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바깥보다 한결 차분했다. 종합병원 지하 1층, 심장혈관 검사실이다. 접수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대기석에 앉았다. 오후 검사가 시작되기 직전, 환자 및 보호자 10여 명이 덤덤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몇 해전, 심장에 탈이 난 어머니는 일 년에 두번 정기검진을 받으신다. 오늘도 금식을 한채, 병원에 와 채혈하고 오후 1시 심장초음파를 하기 위해 대기 중이다. 4시에 있을 의사 진료를 위한 사전 준비다.
대형 병원의 진료체계는 언뜻 합리적이긴 하나, 90을 훌쩍 넘긴 어머니에겐 감당하기 힘든 절차였다. 어제 저녁부터 굶은 탓이리라. 초주검이 다 된 어머니는 퀭한 눈을 반쯤 감고 계셨다. 환자 이름이 불리면 탈의실에서 검사복을 갈아입고 각기 정해진 검사실로 가야 했다. 우리 차례가 왔다. 나는 옷을 받아 가지고 어머니를 부축 해 여자 탈의실 앞으로 갔으나 남자라 속수무책이었다. 혼자서 탈의실 안 까지 들어가실 수야 있겠지만 옷 보관함 개폐를 못 할 테니, 따라 들어갈 수 없는 처지가 난감했다. 마침, 지나는 간호사가 있어 사정해 봤으나 바쁜 수술이 있어 곤란하다며 획 지나치고 말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30대 중반쯤 보이는 여자가 선뜻 다가와 어머니의 한쪽 팔을 잡았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낮모르는 사람이었다.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어머니와 함께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잘 갈아입으셨어요 3번 보관함인데, 비밀번호가 1234 별 표시에요. 조심스레 어머니를 부축하고 나온 여자는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진심 어린 나의 치하에 가볍게 목례를 한 그녀는 다시 대기 의자에 가서 앉았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가 끝나길 기다리며 벽시계를 올려다보던 나는 서너 걸음 떨어진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조용히 앉아 검사실 문을 응시하고 있는 단정한 모습에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불쑥 일었다.
진정한 배려는 얼굴이 없습니다. 은은한 향기가 풍길 뿐입니다! 이 글귀와 함께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글 세 편이 불현듯 떠올랐다.
40대 후반의 한 변호사는 장례식장에서 지인의 문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다른 빈소에 있던 유치원생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채 두 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들어가 분향하고 절을 한 뒤 상주인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앞을 지나치다 잘 모르지만,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고 들어왔습니다.'' 아린 마음에 조문을 한 그 변호사의 따뜻한 진심에선 밝고 하얀빛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후, 외출을 꺼리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머리를 빡빡 깎은 50대 중반 여인의 이야기다. '머리 깎은 한 사람은 쳐다보지만 두 사람은 안 쳐다본다.'며 기꺼이 친구와 동행하여 바깥출입을 돕고 쓰라린 병고를 위로한 이 여인의 다정한 호의는 우정을 뛰어넘어 거룩함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