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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나긴 고행(苦行)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한 병치레 없이 병원, 한의원, 약국 하고는 담쌓고 살아왔답니다.
20년 전에 잠을 자다가 명치끝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이 아파서 식은땀을 흘리며 온 방안을 데굴데굴 굴렀다. 앰뷸런스타고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가서 X-Ray, 혈액검사 후 당직의사는 "아무 이상 없다’며 눈에 황달이 있으니 내일 내과 진찰 받아 보란다." 치료도 안하였는데 시간이 경과하니 통증이 좀 줄어드는 것이 이때부터 담낭결석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B형 간염판정, 다행히 활동성이 아니라 보름정도 입원 치료 후 퇴원하여 외래를 다니며 GOT, GPT 수치가 정상치에 도달하면서 별 차도가 없었기 때문에 치료 소홀히 하고, 종합병원에 다니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하면 무척 후회가 된다. 솔직히 그때는 간염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몰랐으며 '누구나 앓고 지나가는 질환'인 줄 알았다.
가족 모두가 간염검사를 했지만 정상이었고. 나름대로 매사에 조심하며 생활 (금주, 금연)을 하였지만 간염이 왜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 별 탈 없이 생활했는데 목욕을 해도 몸이 간지럽고 소변이 진해지면서 식욕도 없어지고 헛구역질에 없던 황달이 생겨서 18년 전에 국립의료원에 가서 진찰 했더니 간경화 증상이라며 CT검사 후 ‘담낭에 결석도 있다’고 20여 일간 입원했다. 이때부터 누님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평생 내보호자 역할을 하셨다.
내과 외래 다니다가 IMF 직후, 아랫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더니 변기에 검붉은 피가 보여 집에서 가까운 세브란스 병원에 갔더니 진료카드 없다고 진료에 난색을 표하기에 국립의료원으로 가서 식도정맥류 출혈로 진단받고, 난생처음 L-튜브를 코로 위까지 삽입하여 주사기로 위세척(gastrolavage)하니 빨간 핏물이 나왔다. 한동안 지혈이 되지 않아서 L-튜브 제거하고 다시 SB-튜브로 바꾸어 주사기로 공기 주입하여 위속의 풍선을 부풀린 후 튜브을 줄로 연결해 링거병으로 메달아 놓는데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루 지나서 내시경적고무밴드결찰술(EVL) 시술하는데 무려 내시경관을 8번이나 넣었다 뺐다 하여서 얼마나 아프던지 눈물이 흘려 내렸다. 시술 후 다음날 아침까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미음, 죽을 먹다가 1주일 후 퇴원하였다.
대통령선거 투표일, 사우나에서 목욕하면서 무리했는지 저녁에 출혈하여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곧바로 응급실로 갔다. 내시경결찰술이 힘들다고 하였더니 다른 큰 병원은 경화술로 시술하는데 이곳에는 장비가 없단다.
퇴원 후 전에 다니던 내과에 갔더니 선생님이 내시경검사 후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의사 소견서 써 주시면서 중앙병원 외래 다니라”고 국립의료원 하고는 모든 것이 비교가 되지 않았는데...환자들이 큰 병원을 선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식도 정맥류 출혈로 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은인이신 주치의 정영화 교수님에게 내시경적경화술(EIS) 받았는데 내시경관 삽입하여 경화제 4~5회 주사하여 시술하니 먼저보다 통증도 적고 너무 쉽게 끝났다. 다음날 아침까지 금식하고 미음, 죽을 먹고 2일후에 퇴원하였다. 병원에 갈 때마다 수혈 받을 수 있도록 헌혈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간경화가 진행하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출혈되어 식도정맥류 경화요법 19회, 결찰술 2회 시술. 응급실에 가면 오늘도 SB-튜브를 사용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무척 많이 해서 그런지 주치의 선생님이 “이젠 더 이상 시술할 혈관이 없다”고 그 후로는 한동안 출혈이 없었던 것 같다. “신장에 물혹(신낭종.Renal cyst)이 있으나 당장 치료할 필요는 없다”며 경과관찰하기로 했다.
1999년 여름 가슴부분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담석에 의한 ‘담낭염,이라며 레지던트샘이 "응급수술하지 안으면 담낭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큰일난다"며 엄청 겁을 주길래 제가 쳐다보니까 미안한지 요즈음 담낭이 터져서 잘못되지는 안지만...말끝을 흐렸다. 입원실로 올라가서 담낭에 직접 바늘을 꼽아 수술할 때까지 답즙을 뽑아내었다(PTBD).
항생제 치료하면서 '내시경적유두괄약근절개술'(EST)하였는데 지혈이 안 되어 4일 동안 4번이나 시술하다 마지막에 클립을 사용하여 지혈이 되었다. 레지던트왈 “클립이 비보험이라서 사용 안했다”고 클립(5개) 가격이 2인 병실료의 20%정도 이었는데 기가차서 말이 안 나왔다. '내시경적역행성담관조영술'(ERCP) 후 “담도는 결석도 없고 정상이라”고 외과병실 나오길 기다리며 한동안 팔자 좋은 백수같이 지냈다.
외과병동으로 옮긴 후 난생처음 가족의 격려 받으며 수술실로 들어가 ‘담낭절제술’ 김송찬 교수님이 해주셨다. 수술 후 레지던트가 과장해서 지혈이 되지 않아서 “집도의가 포기하려다 끝까지 해주셨다”고 요즈음 출혈 무서워 포기하는 외과의사 있냐고? 난 속으로 웃었다. 담낭에서 결석이 23개나 나왔다며 주셔서 집에 갖고 왔다. 졸지에 ‘쓸개 없는 인간’됨.
2001년 가을 이사하기 전날 무리했더니 출혈되어 병원에서 쓸 물품 꾸려 응급실행. 이제는 나들이 가는 듯 걱정도 안 되고 입원 5일 후에 일산 새집으로 가니 기분이 묘하다.
2002년 1월 이뇨제 부작용으로 손끝이 따갑고 탈수증상이 생기더니 혼수가 와서 병원으로 가는 동안 기억이 나지 않았고, 응급실 의료진의 기본적인 질문 “여기가 어디냐? 2더하기3은 얼마냐? 전화번호?"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원하여 관장 수차례, 단백질 음식을 제한하고 얼마 있다가 퇴원했다.
2004년 여름부터 복수가 차기 시작하여 배꼽이 동전크기 만큼 나옴. 이뇨제 복용하여도 별 효과가 없어 주치의께서 “가족과 이식에 대해서 상의해 보라”고 하셨다.
2004년 말부터 복수로 인하여 배꼽이 종기를 엎어 놓은 것 같고, 탈장, 다리부종 간경화 Child-Pugh C 상태로 이 무렵 식도정맥류 출혈로 입원 중에 치과에서 출혈(혈소판 : 20 x10³mm³) 때문에 미루었던 발치하였음. 산부인과 병동에서 임산부복대(일반복대 보다 길다)를 구해서 사용하다가, 얼마 후에 짧아서 할 수 없어 반을 덧이어서 착용하였다. 혈액응고검사 ; PT(%) : 38.1, PT(INR) : 1.94, aPTT : 53.4 (sec)
2005년5월 복수로 인하여 폐에 물이차서 호흡이 곤란해져 입원하여 검사한 결과 "복막염이 발생하여 패혈증 증상도 있다"고 이제는 배꼽이 먹는 배만큼 커지고 고환도 호박처럼 늘어져 변기에 앉으면 물이 묻어 변기위에 휴지로 벽돌만큼 얹어 놓고 사용했다. 몸은 아프리카 난민 어린아이처럼 배만 풍선처럼 불록하고 팔과 다리는 뼈만 앙상하고, 이제는 복수 조절이 안 되는 것 같다. 식사할 때 복수가 아래로 쏠려서 앉지도 못해 누워서 먹어보니, 기도로 들어가는 것 같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신장기능이 약해져 남들처럼 수액(포도당)주사도 마음대로 맞을 수 없었다. 초음파로 배꼽검사 후에 “장폐색은 아니라며 터지면 응급수술 해야 하니 주의하고 1개월 후에 입원 예약하고 퇴원하라”고 이식수술에 대해서 아직도 가족과 상의하지않고, 현재 상태로 2~3년만 더 살 수 있기를 바랐다.
2005년7월, 복수는 더욱 차고 배꼽에 염증생김. 누님, 동생, 가족들이 병원비, 도너제공 등 걱정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이식수술 하란다. 일반외과에서 환자상태가 좋지 않으니 탈장 수술하지 말고 이식할 때 같이 처리하기로 하였다. 마음의 정리는 어느 정도하고 있었지만 병원생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쉬기 힘들어 산소호홉기에 의존하여 이식 수혜자 검사, 응급으로 막내동생 도너검사를 하였는데 지방간 판정, 며칠 후 다른 동생 도너검사 마찬가지로 지방간 판정받아 “둘 다 운동해서 체중 줄여 도너 제공하라”고 나는 점점 악화되어 집에서 갖고 온 슬리퍼는 발등이 부어 신지 못하고 휠체어에 몸이 끼어서 앉지도 못했다. 이승규 선생님 이식수술 대기하는 환자 순위(12위)...수술할 수 있는 여건만 갖추어지면 응급수술이 될 것 같다. ㅠ ㅠ
7월13일, 오전6시경 2층 장애인 화장실에서 복수가 터져 핏물 흘리며 2층에서 12층까지 엘리베이터타고 병실로 왔다. 인턴선생님 경험 없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당직간호사들이 달려들어 피 묻은 거즈 교환하며 압박하길 30분쯤 흘렀을까? 다행히 출혈이 멈췄다. 아마 복수가 10,000cc 정도 빠져 배가 홀쭉해 졌으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이튿날 복수 과다출혈로 혼수가 와서 대. 소변을 가리지 못하여, “하루에도 수차례 침대커버 교환, 환의 갈아 입히기, 무의식중에 돌발적인 행동 등으로 누님과 천사같은 간호사님들이 무척 고생 하셨다”며 그 덕분에 살인적인 무더위에 욕창 없이 병원 생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3일 동안 Lactulose(배변완화제) 먹으며 수없이 관장하고 깨어보니 관장실…….어머님, 누님, 동생, 하나, 가족들이 내주위에 계셨다. 하나가 “내 소망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오후에 여동생, 조카, 친구들이 면회와서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이번에는 혼수가 심해서 무엇을 외워도 금방 잊어버려 기억상실증에 걸릴까봐 내심 걱정 많이 하였다.
얼마 후 일반병실로 옮겨 이식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누님에게 “우리는 그래도 이식수술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서로 위안하며 생활하였다. 이제는 식사도 저단백 저염식으로 바뀌어져 먹지 못하자 영양사가 수차례 식단 조정하고 매일 반복되는 수혈과 알부민주사(‘복수천자’할 때 1~2병) 맞으며 2~3일 간격으로 복수천자하여 2,000cc 정도 뽑아내어도 뒤돌아서면 다시 원상태로 되었다. 전에 복수검사할 때는 노란색 이었는데 요즈음에는 옅은 붉은색으로 변했지만 "배꼽 안쪽의 적은 출혈이라며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매일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누님 졸라서 ‘이동용 침대’에 누워 병실복도로 나가 둘이서 창밖을 내다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주치의 해외 학술세미나 가셨을 때 복수 4,000cc 뽑고 다시 혼수가 왔으나 하루 만에 회복 되었다.
그 후로는 말이 어눌해지고 정신이 흐려지면 내 자신이 혼수를 예방하기 위해 관장을 부탁하였으며, 그 무렵 체중 76Kg, 허리둘레 42인치(106Cm)로 늘어나 멜빵바지 입고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다.
8월 중순경 탈수가 심해져 포도당 링거액 1일 1000cc 투여하였는데 신장기능이 안 좋아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빨리 이식수술을 할 수 있게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냄.
신장수치(Creatinine:5.1mg/dL, BUN:138mg/dL, Estimated GFR:14 )는 만성신부전(chronic renal failure, 제3기) 상태로 양쪽 신장사이즈 감소에 오른쪽에 결석도 있다고 간은 이식하면 되는데 신장 때문에 주치의도 걱정을 많이 하시며. 그 무렵 신장투석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동생들의 기증을 포기하고 Child class C(15점)이 넘었으니 응급뇌사자 신청을 하였어도 가능했을 것 같다.
간경화 환자의 골인 지점까지 내 곁을 수많은 경주용차들이 지나갔지만 나름대로 티코타고 천천히 도착하려고 노력 많이 했다. 입원해서 주치의샘이 바쁠 때는 레지던트에게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잘알고 있다며 매일하는 회진도 생략할 정도로 관리를 잘 했지만 이제는 환자들끼리 가끔 웃으며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이제는 내 몸이 종합병원이 된듯하다.
9월초 ‘급성세뇨관 폐쇄증’으로 소변량이 500cc 이하로 줄어들어 주치의께서 동생들 체중조절 근황 물으시면서 “이제는 내과적인 치료는 더해줄 것이 없다며 2 :1 생체이식도 생각해 보라”고 사람마다 주관적인 사고방식의 차이지만 “2:1 생체이식은 죽어도 할 수없고, 그리고 여성한테는 받지 않는다”며 누님에게 다짐 받고 제가 먼저 '중국에 갈까’ 그랬더니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서 안구전체가 붉게 충혈되고, 기력이 떨어져 침대에서 뒤척일 수 있을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치의께서 누님에게 10여년 가까이 돌보아주던 환자에게 못할 말이지만 “이제는 간 기능이 1주일 정도 남았으니 환자 편안하게 해주라”고 누구에게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의지력도 차츰 약해지고 꿈속에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아 가족들과 조용히 지내려고 1인실로 옮겼다.
누님이 “이곳에서 생체이식 포기하고 중국에 가서 수술을 하겠냐?”고 나는 낮선 곳에서 누님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둘이서는 싫고 동생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 때는 중국의 ‘장기기증’ 절차도 모르고 멍청하다 못해 무지스러웠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모르면 용감하다’고 ‘간이식환자 지침서’와 다름없는 ‘리버가이드’ 카페에 접하게 된 것도 수술 4개월 후인 올해 1월말이어요.
중국에 가서 이식 수술은 생각하지도 않고 수술예후, 사회주의국가, 모든 여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꺼렸다. 주치의에게 중국이야기 했더니 하루라도 빨리 서류 구비해 드리라고 레지던트에게 지시하셨다. 동생이 수소문하여 중국의 병원으로 ‘의무기록서류’ 보냈더니 빨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여권신청, 비자 발급받는데 2일이 소요되었다. "K항공사에서 산소호홉기 사용하려면 의료진중에 간호사도 가능하다 해서 늦은 밤에 대전에 가서 간호사 여권을 갖고 왔더니 다음날 아침에 의사가 동승해야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Ⅱ. 은혜의 땅에서 환생(還生)
9월13일, 새벽에 아산병원 간호사님들의 “수술 잘 하시고 건강해서 돌아오라”는 격려 받으며 침대에 누워서 산소 호홉기에 의존하여 앰뷸런스타고 인천공항으로 갔더니 동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님과 동생, 셋이서 마지막으로 원 없이 하는 것이니 잘못 되어도 후회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김선영 선생님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지만 ‘항공기침대칸(항공권 4매 비용)’은 고사하고 들것에 누워서 중국으로 떠났다.
비행기 이륙직후 돌아올 수 있을까? 걱정되고 심란했지만 여태껏 많은 고비를 넘겨 왔듯이 이번에도 모든 것이 잘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1시간40분 후 북경공항에 도착하여 기내에서 중국의사와 공항직원들의 큰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멍한 가운데 앰뷸런스에 옮겨서 산소 넣은 비닐 백에 의존하여 사전 예약이 되어 있는 C병원 중환자실로 가는 도중 통역을 맡은 아가씨에게 산소통 사용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는데 “난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9월14일부터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신장수치가 급격히 올라 꿈나라로 여행 떠났다.
수술 후 깨어날 때 까지 코디네이터와 누님 이야기’ 참고 하였으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9월15일, 왼쪽다리 서혜부 혈관으로 인공신장 투석 72시간 후 혼수에서 깨어나니 의료진과 누님이 들어오시며 깨어났네! 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혼수도 완전히 돌아오고 신장수치도 떨어지고 심장, 폐기능검사, 혈압, 혈당 안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간과 신장을 동시에 이식받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수술 일정이 지연되자 공포, 불안, 초조함에 속은 것 같아 가이드에게 9월27일 수술 해주겠다는 각서 받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 지는듯 하였는데 왜 그랬는지 지금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싶은 심정이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9월23일, 장기 제공 스케줄과 의료진 구성으로 난항을 겪다가 장기 스케쥴상 검사결과 이상이 없는 간과 신장을 동시 제공받을 수 있는 수술 가능한날(9월25일, 27일)을 잡았으나 그동안 동일케이스의 수술에 팀워크를 마쳐온 첸따즈 주임, ○○병원 신장외과 한지우 주임이 모두 참여 할 수 있는 9월27일로 수술 날짜로 선택했다.
9월24일, 저녁부터 다시 신장기능의 심각한 문제로 고환이 비대해지고 복수로 인하여 심장박동이 130mmHg에 이르고 복수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인공신장 투석하여 심장박동을 90대로 안정시키고, ‘복수천자’한다며 큰 양동이를 갖고 와서 며칠은 편하게 지내겠다고 큰 기대를 하였는데 직접 2,000cc가량 빼내고 다 했다고 김치국 먼저 마신꼴이 되었다. “이곳 병원에서는 복수 빼지 않고 이식수술 한다”며 그 후에 죽과 계란찜 조금 먹었다.
9월27일, 집도의 첸따즈, 부원장 리닝 박사, 신장외과 한지우 주임, 중환자실(ICU) 첸주임, 허치앙 부주임 등이 모두 수술에 합류. 오후2시30분에 수술실로 옮겨 수술 전 준비와 마취하고 오후4시부터 수술 시작하여 9월28일 오전8시경, 의사호출로 보호자에게 적출한 간 확인함. 오전8시50분, 배꼽주위의 탈장처리후 수술실 나와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수술시 지혈관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의료진들이 허리 아프다며 “다음부터는 까다롭지 않은 수술하기 쉬운 환자 데려오라”고 장기 기능 양호하나 지혈의 어려움으로 혈압이 불안정하고 다소 위험한 상태로 이틀정도 안정되고 나면 정상적으로 회복과정에 들어갈 예정이다. 체중 40Kg, 허리 둘레 28인치, 보름만에 복수를 포함하여 체중이 무려 36Kg 줄어들었다.
수술전 약해져 있던 폐기능 때문에 기도 호홉기관을 4일 동안 제거하지 못하다가 10월1일 관을 제거하고 산소 호흡기로 바꿈. 수술 전 체력이 건강하면 보통 하루 후에 기도 호홉기관을 제거한다. 가래를 뱉어내지 않으면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한다고 수술 부위가 아파서 가래를 밷어내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다.
의료진에게 ‘몇 시간 수술 했냐?’고 물어 보았더니 ‘18시간30분 걸렸다’고 전간이식의 경우 보통 8시간 소요됨. 수술실 밖에서 마음 졸이며 같이 밤새워 주신 다른 환자 보호자와 모든 의료진, 누님, 동생, K사장님께 감사드린다. 누님과 동생이 "우리는 성공했다"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심한 사이코시스 현상과 면역억제제 부작용으로 초비상상태. 나는 그때 황당한 꿈을 많이 꾸었는데 공포, 협박, 간암으로 타계한 동창, 청맹과니 의료진, 복제인간 간호사. 같은 꿈을 꿀 때 후자는 더 무서웠고, 꿈을 연속극처럼 시리즈로……. 전부 가위에 눌리는 꿈이라 지금도 생각하기가 싫다. 침대에 팔과 다리가 묶여 나중에 회복실로 갈 때까지 옴짝달싹 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정신없이 날뛰어서 누님이 묶어 달라 했다며, 그러는 내심정은 오죽 했겠냐”고 하셨다. 서쪽병동 회복실로 가는 날 앰뷸런스 안에서도 ‘공안’에게 쫒기는 꿈을 꾸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정말 미칠 것 같고, 당직 간호사들이 제발 잠을 자라고 애원하여 눈을 감으면 10분도 못자고 깨어나고... 잠을 잘 수 없어서 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누님이 “이식은 성공해서 좋은데 정신병 발병한줄 알고 누님이 속으로 많이 걱정 하셨다."
10월5일부터 약물조정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신장 보호하기 위하여 수술 후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데, 조금만 마셔도 배불러서 마시지 못하자 오랫동안 많은 양의 식염수를 혈관 주입하였다. 중국에서 환자의 상태, 이상 징후는 보호자가 제일 먼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잘 관찰하셔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사전에 의료진에게 요구해야 환자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된다.
10월10일, 초음파 검사. 우측 복강 내의 잔류물 제거 후 식사량 조금 늘어 하루에 뉴케어1캔 아침이슬1병, 생수500ml 수분을 섭취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양제 정맥주사와 좌측 하복부 영양관을 통해 소장내로 직접 죽?형태의 영양물을 투여하고 있다. 열심히 폐 운동하지만 수술 전 복수로 인하여 쉽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소화도 안 되는 것 같으며 성격도 급해져서 가끔 숨이 차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수술 전 완전 고갈 되었던 영양상태 보충되어 호흡기 떼어내고 침상에 기대어주면 않아 있을 수 있음. 오래 전부터 이식수술 후 버틸 수 있게 운동하여 근력 키우라는 주치의 충고를 피곤하고 구찮다며 안해서 회복할 때 많이 힘들었다. ‘운동은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보약’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중환자실 치료가 길어지면서 심리적으로 갑갑함이 더해져 지루하고 짜증 만 늘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의료진들이 개원 이래 간과신장 동시이식 수술한 것이 일곱 번째라며, 다른 환자보다 많이 나온 병원비는 누가 부담 하냐?”고 누님이 돈 걱정 말고 치료나 잘하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와 같이 고가의약품은 보호자 확인받으며 수시로 중간예납을 시켜야 하고, 치료비가 많이 밀리면 원무과에서 약품조달이 안되어 의료진이 치료를 할 수 없답니다.
면회 시간에 누님, 동생, 통역이 죽과 간식을 갖고 오는데 입맛이 없어 조금 먹는둥 마는둥 했다. 환자 곁에서 극진히 간호하는 보호자가 누님이고 병원비를 동생이 전액 부담하는 사실을 알고부터 원장이하 의료진이 감동하여 “너희 남매들 최고다 세상 어디를 가도 무서울 것이 없겠다”며 ICU에서 개원이래 처음으로 다른 환자보다 면회(1일5회)를 많이할 수 있게 허용하고 한동안 야간에는 보호자가 간병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오로지 면회시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있으니 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진다. 움직일 수 있게 허락만 해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겠는데.....,이제는 간호사, 간병인 교대 할 때 인사도 하고 장난치며 그런대로 친해졌다.
10월12일, 인공신장 투석시 연결했던 왼쪽다리 서혜부 혈관이 불록하게 솟아올라 국부 마취 후 혈관처리 시술하고 지혈시키기 위해 얹어놓는 곡식주머니가 얼마나 크고 무거웠던지 A병원에서 ‘색전술’하고 서혜부 동맥 지혈할 때 사용 하는 ‘모래주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10월13일, 남아있던 흉수 빼고 숨쉬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복강 내의 관도 오른쪽 수술 후 잔류물 제거하는 관만 남기고 모두 제거한 후 소개인이 “남들보다 많은 가슴, 복부, 다리의 수술흉터(80cm) 보더니 누님에게 서울 가셔서 팔뚝에 '차카게 살자’ 문신 해주라”고 농담할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담도외 배액관(T-튜브) 없냐?”고 물었더니 의료진이 웃으면서 “우리는 진일보한 수술방법과 풍부한 임상경험으로 요즈음 '담도내 배액, 시술한다”고 자랑했는데, 귀국 후에 알고보니 전간이식은 수혜자와 기증자의 담도내경의 차이가 클 경우, 재이식, 수술 전 상태가 좋지 않아 담도계통에 합병증이 생길우려가 있을 때에만 시술한다.
10월16일 오후 8시경, ‘수술 전부터 심한 복수로 인한 복강내 압력증가와 탈장으로 고환이 비대해져 무균수술 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복수가 빠지면서 복강내 압력이 줄어들고 신장이 제 기능을 찾으면 서서히 줄어야 하는데 자연적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없고 오래 방치 하면 그 안에 고인 혈액과 지방으로 인해 감염의 우려가 있어 국부마취 수술에 들어가 오후10시15분까지 허치앙 부주임이 수술. 면역억제제 때문에 수술 부위 치료 7~10일정도 소요 된다고 함. 중환자실에서 생활한지 한달이 넘어서 이제는 간호사들과 팔씨름도하고 시간을 보냄. 동포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기름에 지지고, 튀기고, 볶은 음식? 어쩔 수 없나보다 아직도 입맛이 없다. 누님이 해주시면 잘 먹을 수 있을 텐데……. 거칠었던 피부가 아기처럼 고와졌는데 머리에는 원형 탈모가 여러 군데 생기고 모발은 솜털처럼 가늘었지만 6개월 지난 후에 예전처럼 되었다. 주사를 팔에 안 놓고 나비바늘로 손과 발끝에 맞는데 그나마 서투르고 툭하면 막혀서 붓고 아팠다. 우리 간호사 샘에게 혈관 못 찾는다고 혼냈지만 정말로 세계최고 수준이다.
10월20일, 중환자실에서 무균실 치료까지 마치고 일반병실이 없어서 몇날 며칠을 기다렸다. 주치의께서 서쪽병원으로 가겠냐고 물어 보기에 중환자실을 벗어나고 싶어 지금 보내 달라고 하였다. 누님은 응급상황에 그곳 의료진이 이곳보다 신속하게 대처 못할 것 같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며 언제든지 원하면 전원 시켜준다는 다짐받고 병원비 정산하는데 예치금으로 부족(564위안)하여 허치앙 부주임이 책임을 진다해도 원무과에서 안 된다고 하는데 조금 섭섭했다. 의심 많은 중국인? 선배들의 신용 때문인지 요즈음에는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미운정 고운정 들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는 간호사도 있고, 옮기지 말고 퇴원할 때까지 여기서 치료하고 가란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 늦게 새병실로 와서 처음으로 실컷 잠을 잘 수 있었고, 보호자와 같이 생활하니 마음이 안정되어서 꿈꾸는 횟수도 줄어들고 식사량도 늘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었다.
본원(동쪽)의 의료진이 분원(서쪽)으로 출장오면 만사 제쳐놓고 제가 입원한 병실로 오셔서 환자상태 확인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갖고 대해주셨다. 의료진에게 복식호흡, 걷기운동, 편식 말고, 물 많이 마시라는 충고 들으며 간식으로 “통역에게 ‘햄버거, 과자, 빵, 참치캔 부탁하였는데 그중에 햄버거가 제일 먹을 만했다. 예전에 방영된 비디오 감상, 조선족이 발행하는 벼룩신문, 로또복권…… 내 취미와는 맞지 않아 시간 보내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
11월 초순경 집에 간다고 전화하였더니 “무균실로 만들기 위해 집안청소(용역)를 시작했다”고 50여일 동안 병실천정만 보다가 처음으로 걸음마 연습, 중심 잡기도 힘들었다. 몇일 후 입원실에서 보호자 대기실까지 걸어갔더니 다들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너무 말라서 화장실에서 히프가 변기에 빠질번 하였고,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면 아래로 흘러내려서 매번 실패하여 할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사타구니에서 측정하였다.
"누님이 중환자실 간호원에게 뭐해줄까? 물었더니 '한국 떡과 김치가 먹고 싶다'고 면역억제제 약물 조절하고 1주일 후에 갈 예정이니, 6일경에 중국에 올 때 해오라고 했다". 동생이 북경공항에서 생쑈(음식물 반입불가?)를 하며 떡을 갖고와서 간호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국에서는 의료진이 치료 중에는 어떠한 선물, 음식물도 받지 않습니다.
Ⅲ. 만행(卍行)을 떠나다
11월13일, 꿈에 그리던 퇴원! 중국체류 2개월 그동안 돌보아 주신 분들, 의료진과 헤어지는데 기분이 묘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제는 아프지 말고 잘 살라”고 K항공 휠체어 서비스 받으며 비행기에 탑승하여 1시간 30분 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면세점에서 선물도 사지 못하고 출구로 나오니, 여동생과 매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5개월 만에 집으로 가서 가족과 상봉하니 꿈만 같아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진다. 내일 병원에 가기로 예약 신청하고, 저녁식사 후 미장원에서 이발하고 나오다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 찧고 아직도 다리에 힘이 없어 후둘 거린다.
11월14일, 응급실에 8시경 도착하여 외과 김기훈 교수로 선택진료 신청하고 오후 늦게 104병동 이식환자 병실로 가서 X-Ray, 초음파, CT, 핵의학 간담도검사 등을 하였음.
11월16일, 간과 신장사이에 이물질이 있어 초음파실에서 주사기로 뽑아 검사하였더니 수술할 때 생긴 잔류물 같으니 저절로 빠질 거라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식단이 고단백으로 바뀌어 진수성찬이다. 저녁식사 후 122병동에 갔더니 "간호사 선생님들이 불룩하던 배 어디 갔냐?"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체중 49Kg, 허리둘레 29인치
11월17일, 오후 10시경 문기명 선생님이 "검사상 모든 것이 좋으니 퇴원해서 외래로 진료 다니시고 봉합 흉터는 동대일산병원에서 해도 된다"며 소견서 써주셧다. 아직 혈압은 정상이나 맥박수가 90회정도로 불규칙하다. 20년 가까이 지낸 투병생활 끝났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것 같이 마음이 홀가분하다. 외래 예약(11/18)후, 처방약(10일분) 한보따리 들고 퇴원하는 발걸음이 예전과 달리 가볍게 느껴진다.
11월20일, 동대일산병원 외과 김연대 교수님이 꼼꼼하게 치료해 주시면서 “아산병원에 얼마 전까지 근무 하셨다”며 이식환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전에 생긴 수술흉터 때문에 잘 아물지 않아 한동안 봉합사(실크사) 실밥 뽑으러 다니며, 겁도 없이 운전하고 아산병원 갔다 오니 아직은 무리인 것 같다. ‘너무 이르지 않냐’고 가족과 주위에서 6개월 후에 하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날이 추워지자 “주위 분들이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 걸리면 고생하니 조심하라”고 감기 걸릴까봐 가족들의 과잉보호로 집안에서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면 가슴이 뻐근한 게 숨쉬기가 불편하고, 식사도중 아랫배에 통증이 오면 묵직한게 복부 전체를 도는 듯한 증상이 생겼다.
12월7일, 아침 식사 후 배가 몹시 불편하여 장기이식쎈터에 전화 했더니 ‘가까운 병원으로 가서 진찰해 보라’고 동대일산병원 응급실로 가서 혈액검사, X-Ray촬영 하니 배에 가스가 차고 소장 협착증세 있다며 입원하란다. 작년 한 해 동안 식사한날보다 금식한날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수술 후 2달이 넘도록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운동을 하지 못해 장운동이 안 되어서 그런 것 같다.
CT검사에 난색을 표하기에 내가 해보자고 하였다. 병명 'ileus' 원래 신장에 조영제가 흘러들어 간다며 간혹 간이식 후에 신장기능이 좋아지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금식하며 운동하라고 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고 통증, 구토 증상이 나타나 수없이 토하면서, 거부반응 인가하는 생각도 들고……. 그 무렵 수술 전 복수압력 때문에 횡격막 이상으로 숨쉬기 힘들었던 증상이 없어지니 한결 좋아졌다. 마음속으로 연말 안에 퇴원하여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빌었다.
12월27일, 아산병원 외래 진료. 주치의에게 구토, 통증, 복부팽만 증상 말했더니 “응급실 가셔서 입원수속 하시라”고 응급혈액검사, X-Ray촬영, CT검사 후에 장협착으로 진단 받고, 레지던트가 문기명 선생님에게 증상을 보고하니 금식시키고 L-튜브 삽입하란다. 밤늦게 병실이 나와서 104병동으로 입원함. 다음날 회진시 주치의께서 “운동 열심히 해서 풀리지 않으면 외과 수술해야 된다”고 나는 정신 나간 것같이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수술 후에 혈관이 다 숨어버려서 주사바늘 꽂을 수 없는 팔대신 목에 카데터 시술한 후 면역억제제, 항생제주사 처방으로 바뀌어 졌는데, L-튜브 에서는 아직도 위액이 흘러내리고 있다.
다음날부터 병동 동쪽에서 서쪽까지 이식환자와 같이 링거액, 영양제 주렁주렁 매달고 걷기운동(왕복 20~25회)하는 저를 보고 문 선생이 '의지의 한국인’ 이라며 열심히 하란다. 며칠 후 대변을 보았는데 양도 적고 가스도 힘없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수술한지 100일, "누님이 제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수술하는 날 어머님께서 절에 도너 제공하신 무명영가를 모셨다며, 49재는 귀국하여 입원검사 하느라고 경황이 없어서 못했으니 오늘 절에 천도재 지내려 가신다”고 나 홀로 병원에…….
1주일 후 L-튜브에서 위액도 거의 나오지 않자 제거하고 점심에 미음, 저녁에는 죽과 반찬도 함께 먹었더니 속이 불편하여 밤새 끙끙 앓았다. 다음날 아침 문 선생에게 "어제 죽에 나온 반찬 먹었더니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죽만 드시지 하면서 다시 금식하면서 운동하란다. 나도 여유가 생겨 "집에 가서 반찬 먹고 아프면 힘들 것 같아 시험삼아 병원에서 해보았다"고 2층으로 내려가서 걷기운동 열심히 하였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며칠 후 뱃속을 뒤집어놓는 증상이 차츰 없어지며 가스도 제법 큰소리로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외과병동에서 방구소리는 회복의 팡파르 그 자체 이었다. 미음과 죽을 먹으며 주사도 안 맞고 면역억제제, 엔슈어750ml 복용으로 처방 내려짐.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아 칼륨수치 올라서 “어렵게 이식한 신장 상한다”고 간호사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이제는 소화도 잘되고 혈액수치 많이 좋아졌으니 내일 퇴원하란다.
1월18일, L-튜브 오래 삽입하여 목젖이 부어 이비인후과 진료 후 퇴원약 처방받고 귀가하면서 이제는 입원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 입원해서 힘은 들었지만 적기에 면역억제제, 기타약제 용량을 조절할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외래진료 다니며 매일 생수 1500ml, 엔슈어 2캔 먹다 살이 쪄서 요즘은 생수 2,000ml 정도 마시고 있으나 아직도 물? 부담스럽다. 지인들의 건강 해졌다는 말씀 들으며 '포레스트 검프'처럼 달리기는 못하지만 하루에 2시간 정도 걷기운동하면서 섭생 잘하니 이제는 체중 60Kg, 허리둘레 31인치로 늘었다. 이식수술 후에 "어머님께서 살아서 돌아 온 것만 기뻐하셨지 제 모습을 보시고 속으로 많이 실망하셨다"며 지금은 무척 좋아하시고 계신다.
3월21일, 혈액검사 결과 SGOT/56, SGPT/112, ALP/130 주치의께서 초음파검사, CT촬영, 핵의학 간담도검사 하라는데 왜 그럴까? 조금 걱정이 된다. 프로그랍 혈중농도 낮아 오전,오후 6mg에서 7mg으로 처방.
4월5일, 외래진료가면 아직도 입학시험 치루는 것 같이 마음이 설렌다. “검사결과 모두 정상 이라”고 괜히 가불해서 걱정했다.
수술 후 6개월 동안 날것은 먹지 않다 지금은 조금씩 먹지만 커피, 차, 주스류는 아직도 마시지 않으며 아이들처럼 밤에 자다가도 간식 먹는 버릇, 간경화 후유증인 '비장비대'로 혈소판수치가 낮고, 면역억제제로 인하여 혈당수치가 높아져 혈당(130mg/dL)조절에 어려움을 격고 있으며, 전에 좋아하던 과일 먹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면역억제제 약을 많이 복용해서 그런지?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혈액수치가 변화하는데 주치의는 차츰 복용량이 줄어들면 나아질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란다. 칼륨수치 높으면 칼리메트, 요산은 자이로릭 복용하고, 음식 조절해 먹다보면 얼마 후에 정상치로 돌아오는데, 물을 조금 더 마셔야 할 것 같다.
4월25일, 외래 진료에서 면역억제제(프로그랍) 복용량이 남들보다 많은 것 같아서 복합처방(프로그랍+셀셉트)에 대해 여쭈어 보았더니 거부반응 없이 신장수치 괜찮으니 전처럼 프로그랍을 오전/오후 6mg 복용하란다. 생면부지의 중국의료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수술에 임했듯이 앞으로는 치료와 관리는 외래 주치의에게 일임하고 제가 지켜야 할 이식 후 건강관리, 생활에 주의하며 물 흐르듯이 마음 편하게 살다보면 저도 모르게 세월이 1년, 2년…….지나겠지요.
9월19일, 이식 후 처음으로 위내시경검사. 전임의(Fellow)께서 검사하는 것 같아서 이식, 헤파빅, 정맥류, 혈소판 수치에 대하여 간호사쌤에게 이야기하여 챠트에 메모하고 검사하니 이상 소견 없단다. 이제는 불안, 두려움이 생기는게 겁쟁이가 된 것 같다. 체중 62Kg, 허리둘레 32인치 비만? 되지 않게 서서히 간식 줄이고, 근력운동도 해야겠다.
얼마 후면 1년 수술한날을 기념(생일)하라고 권하지만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아쉽게 후회를 하면서, 그분을 위해 절에 가서 제사지내고 가족과 조용히 보내려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가 수술일정을 조금 앞당겨 응급뇌사자[Child class C(15점)]를 신청하여 간이식만 하였다면 아마도 기능이 떨어진 신장으로 지금도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으며, 마지막에 ‘동시이식’하여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모든 분들께서 오히려 전화위복 이라고 생각하란다. 덕분에 동생이 9개월 동안 병원비는 엄청 지불 하였답니다.
제가 입원해 있을 때 아산병원에는 다른 병원과 달리 중국 원정 간이식 대하여 정보는 물론 이식 후 외래다니는 환자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내가 수술하고 돌아와서 공여자를 구하지 못한 내과병동 말기 간질환 환자에게 중국 간이식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간경화 Child-pugh 분류 C
상태에서 1년 남짓 투병 생활하는 동안 금전적 비용과 가족들의 희생이 매우 크므로 이식을 염두에 두었다면 B에서 C로 진행하는 시점이 수술의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12월27일. 이제는 15개월이 되어서 외래진료, 헤파빅주사 7주후로 예약함. 그새 몸관리를 잘못해서 창피하게 체중이 1Kg 늘었답니다. 그 후로 별탈없이 외래만 다니면서 18개월부터 외래진료는 3개월(헤파빅주사 6주 10,000iu)로 간격이 늘었으며 면역억제제(프로그랍) 복용량도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어 4/4mg 복용하고 있다.
간질환은 환자와 의료진이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여 잘 관리 하시다 주치의께서 이식 권유 하실 때 수술하셔도 늦지 않으니 너무 걱정 하실 것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갖으시고 최선을 다하십시요. 저는 이식수술할 때까지 ‘식이요법'(저염식)하면서 간에 좋다는 약(의사처방전 제외), 건강보조식품은 먹지 않고 민간요법, 대체의학은 치료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장기를 기증 해주신 중국인 무명님께서 극락왕생 하시기를 저와 우리가족 모두 부처님께 비옵니다. 새 생명을 탄생 시켜주신 중국병원 의료진, 현지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김 사장님 및 직원분들, 그동안 치료하며 돌보아 주신 아산병원 의료진, 정영화 교수님, 김기훈 교수님, 문기명 선생님. 104. 122병동 간호사님들. 저의 쾌유를 빌어주신 약천사 허정 큰스님, 보살님들, 가족과 친구들,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 성불 하십시오.
20년 동안 그림자처럼 내 곁에서 간병 해주시며 저를 위해 부처님께 100만배를 하신 누님, 후견인 역할을 해준 아우에게 평생 잊지 못할 입은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며 여러분들에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잘난 것 없고 풍족하지 않지만 아직도 병마의 고통 속에 있는 환우를 위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식하신분, 간질환 환우분, 보호자분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사시길 빌겠습니다
rebirth
2008년 7월말. 수술한지 3년이 되어가니 예전보다 몸의 이상 신호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같다.
권태감, 메스꺼움(경미한 증상)과 감기몸살 또는 담이 든 것처럼 왼쪽 갈비 아래 피부가 스치거나 누르면 아프더니 3일 후에 좁쌀만한 붉은물집이 3~4개 생겨 아산병원 주치의는 학회에 가셔서 동대일산병원 외과 김쌤에게 전화로 상담했더니 대상포진 같다며..... 오후에 피부과 진료예약을 해주셨다. 피부과에서 대상포진 진단받고 팜비어 7일치 처방.
몇일 전보다 수포와 피부 병변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상태가 호전되어 대상포진 치료는 끝내고 계속되는 포진후 통증은 타이레놀 처방함.
10여일 후 외과에서 간에 부담이 되는 타이레놀 복용을 중지하고 "듀로제식 디트랜스" 패취를 처방 받았다.
2주 후 혈액검사에서 크레아틴(1.1에서 1.3). 요산(6.6에서 9.9) 상승하여 예전에 처방받은 자이로릭 오전/오후 1정씩 복용하고 의구심은 있었지만 통증과 요산수치를 내려준다는 체리를 먹었는데, 1주일 후 혈액검사에서 크레아틴 1.2, 요산 5.8를 유지하여 자이로릭 복용을 1정으로 줄였다.
조금 불편하지만 3주만에 아침운동을 하였다. 우리네 삶이 매사에 조심해도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이라서 어쩔수 없나 봅니다.
프로그랍은 2.5/2.5mg (오전/오후) 복용하는데 혈중농도 6~7을, 헤파빅주사는 6주간격으로 접종하고 수치는 1,100 정도를 유지한다.
첫댓글 간간이 글쓰셔서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휴..이럿게 길게 써주시니.....올해 더욱~!! 건강 하십시요..@^.^@
아저씨의 글을 보고서, 우리 어머님이 얼마나 고생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십니다.한국에서 이식할수 없으셔서(혈액행?) 중국행을 택하실수 밖에없으셨읍니다.지금은 회복이 잘 되고있읍니다.우리 엄마도 한국에서 사이버 나이프(05년08월)까지 하셨는데 결국은 재발이 되서셔,,,,,,,,, 06년08월에 이식을 ,,,,,,,,,,아저씨를 비롯하여 모든 환자분들 힘내시고 다른분들 보다 더욱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화이팅 하세요!!!!!!!!!!!!!!!
감동적인 글 잘 읽고 갑니다.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있으시길 ...
벌써 15개월이시라니...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이식하신분들은 시간이 약인거 같아요.... 이젠 고생끝 행복연속이시길 빌어요...........화이팅...^^
전 재이식후 이제 5개월 반정도 지났습니다. 님의 경험담과 관의 시간에 충분한 이해가 갑니다. 고생 많이 하셨군요. 몸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게시판에서 도움을 청하시는 분들께 좋은 조언도 부탁드리고요.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신앙인으로, 이식인으로서 말미 부분의 남을 위해서 사시겠다는 각오에 찬사를 드립니다..
리버가이드 회원님들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글 내용이 정말 가슴찡합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저희 어머니도 몇 일전 간이식을 준비하라고 하는데 최후에는 중국을 택할 것 같습니다. 중국 이식에 대해 아는 내용이 전혀 없어 걱정했는데 만약 중국을 택하게 된다면 그 전에 한 번 찾아 뵙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무쪼록 예전 건강 다시 찾으시길 빕니다. 오래오래 건강한 삶 행복한 삶 보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