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지 못할까 두려워 마라
차라리 참선(參禪) 아니하고 그냥 ‘관세음보살이나 열심히 부르면 차라리 나을지언정,
참선 한답시고 공안(公案)을 천착(穿鑿)하고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서 알아맞히려 그러고,
과거에 조사 스님네의 그 법 문답하는 흉내나 내려고 그러고,
그래서 눈치로 짐작하고 남 하는 걸 보고 흉내를 내고,
그래서 그것이 어찌 참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겠느냐 이 말이야.
차라리 깨닫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쳐. 오직 한 공안에 철두철미 충실히 의심을 관해나가고,
마지막 깨닫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숨 거둘 그 순간까지도 ‘이 뭣 고--?’ 하면서
숨이 딸깍 지도록 할지언정 깨닫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간절히 하면 깨닫지 못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시절 인연이 성숙하지 못해서 깨닫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조끔도 한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법하게 간절히 공부를 한 사람은 그다음 숨이 끊어지자마자
가장 공부하기 좋은 여건하에 몸을 새로 태어나, 받아 젊어서 일찌감치 확철대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속에 여러 가지 여래선 조사선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모두 이러한 말씀을 자세히 해주셨지만,
그것은 모다 공안에 견처(見處)의 깊고 옅은 경우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해주셨냐 하면, 그리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라고 하는
그 공안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셨냐 하면, ‘그 공안을, 공안을 보는 데 있어서 그러한 미세한,
그리고 분명한- 경우가 있으므로 바른 선지식의 인가(印可)가 꼭 필요하다고 하는 거,
인가 없이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견처(見處)가 있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고
그것으로써 살림을 삼아서 함부로 알았다고 하는 소견을 가지고 가짜 도인 노릇을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그 간절한 자비심으로 일러주신 말씀이여.
깨달은 것이 중대하고 급한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중요한 것이야.
바른길을 가는 사람,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야.
바른길을 가지 아니하고 아무리 깨닫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고 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야.
가령 서울이 가고 싶어서, 빨리 서울에 도달하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조바심을 내고 초조하게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서울에 빨리 가지는 것이 아니야.
서울에, 참으로 서울에 빨리 가고 싶거든 빨리 바른길을 찾아서 열심히 그 길을 가는 것뿐인 거여.
열심히 그 바른길을 향해서 가기만 하면 서울에는 반드시 도달하고야 만다는 것처럼,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바른 수행을 열심히만 하면 되었지 열심히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빨리 깨닫기 만을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 송담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