시에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운영자와 서울에서 온 부부를 제외하고, 6명이 공연하는 회사에서 보낸 차를 타고 문화공원으로 갔다. 우리는 19시30분에 문화공원에 있는 공연장에 들어갔다. 자리는 앞뒤로 딱 중간인데, 옆으로도 중앙이어서 전체적으로 한 복판이었다. 우리는 공연장에서 주는 차와 만두 국을 먹으면서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은 20시10분에 시작해서 21시40분에 끝났다. 딱 1시간30분간 7막을 공연했다. 제1막은 악기를 불거나 두드리는 악단들이 모두 나와서 각자 연주를 하고 자리에 가자, 젊은 남자들이 나와 공중돌기 등 고난도의 체조를 했다.
제2막은 여러 명이 나왔으나, 여자가 주인공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춤을 추거나 합창단 역할을 했다. 제3막은 삼국지의 내용 일부를 오페라 식으로 공연했다. 촉의 제갈공명이 공작부채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나자, 위의 사마중달이 노래를 불러 화답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제갈공명이 빈 성에서 혼자 거문고를 켜면, 사마중달이 틀림없이 제갈공명이 계략을 쓸 것으로 짐작하고 물러간다는 “공성계(空城計)”였다.
제4막은 우리의 고전악기인 릴리리와 같은 중국 고유 악기로 독주를 했는데, 하나의 악기로 여러 곡을 부르며 다양한 소리를 내서 관중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제5막은 여자 한 사람이 장막에 들어가 손으로 그림자극을 하는 공연이었다. 오직 손으로 여러 가지 새와 그들이 우는 모습 등을 만드는데, 너무 비슷해서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제6막은 남녀가 하는 코미디 형식으로, 여자는 무대 뒤에서 나오고, 남자는 관중석에서 출현했다. 이것은 은근히 여성상위시대를 풍자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시키면 남자는 처음에는 안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남자는 불을 머리에 이고 의자 밑으로 기어 나오는 등의 연기를 했다.
제7막은 사천성 오페라의 하이라이트인 “변극”이었다. 여러 명이 나와 악단의 장단에 맞춰 부채를 들고 얼굴에 쓴 탈을 손도 대지 않고 변하게 하는 것이었다.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변극을 했는데, 한 공연자는 관중석에 와서 얼굴에 쓴 가면은 물론 입은 옷까지 변하게 했다.
베이징(北京)에 “경극”이 있듯이 쓰촨(四川)의 청두에는 “천극”이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천극이 재미있고 더 즐거웠다. 우리는 공연이 끝난 후, 문화공원에 올 때 타고 온 차로 숙소에 돌아왔다(22:20).
첫댓글 청두가 사천성의 성도(省都)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비의 묘, 두보초당, 무수원, 청양궁, 천극 등 문학, 종교, 예술의 고도(古都)라는 생각이 드네요. 꼭 한번 방문해야 되겠습니다. 상세히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 청두는 쓰찬성에서 제일 큰 도시지요.
시간 나시는대로 꼭 한 번 찾아보는 것이 좋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