占術(점술)에 대해서 <김윤배> (19.11.2008)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점쟁이입니다. 비록 과학적인 설명은 못 붙이더라도 우리는 모두 내일을 점치고 자기 운명을 점치며 살아나갑니다. (金宇鍾 /내 運命의 핸들을 잡아라)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많은 점술가를 찾아서 내 운명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 중 기가 막히게 정확한 예언을 해준 점쟁이들이 몇명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비과학적인 迷信이라고 하지만 나는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1961년 7월 6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박정희장군의 5.16 군사혁명 직후였다. 거리마다 군인들이 치안을 맡고 있었고, 그때까지 병역미필자들은 공직에서 해직되어 강원도 산골에서 6개월 노동을 했다. 병역미필자는 공기관은 물론 민간기업에도 취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군대생활은 국민으로서 남자로서 꼭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귀국한지 2개월 지나 大邱에서 공군각종장교 시험을 쳤다. 16기로 기억한다. 합격하여 대전 공군교육단에 입교하라는 통보를 받고 소집일 하로 전에 대전에 가서 역전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8시, 교육단에 신고하니 교실에 집어넣고 무슨 시험을 한시긴 쳤는데 멘탈테스트같은 쉬운 문제들이었다. 다음 엑스레이로 가슴 촬영이 있었다. 나는 이 두가지 테스트에서 낙방을 한 20명 속에 들어 있었다. 모두 전라도 지역 출신과 미국촌놈인 내가 미역국을 먹은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서슬이 싯퍼런 때에도, 아예 본시험도 안치른 빽좋은 서울지역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희생당한 것이다. 나는 다시는 군대에 안 간다고 생각했으나, 다음 해 초 서울 外家에서 공군각종장교 시험(17기)을 쳤지만 낙방하였다. 이 때 미국에서 돌아온 金然洙도 같이 낙방했다. 그 해 봄 동아일보에서 기자시험이 있었는데 광화문 신문사에 가니 병역미필자 라고 원서조차 접수하지 않았다. 나는 광화문 일대를 울분에 차서 몇시간을 헤매고 다녔고, 저녁에 혼자서 술을 퍼마시고 내 신세를 한탄하였다. 대부분의 직장은 막혀있었는데, 다행이 집안 어른의 알선으로 黃溫順여사가 운영하는 '韓國保育院'에 취직이 되었다. 월급이 8천환이엇다.
내가 하는 일은 미국의 독지가들이 보내주는 돈을 받고 원장 이름으로 감사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이 무렵 종로 5가 평화극장 옆 2층 어느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늙은 行商 術客이 들어왔다. 불러 앉히고 내 四柱를 넣었더니 육갑을 집허보고 하는 첫말이..."軍隊 안가게 될터인데 무슨 걱정을 그리 하느냐?" 당시 내 걱정이 무엇인지 꼭 짚으니 깜짝 놀랐는데, 그 영감 말대로 나는 군대 가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가지 않게 되었다. 한국보육원에서 영문편지를 1년반을 쓰고 있으니 지겨워지고,
내가 이런일을 하기위해서 고생하며 미국유학을 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사표를 내고 大邱본가로 내려갔다. 마침 친한 秋政燁이가 공군에서 제대를 하고 大邱대학 영문학과에 학사편입을하여 공부를 하고 잇었고, 李大中이가 공군대위 (경리장교)로 K2 대구공군기지에 근무하고 있었다.
두 옛날놈들과 매일 저녁 중앙통 뒷골목의 작은 주막에서 꽁치소금구이를 안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퍼마셧다. 대구 중앙통 YMCA에서 매주 한번식 청년모임에 나가 처녀총각 파티에 어울리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병역미필자로서 모든 공직과 개인회사 까지도 취직은 불가능했다.
어느 여름날 앞마당에서 고양이처럼 햇볕을 쪼이고 앉아 있었는데 한 행상 술객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술객을 불렀다. 내 사주와 이름을 주었다. 그는 이리저리 따지더니 내 사주가 水多인데 木이 부족하니 아호를 지어 보완하라고 하였다. 일주일이면 효험이 나타나리라고 장담을 하였다. 나는 복채를 내고 아호를 지었다. 그것이 樂軒이란 아호이다. 과연 꼭 일주일이 되는 날 아침 나는 서울에서 全種勤이가 보낸 전보를 받았다. <취직가능, 급히 상경바람> 이렇게해서 나는 재무부장관실로 가는 종근이의 중소기업은행 조사부 자리를 물려받아 취직이되었다. 나의 16년 은행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이 깡마른 체구의 術客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참 신통방통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고아원 한국보육원에서 영문편지를 쓰고 있을 때 미아리고개 外家댁에서 지냈다. 어릴적부터 인연이 깊은 외할머니는 10여년 외국으로 떠도는 외교관 아들을 그리워하며 손녀와 손자를 돌보며 칠십대 후반의 노년을 보내고 계셨다.
어느날 돈암동 버스정거장에서 全種勤이를 졸업 후 처음 만났다. 1962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졸업반 때 같은 4반으로 내 앞에 앉아서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종근이는 서울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는데 한학기 다니다가 55년 가을에 도미유학하여 DC의 명문 죠지타운 대학에 다녔다. 3학년 때 카리포니아 대학 (버크리)로 전학하여 졸업한 후 몇년 직장생활을 하고 나보다 1년 후인 1962년에 귀국했다. 나는 고아원에 다니면서 그와 집도 가까워 자주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비슷한 신세로 울분을 토하며 지냈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해병대장교 모집이 있는데 같이 응모하자고 하였다. 나는 원서를 내고 시험치는 날 아침 미아리고개 버스 정거장에서 시험장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점집이 보였는데 한복차림의 도사풍의 術客이 방에 앉아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미아리고개에는 당시 점집이 많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술객에 끌려 그 점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신수를 물어 六爻점을 쳤더니, 엽전 6개를 던져서 나온 괘가... "할 필요없는 짓을 왜 하느냐?"라는 괘가 나왔다. 나는 그길로 해병대 시험장에 가지않고 사회사업지도자훈련원에서 사귄 水原의 삼일애육원이라는 고아원에서 일하는 金아무개의 집에 놀러가버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이 가자고 한 종근이도 늦잠을 자느라고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한다. 그때 해병대 장교시험에 합격하여 입대했더라면 틀림없이 월남전에 파병되었을 것이다. 나는 정보병과를 지망했었는데 정보장교가 되어 배트콩을 잡으러 다니다가 월남의 어느 장글이나 들판에서 유탄을 맞고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그 준수하게 생긴 선비형의 미아리고개 술객 얼굴을 기억하며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결혼 초 약 2년 水踰里에 살다가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수유리에는 지금 미국에 사는 孝悌동창 金榮哲, 고 申達淳, 그리고 池世賢 동문이 이웃에 살았다. 三淸洞에 이사를 하니 견지동에 있는 직장 信託은행에 다니기 편하고, 수우리만 못하나 공기도 좋고 세종문화회관으로 음악회에 가기도 편해서 만족이었다.
국무총리공관 앞 골목에 유명한 術客이 있었는데 지금 이름은 잊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총리 丁一權 장군의 자문역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치인, 고관이나 재벌기업인들은 옛날부터 모두 유명한 술객을 고문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나지신 은행장 비서실에 근무時 경험에 의하면 유명 술객들이 주주총회가 가까워지면 은행장실로 방문하며 은행장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비서실의 말단으로 나는 이들 술객을 담당했었다.
각설하고, 삼청동 총리공관 앞 술객을 찾아가보앗다. 손님이 어떻게 많은지 순번표를 받고 이틀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사주를 넣으니 점점 해가 갈수록 운이 좋아지고 만년에는 대단히 잘 살게 되리라 하였다. 나는 아호를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樂軒이라는 아호는 大邱에서 얻었으나 이 술객이 作名을 잘 한다기에 부탁한 것이다. 몇일 후에 오라고 하여 갔더니 省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이 호를 공식 代表 아호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청하지도 않은 光信이라는 商號를 지어주면서 앞으로 수십년 후에 자신의 사업을 하게 될 것이니 그 때 쓰라고 하면서 돈을 받지 않앗다.
과연 1981년 全斗煥 장군이 굴리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16년 은행원 생활에서 추방되고, 5년간 鄭周永 왕회장의 은덕으로 현대중공업에서 밥을 먹은후 사직하여 1년간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고 나니 실직자가 되었다. 나이는 먹고 백수건달이 되니 오라는 곳은 없고 할 수 없이 내 일을 시직하였다. 4년간의 輸出入 커미션 에이젠트 노릇을 시작하면서 옛날 지어받은 光信이라는 상호가 생각 났다. 나는 光자를 SUN으로 信자를 TRUST로 번역하여 SUNTRUST MARKETING LTD.라는 영문 상호와 함께 사용했다.
내가 아프리카와 英京에 약 4년 근무하고 돌아오니 삼청동의 그 술객은 세상을 하직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大邱출신의 그 술객은 젊어서 대단한 난봉꾼이 었는데 그 시절 얻은 병으로 발꾸락과 손꾸락이 문들어져가는 병으로 떠났다고 한다. 나도 그가 휠체어에 앉아 비서기 밀고 다니는 모습을 본 일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그의 명복을 빈다.
全斗煥장군의 國保委에서 나는 수출입은행 런던사무소에서 2년 반정도 근무 중에 肅淨을 당하는 바람에 16년의 운행원 생활을 마감했다. 7명이 수출입은행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쫓겨났는데, 나는 외환은행 출신이 主流인 곳에서 비주류로서 cpmpany politics 에 패배한 것이었다. 은행에서 現代重工業(株)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업이 수출입은행의 돈을 제일 많이 얻어쓰는 입장이라 王회장이 받아준 것이다. 어쨋거나 나는 鄭周永 회장이 나를 받아주어 5년간 밥을 먹게해주어 은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은행원으로 평생 지냈다면 現代에서 체험한 强行軍 단련은 못받고 나약한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現代에서도 나는 outsider 였다. 프란트사업본부의 해외영업부 소속이였으나 좀처럼 나의 어학실력을 발휘하여 해외로 나가서 受注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앗다. 영문 광고 브로슈어를 만들거나 외국인 엔지니어를 공모하여 뒷치딕거리하는 잡일만 시켰다.
5년이 다 되니 지겨워졋다. 토요일 저녁 고속버스로 상경, 가족과 지내고 일요일 막차로 울산가는 생활은 나에게 좌골신경통을 안겨주었다. 버스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서울의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울산에서는 당시 Time 잡지 하나 사 볼 수 없으니 세상과도 격리되었다. 그저 저녁이면 테레비젼에서 야구 중계를 보거나 외국인 엔지니어들이 가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것이 낙이었다.
이런 가운데, 회시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2년 동안 근무하라는 명령이 났다. 현대중공업이 일본의 미쯔비시 중공업과 공동으로 4억불 짜리 담수화공장을 수주햇는데, 턴키방식이러 현지 요원을 훈련시키는 학교의 교장으로 가라는 것이다. 영어를 능슥하게 구사해야 하는 자리엿다.
나는 사양하고 이 기회에 그만두기로 작정하고 사표를 던졌다. 7년 전에 나는 아프리카에서 수출입은행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1년간 큰 고생을 햇다. 그러나 거기서는 가족이 함께 했고 술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다. 사우디에는 나 홀로 가라는 것이었다. 술도 마실 수 없는 곳이다. 나는 대안 없이 때려 치우고 서울로 올라 왔다. 답답하게 생각한 나의 막내 이모가 용한 술객이 있으니 가보자고 했다. 배화여고 아래에 있는 골목 안 작은 한옥에 노파가 앞에 소반을 놓고 앉아 있었다. 소반위에는 쌀이 가득 얹혀 있고. 노파는 주문을 외면서 큰 트림을 계속하였다. 신이 내렸다는 것이다. 상위의 쌀을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흩혓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짝대기를 던졌구나!" "너는 죽을 운인데 짝대기를 던져서 겨우 살았지만, 금년 한해는 아무것도 안된다. 그져, 몸조심하고 아무것도 하지말고 지내거라."
과연 노파 말대로 수차례 일자리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번번히 finalist 에서 낙방을 하고 그해는 백수건달로 지냇다. 영국에 근무 중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부하의 총에 맞고 떠난 후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자 숙정바람이 불었다. 나는 본부에서 서울 출장명이 내려 와보니 내 모가지가 날라갔으니 한달 안으로 짐을 싸고 귀국하라는 통보를 하는 것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와 짐을 싸는데, 하도 답답하여 신문광고를 보고 윔블던에 있는 어느 유명한 점성술사를 찾아갔다. 영화에서 보는 뚱뚱한 여인이 긴 가운을 입고 마늘은 응접실에 남아 있으라하고 나를 방으로 안내한다.
과연 테이블 앞에 큰 수정알을 놓고 들여다 보더니 첫마디가... "당신은 스파이를 하면 아주 잘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스파이 영화와 칼싸음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 007 영화를 아주 좋아했다. 47회 안동민 선배는 나의 전전생은 프랑스의 칼잡이었다고 한다. 윔블던의 점성술사는 내가 앞으로 5년은 고생을 하게 될것이나 차차 운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밖에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여인도 나의 운명을 대충 맟춘 것 같다.나는 젊은 날, 당시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슐드를 흠모하여 그 같이 독신주의자로 살기로 했으나, 뭔가 잘못 되어 33살에 지금까지 40년을 지겹도록 살아 온 마늘에게 코가 꾀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초 약 1년간 미아리 고개에 있는 외갓댁에 살았다. 평생 나를 돌보아 주신 외할머니는 수년 전 돌아가셨고 외아들인 나의 外叔은 여전히 떠돌이 별 외교관으로 해외에 있으니 빈집도 지킬 겸 살았던 것이다. 집은 대단히 큰 편이었다. 1968년 초에 결혼식을하고 신혼여행후 나는 가까운 옛날놈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하여 저녁파티를 열었는데 저녁을 먹고 큼직한 홀에서 사교댄스도 추었는데, 아마도 Kg51 에서 부부동반의 파티는 내가 元祖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의 큰 놈도 거기 살때 태어났는데, 명동 聖母병원에서 12월 말에 출산후 조리가 길어져서 설날을 넘기고 퇴원하였다. 그믐날 기업은행 조사부 동료들을 불러 밤새 고스톱을 했다. 그 뒤에 두고두고 나는 철 없는 남편으로 마늘로부터 공박을 받았다. 송구영신을 첫아들을 낳아 준 마늘과 보내지 않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었으니... 그건 그렇고, 미아리 근처 吉音洞 골짜기 골목 안에 용한 術客이 있다기에 마늘과 같이 가보았다.
朴海月이라는 이 술객은 새벽 5시부터 2시간 보고 그다음에는 하루종일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발바닥의 금을 보고 운세를 맞추어 유명하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였다. 새벽 5시에 가니 작은방 윗목에 술객은 앉았고 맞은편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어떤 여자가 얼룩달룩하게 요란한 치마를 입고 들어오니 海月이 손가락짓을 하며 말한다. "아이고, 저년은 미친년이 그만..." 이런 식이다.
나는 차례가 되어 내 발바닥을 내밀었다. 전날밤 발을 씻지않아 좀 더러웠다. 해월 曰 "당신 게을러구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 첫마디 말밖에는 그가 무슨 말을 햇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다. 1969년 무렵 중소기업은행 조사부에 근무할 때였다. 우리는 전국으로 출장을 자주하였는데, 주로 지방의 중소기업 실태를 조사하는게 목적이었다. 조사월보에는 수집한 데이타를 분석하여 정부의 정책수립에 필요한 건의서나 해외 선진국의 중소기업 문제와 정책을 조사하여 연구보고서도 만들어 실었다. 재미있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소기업의 지원과 육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지나간 모든 정권이 같은 소리를 했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은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미국인가 브라질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화상회의로 중소기업에게 금융지원을명령했다는뉴스를 듣고 40년 전 우리가 중소기업육성을 위해 땀흘린 기억을 되살리면서 失笑하게된다.
그건 그렇고 나는 전라도 光州에 한번 출장을 가게 되었다. 1년 전 결혼 후 木浦의 처갓집에 간 것이 나의 첫 南道行이었다. 나는 광주에 이명열이라는 유명한 術客이 있다는 말을 마늘에게 들었다. 결혼하기 전에 이명열 술객에게 김윤배와 결혼을 물어봤다고 한다. "벤또(도시락)를 싸들고 다녀도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문 사람이니 잡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출장길에 이 양반을 찾아보았다. 이명열은 말하기를 말년에 가서 長安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고도 했다. 나의 오른손등을 살피더니 손등 가운데에 나란히 돌출한 두 精脈 봉우리를 가르키면서 이런 형상은 수백만명 중에 하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太極의 형태라고 하면서....나는 이명열 술객님의 이 예언을 믿으면서 아직도 귓밥을 만지면서 살고 있다. 동서고금에 <꿈과 희망을 결코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