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열사(寄無說師)
무열스님께
김제안(金齊顔, ? ~ 1368)
세상일 옳다 그르다 시비가 분분하다
십 년간 벼슬살이에 내 옷만 더럽혔다오
봄바람 속에 지는 꽃 울어 예는 새들과
어느 산중에서 그대는 홀로 살고 계시는가
世事紛紛是與非(세사분분시여비)
十年塵土汚人衣(십년진토오인의)
落花啼鳥春風裏(낙화제조춘풍리)
何處靑山獨掩扉(하처청산독엄비)
이 세상이 온통 시비를 가리는 일로 어지럽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목소리
를 높이며, 온갖 궤변과 술수가 날뛰는 세상이다. 지은이는 10여 년의 벼슬살이
에 자신의 옷만 더럽혔다고 고백한다. 활짝 피웠던 꽃도 바람에 시들어 떨어지
닷 덧없는 세상인데 이런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서 스님이 더
욱 보고 싶어졌단다. 깊은 산속에 홀로 숨어 살며 속세의 티끌을 모두 끊고 도
를 닦고 있는 무열 스님이 부럽다고 말한다. 김제안은 고려 말기 강직한 선비로
서 요승 신돈을 죽이려다 오히려 신돈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열 스님 같은 구도
자도 소중하지만, 현실 세상의 시비를 가릴 김제안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
[작가소개]
김제안[金齊顔]
자 : 중현(仲顯)
시대 : 고려
출생 – 사망 : 미상 ~ 1368년(공민왕 17)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안동(安東)
대표관직(경력) : 군부좌랑, 내서사인, 전교부령
<정의>
고려후기 군부좌랑, 내서사인, 전교부령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현(仲賢). 김방경(金方慶)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며,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지낸 김구용(金九容)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과거에 급제해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364년(공민왕 13)에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내수(內竪) 한휘(韓暉)와 이구수(李龜壽)가 변방의 공으로 자급을 뛰어넘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발탁되자 기밀을 마음대로 하고 총행이 지나치므로 고신(告身: 辭令書)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이 참소해 하옥되려다가 밀직부사 김달상(金達祥) 등이 간관을 하옥하면 훗날 모든 허물이 왕에게 돌아갈 것이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 것이 없다고 만류해 모면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므로 왕이 강제로 고신에 서명하게 한 뒤 파면하였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郎)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해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해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해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네이버 지식백과] 김제안 [金齊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