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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유다의 범죄
호 5:8-15
8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9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10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11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12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15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호 5:8-15 / [동족 상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비상나팔을 불어라! 기브아와 라마에서 비상나팔을 불고, 벧아웬으로 가서 비상 경계 신호를 울려라. 베냐민 땅아, 무서워 떨어라! 9) 이스라엘아, 이 포고를 들어라. 형벌이 내리는 날, 너희는 돌무더기로 변할 것이다. 이 일은 틀림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 10)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웃의 경계선을 바꾸어 놓는 자들이 되었으니, 그들의 머리 위에 내 분노를 폭포처럼 쏟아 붓겠다. 11) 에브라임은 앞장 서서 허무한 것을 뒤쫓아가다가 원수들에게 짓눌리고 깨어질 것이다. 12) 나 여호와가 에브라임에게는 종기와 같이 되고 유다에게는 썩어 들어가는 상처처럼 될 것이다. 13) 에브라임과 유다가 자기의 병세가 중한 줄을 깨달아 앗수르의 대왕에게 특사를 보낼 테지만 그는 너희를 돕지도 병을 고치지도 못할 것이다. 14) 내가 에브라임과 유다를 사자가 짐승을 잡아서 찢어 먹듯이 물어 뜯어 끌고 갈지라도 아무도 그들을 내 입에서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15) [이스라엘을 돌이키려는 헛된 시도] 나는 이제 그들을 버리고 내 집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나를 찾아 다시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환난이 닥쳐오면 그들은 곧 나를 찾으며 애타게 호소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좀과 썩게 하는 자가 되시고 사자처럼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죄를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기다리십니다.
벌하는 날에(8-9)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두 나라의 전쟁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연합하여 유다를 쳤던 전쟁입니다(사 7장). 유다는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하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에 물러갑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스라엘의 심판의 날이 임합니다.
진노를 그들에게(10-12) 하나님은 유다를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유다 역시 하나님께서 물 같이 부으시는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단순히 영토 확장을 위해 침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0). 경계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표시한 것입니다. 경계표는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며, 각 지파와 가족에게 주신 땅이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개인의 땅이나 지파의 경계석을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신 27:17).
유다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명령은 허무한 것을 뜻하고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뒤따르다가 학대와 재판과 압제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좀과 썩게 하는 것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며 섬기던 것들을 보존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병든 이스라엘과 유다를 더욱 악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13-15)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이 병 들었다는 것과 자신들의 상처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힘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고치지 못합니다. 오직 이들이 치유 받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사자와 같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병든 이스라엘과 유다를 썩어 죽어가게 하시고 사자처럼 덮쳐서 갈기갈기 찢으실 것입니다. 이제 이들을 건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처참한 심판이 이들에게 임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15). 이스라엘과 유다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닫아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적용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당신이 회개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구원의 관문이요 축복의 관문입니다. 누구든지 인간적인 고집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탕자'는 비참하지만 ‘돌아온 탕자’는 행복합니다(눅 15:22-24).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해결되고 채워지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심판에서 면제받는 길
호세아 5장 9-15절 / 이한규 목사
1. 인간의 도리를 지키라
하나님의 심판은 꼭 이뤄진다(9절).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벌했는가? 우상숭배 외에 유다 지도자들이 경계표를 옮기는 것과 같은 도덕적인 타락도 한 몫을 했다(10절). 소유의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율법에서 저주를 받는 큰 죄로 여겼다(신 27:17).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남의 땅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도둑질로서 당시 도덕적인 타락을 대표하는 행위로 언급되었다.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윤리도 지키라는 말씀이다. 영성을 내세우는 사람은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윤리를 무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윤리 의식이 불신자보다 못해도 영성이 있다는 말은 공감하기 힘들다.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 윤리보다 나은 모습으로 살려는 삶을 기뻐하신다.
인간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신은 윤리를 요구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복을 준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엄격한 윤리를 요구하시기에 율법도 주셨고 성경도 복음서 4권 외에 66권까지 정경으로 있게 하셨다. 거짓 무속 종교는 자기만 생각하기에 윤리가 필요 없지만 기독교는 남도 생각하기에 윤리가 없을 수 없다. 윤리를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불신자보다 차원 높은 윤리의식이 있어야 한다.
2. 사람을 뒤따르지 말라
잘못된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고 멸망당한다(11절). 진리의 길을 걸으려면 궁극적으로 사람을 뒤따르거나 나를 뒤따르게 하지 말라. 예수님을 뒤따르고 진리를 뒤따르려는 사람이 진짜 자유인이다. 나를 뒤따르지 않을 것이 예상되어도 바른 말을 해주라. 자기를 바라보는 대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면서 광야의 고독도 감수하려고 하라.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면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고난은 영혼과 정신을 작품으로 만든다. 잘못된 사람을 뒤따르면 영혼이 조각나지만 예수님을 뒤따르면 영혼이 조각된다. 사람을 인정하고 높여주되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거나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말라. 자기를 좋게 보이려고 치장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라.
누군가가 ‘위대한 영도자’라는 칭호를 받으면 뒤따르기를 더욱 주의하라. 진짜 위대한 영도자는 자기를 그렇게 호칭하지 못하게 극구 말린다. 한때 히틀러나 스탈린도 자기 나라에서는 위대한 영도자였다. 위대한 영도자임을 나도 거부하고 남도 거부하지 않으면 위대함은 위태함이 된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온전히 뒤따르면서 사람을 뒤따르라. 사람을 뒤따를 때도 인도자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보고 뒤따르라.
3. 오직 하나님만 추구하라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으면 결과가 대게 안 좋다(13-15절). 사람을 찾으면 자존심 상하고 가진 쪽박까지 깨지는 수모를 당한다. 사람을 찾으면 실망하고 실망이 점차 원망으로 진전되고 원망이 점차 절망으로 진전된다. 반면에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으면 신비하게 하나님이 누군가 나를 위하여 도울 사람을 보내신다. 내가 사람을 찾으면 수모를 당해도 남을 나를 찾아오면 문제가 해결된다. 사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고 또한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에 있다.
마음이 하나님의 초점에서 흐리게 되지 않도록 하라. 가나안은 약속된 땅이었지만 수많은 이방신이 있던 땅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도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나 본능과 싸워야 했다. 여러 신을 섬기면 더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방신의 축복을 기대하지 않아도 이방신의 저주는 피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방신을 용인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것이 진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이방신은 풍요와 다산을 내세워 영혼을 미혹했다. 지금도 이단 교주는 부와 성공을 내세워 많은 영혼을 미혹한다. 불행은 풍요를 좇지 않은 삶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의 신을 좇고 자기의 믿음 부족으로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여된 채 풍요와 다산의 신을 좇으면 더욱 큰 불행으로 내몰린다. 하나님도 좋고 복도 좋다면서 하나님도 좇고 복도 좇으려고 하지 말라.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때 참된 복이 나를 좇아온다.
신앙의 배역은 회복될 수 있는가?
호세아 5:13-6:6 / 피영민 목사
서 론
우선 단어부터 우리가 정의를 정확히 내려야 되겠는데 배역과 패역은 조금 다릅니다. 어떤 때는 배역도 패역이라고 번역되지만 배역(backsliding)은 신앙이 뒤로 미끄러져 침륜에 빠진다는 뜻이고 패역(rebellion)은 하나님을 향해 반항한다는 뜻입니다.
1세기 성도들의 관심 가운데 하나는 침례를 받고 난 후 죄를 지은 것은 몇 번이나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에 나온 노바티안이라는 사람들은 침례 받은 후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침례 받은 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니까 사람들이 꾀를 냈습니다.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기직전에 침례를 받으면 힘이 없어서 죄를 지을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사람은 침례를 줄 수가 없으니까 임종 세례가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세기에 로마에 살던 허마는 목양서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목양서에는 다루고 있는 주제가 많은데 그중에 하나는 침례 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딱 한 번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침례 받은 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거나 딱 한 번만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서는 성도가 된 이후 짓는 죄의 문제를 대단히 엄격히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역사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남용해서 죄를 너무 쉽게 용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이 말씀을 남용해 죄짓고 자백하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기도 합니다. 침례 받고 난 이후에 짓는 죄는 용서가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너무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모두 극단입니다. 진리는 양 극단에 있지 않고 둘 사이 중간에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호세아와 고멜의 혼인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고 4장부터 14장까지는 9편의 설교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지난주에 말씀드렸고 5장 5절부터 6장 3절까지가 두 번째 설교인데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는 것이 주제입니다. 호세아는 부도덕한 고멜을 노예 시장에서 돈 주고 사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내로 대접하고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드라마처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고민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사람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경험 혹은 성경을 보면 예수 믿는 성도들도 신앙의 초창기에는 첫사랑이 있습니다. 이 첫사랑이 심해지면 황홀경도 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또 증거하고 있는 것은 때로는 성도들도 신앙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2장 22절에서 신앙의 배역을 적나라한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22)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해놓고서는 또 그 죄에 빠진다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다시 집어먹는 것, 돼지가 깨끗이 씻고 다시 흙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배역한 성도가 신앙과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서 단호한 회개(radical repentance)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I.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세 가지 마음
호세아는 우리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세 종류의 마음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야금야금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호 5:12) 에브라임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지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세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축복이 야금야금 좀이 먹어가듯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장롱에 있는 옷이 겉은 멀쩡해도 빼보면 좀이 먹어 못 입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좀약 장수가 동네에 돌아다니면 좀약을 사서 옷장에 넣었습니다. 또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도 주식이 한꺼번에 확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떨어지니까 망설이다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못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야금야금 좀처럼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좀처럼 빼앗아 가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마음을 단호하게 척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spirit of rebellion)입니다.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호 5:2) 패역자는 반항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패역자와 같이 반항하는 사람들은 살육죄에 빠집니다. 사람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짐승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질 않습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참 어처구니없는 기사가 났습니다. 대전에서 한 경찰관이 자기 어머니를 볼링공으로 죽인 것입니다. 원래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허리만 부러뜨려 보험금을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세게 떨어져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밤에 모여 개를 잡아서 죽이는 짓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크면 사람 죽이는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처럼 반항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 음란한 마음(spirit of prostitution)입니다.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 5:4) 음란한 마음이라는 것은 물론 육적으로 방탕하다는 것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음란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차이를 아십니까?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쫓은 사람이고 솔로몬은 반심으로 쫓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실수도 많이 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며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간접살인까지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은 전심으로 나를 쫓았다고 하였을까요? 그에 비하면 솔로몬은 최소한 살인은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였을까요?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해보면 다윗은 평생 한 번도 우상숭배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처첩 1000명을 거리고 이 여자들이 가져오는 우상들을 다 받아들이고 우상 신전을 세워주는 등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아들 때에 가서는 나라를 둘로 나누는 징벌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마음을 두고 사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명절만 되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좀이 먹는 것처럼 야금야금 축복도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교만한 마음(spirit of pride)입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호 5:5) 사람이 교만해지면 결국 넘어집니다. 호세아가 예언할 당시 여로보암 2세 때에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도 잘 살았고 군사력도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그 힘에 도취되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까?’, ‘왜 나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 느껴지는가?’ 이런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봐야 됩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마음이 있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 음란한 마음이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고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갖게 되면 저주와 사탄, 하나님의 징계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Ⅱ. 신앙을 회복하기에 무용한 방법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과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세 가지는 아주 잘못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첫째, 사람의 명령을 쫓는 방법입니다.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호 5:11)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야지 사람의 명령을 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라고 했는데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가서 금송아지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단과 벧엘에 가서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하나님께 우리를 다시 축복해주시고 신앙을 회복시켜 달라고 해도 응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앗수르를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호 5:13) 북 왕국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축복이 떠나가니까 앗수르가 강해져서 쳐들어오게 됩니다. 앗수르에게 조공도 보내고 뇌물도 보내면서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에게 가서 살려달라고 빌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앗수르가 너희를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너희를 심판하는 것은 바로 나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단지 심판의 도구 혹은 막대기에 불과한데 도구와 막대기를 붙들고 빌고 도움을 청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막대기를 치운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더 센 막대기가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병은 앗수르가 고치기에는 너무나 깊고 영적인 병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축복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대일로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호 5: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배역하니까 떠나 자신의 처소인 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처소로 돌아가서 저희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것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축복, 은혜, 신앙 다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려면 다른 방법이 아닌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상대해도 소용없고 앗수르를 의존해도 소용없습니다.
셋째, 외적인 종교행위를 의존하는 방법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침례 받은 후 짓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해성사라는 의식을 만듭니다. 이것은 원래 영국 수도사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으로 편입이 된 것인데 죄가 있으면 신부나 수도사 앞에 가서 죄를 지었다고 고해하면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행위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외적인 종교행위를 의지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제사를 드렸는지 보십시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호 5:6-7) 양떼와 소떼를 열심히 끌고 가지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달은 매달 초에 드리는 제사를 뜻합니다. 이것을 아무리 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끌고 가면서 좋은 말을 많이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 6:1-3) 말을 참 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물과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져오고 이런 말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보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 6:4) 이스라엘 백성이 와서 잘못했다고 하지만, 그 회개가 아침 구름이나 이슬처럼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죄를 지어 소 한 마리 끌고 가서 제사지내고 점심 때가서 또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침 안개처럼 쉽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도 좋고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말도 좋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려면 진심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6:6) 인애는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흘러나와 이웃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헤세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부부끼리 매일 싸우는 사람이나 직장 가서 싸우는 사람, 성도끼리 싸우는 사람은 헤세드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파생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헤세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위선적인 종교행위를 책망하실 때 호세아 6장 6절을 마태복음 9장 13절과 12장 7절에 두 번이나 인용하셨습니다. 공산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가 종교를 비판했었는데 어떤 설교자는 칼 마르크스의 책보다 더 조직화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조직화된 종교와 종교인을 싫어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은 비록 불편할지라도 우리 성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개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예배드리는 사람의 신령과 진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도망가서 교회에 숨어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교회에 숨어도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적인 종교만으로는 축복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헤세드로 채운바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고 축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참된 회복의 길
성도가 죄를 짓고 배역하면 노바티안이 말한 것처럼 용서 못 받거나 또 목양서에 나온 것처럼 딱 한 번만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해도 용서받는 것도 아닙니다. 호세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회복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호 5:15) 이 말씀대로 죄를 진실로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셨다가도 다시 돌아오시고 찢으셨다가도 도로 낫게 하시고 치셨다가도 싸매어 주시고 죽이셨다가도 다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도 아니요 외형적인 형식도 아니요 우리의 말도 아니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할 때는 마음으로 상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혼인관계”에 비유되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혼인관계가 영원하듯 하나님과 택한 백성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를 잠시 떠날 수는 있습니다. 배역하면 하나님께서는 축복 보따리를 가지고 잠시 떠나버리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최종적으로 떠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고통 가운데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내 마음에 반항적인 마음을 꺾고 순종하는 마음 주시고 교만한 마음을 꺾고 겸손한 마음 주시고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헤세드로 채워주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면 마귀도 떠나고 죄도 떠나고 저주도 떠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만 바라보고 싸우면 자꾸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종일 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 죄하고 싸웠는데 제가 졌습니다. 죄는 멀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헤세드로 채워주십시오.” 그러면 죄는 떠나고 마귀도 떠나고 저주도 떠나고 축복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제 속에 헤세드로 채워달라고 고백하셔서 신앙도 회복되고 축복도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끄러진 자를 돌이키심
호 5:15-6:1 /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후반의 선지자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그가 활동하던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최고의 번영기였지만, 호세아 선지자는 이를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 표현했다. 세속적으로는 번철에 붙은 떡처럼 뜨거워 다 타버렸고, 종교적으로는 전혀 익지 않은 날것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받으실 수 없는 전병 같다는 의미이다.
호세아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알려져 있다. 호세아의 결혼생활은 행동 예언의 양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다. 핵심은, 혼인 언약과 용서, 하나님의 긍휼이다.
II. 기다리시는 하나님
A. 죄를 뉘우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이다. 이 지식은 다른 나라 백성들과는 구별되게 하나님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는 원천이며, 이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 사랑을 버린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했고, 불순종하고 언약을 배반했다. 왜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를 자처했을까? 탐욕 속에서 이 세상의 번영을 추구한 까닭이다.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율법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하고 욕심을 버려야 했지만, 우상은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사실, 우상으로 인해 잘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이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남편의 품을 만족하지 못하고 음란하게 외간 남자의 품에서 살았다. 그러나 호세아는 고멜을 향해 진실한 마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서 나오는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대하며 고멜이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든지 받아 주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용납해 오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자기의 죄를 스스로 뉘우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기다림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B. 주의 얼굴 구하기까지
하나님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주님의 얼굴 빛 앞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사는 것이 자녀로서의 행복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계시고 어떤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가까이 만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얼굴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C. 고난을 사용하심
성경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고난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결국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 절대 의존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III. 돌이키시는 하나님
A. 회개를 결단케 하심
제일 먼저, 하나님은 회개를 결단하게 하신다. 그리고 회개를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모두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실한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구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삶의 동기가 되며 또 목적이 되어 살고 있는가? 나 한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올바로 사는 것에 만족치 않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요구가 마음속에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킨 훌륭한 지표다.
B.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함
신자는 돌이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선지자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영혼의 각성은 인생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져다준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커다란 과외비를 치르며 깨닫기에 그 진리는 너무 평범한 사실이다. 성경만 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은가.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진리의 빛 아래서 조금씩이라도 온전하게 되어 가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복된 생활이다.
IV. 적용과 결론
곤고하며 고통 중에 있는가? 평안과 기쁨이 사라졌는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간절한 사랑의 음성이다. 고난과 아픔은 우리를 각성시킬 수는 있지만 눈물 흘리며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그 불행과 고통 속에서 내미시는 주님의 피 묻은 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미끄러져 있을 때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가 깨닫고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뼈에 새기셨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더 큰 고통이 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품고 사랑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호 5:15-6:3 / 손상률 목사
올해도 일년 열두 달, 오십 이 주일을 변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지켜주셔서 연말 송년 주일에 이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어느 때나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마치 오랜 기간 배를 타고 항해하던 사람이 항구에 귀항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거센 파도와 싸우며 힘든 항해를 하는 동안 어렵고 위험했던 순간들을 회고하면서 우선 무사히 귀환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의 상처 난 부분이나 고장난 부품들을 고치고 바꾸면서 잘 손질하고 다듬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또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항해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과거를 경험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려는 꿈을 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의 전환점에 서게 되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고자 애를 씁니다. 더욱이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반성하며 새롭게 다짐하는 자들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명하였습니다(창 17:1). 이 말씀을 좇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다짐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어디에 머물든지 성소를 중심으로 장막을 쳤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싸인에 따라 행동을 하였으며, 언약궤를 멘 제사장이 선두에서 행진을 주도하였던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모토(motto)로 하고 교회 운동을 매진하는 것도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에 즈음하여 본문 2절에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한 호세아 선지의 메시지를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역사의 전환점에 서게 되면 먼저 지나온 날을 회고해 보는 것입니다. 특히 실수를 하였거나 과오를 저지르고 어려움을 당했던 일이 있으면 그 원인을 분석하여 고치는 작업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한 말씀으로 보아 그 백성들이 여호와에게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1) 하나님을 멀리한 과오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출발한 걸음이 어쩌다가 하나님과 멀리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길이요 실패한 걸음입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호세아는 B.C 780년 경 이스라엘의 13대 여로보암 왕 때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약 50년 간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 시기에는 여로보암의 치세로 나라가 번영하기도 하였으나 뒤이어 계속되는 혁명의 악순환으로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불안했던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정치 지도자가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 숭배를 일삼고 이방 풍속을 좇아가는 자들이었고 이와 함께 종교지도자들까지 자기의 소임을 못다 하는 암흑시대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어느 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져 버린 상태에서 멸망을 재촉하게 되고 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라고 하였습니다(렘 18:15). 이어서 그는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렘 31:21).
(2) 징벌을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1절에 “…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일로 하나님을 거스리게 될 때 그들은 찢기고 상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시편 73:27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나 많은 혼란과 무질서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도 극심합니다. 세대간에, 계층간에, 지역간에 메우기 힘들만큼 깊은 골이 패여졌고 싸매기 어려울 만큼 찢겨져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이념과 철학 부재도 문제로 드러나지만 각계 각층 모두가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상태가 오래되었습니다. 경제는 침체되고 사회의 기강은 무너졌으며, 도덕과 윤리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버렸습니다. 교육의 경쟁력은 상실된 채 비정상적인 사교육 앞에 학교 교육이 물러나 버렸습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방황하는가 하면 이혼률과 자살률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난맥상은 국가적 위기로 몰아가는데 그 어디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병의 원인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5-6에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말씀 1-2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할 때 징벌하시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아는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시 30:5).
본문 말씀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주경 학자 퓨세이(Pusey)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에게 인류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으나 삼일 후에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곧 찢으셨으나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Ⅱ. 여호와 앞에서 살자
시편 73:28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 불행인줄 아는 사람이 그것을 후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이후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1)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비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그는 이제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며 그의 신분과 지위를 보장해 주었습니다(눅 15:22).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찢기고 상처 난 것을 싸매며 고쳐주고 일으켜 세워주며 언제까지나 아버지 앞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무한한 은혜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호세아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음탕한 여인 고멜이 호세아의 아내가 된 후에도 몇 번이나 옛날의 남자를 찾아서 달아났지만 호세아는 그를 다시 받아 들였고 그를 데려오기 위하여 은과 곡식들 주는 등 대가를 지불하기도 하였습니다(호 3:2-3). 세상 정욕을 따라 멸망의 길로 달리던 고멜은 이처럼 끈질긴 호세아의 사랑과 노력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안정되고 행복한 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허물을 덮어놓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됩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행복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4-26).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과 등을 진 채 자기들의 좋은 것을 찾아 즐기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장로 교인의 신앙고백문인 소요리 문답 제 일 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멀리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또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행복을 뜻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와 유하시게 되자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8에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였습니다(9절). 옛날 선지자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합 3:17-18).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아비의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는 스스로 자기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5:19에 보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아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고 이를 빼앗아 먼 나라로 달아났던 사람이지만, 아버지를 멀리 떠난 비극이 어떠한가를 체험한 이후로는 그의 사고 방식이 바뀌어졌습니다. 오히려 저를 받아 주고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하여준 것만으로도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다짐한 것을 지킴으로써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시편 116:12-14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Ⅲ. 힘써 여호와를 알자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젼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 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1) 성도의 본분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하나는 성도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7). 호세아 6: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제사를 격식에 맞추어 드리면서도 그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가 6:7-8에는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여호와를 알고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하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며 거기 따른 확실한 축복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① 밝은 빛의 보장입니다.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한 시간이 되면 새벽이 옵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깊게 깔리고 죄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어 새벽의 여명이 동트게 되면 세상은 밝은 빛으로 새롭게 되고 맙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와 진리와 생명의 빛이 임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② 풍성한 열매입니다.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메마른 땅에는 땅을 적시는 늦은 비가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으로 상징됩니다. 곧 자연의 은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고에 상응하는 열매를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 앞에 사는 사람에게 언제나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빛과 같이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고 또한 땅에서 나는 수고의 열매도 보장되는 것입니다(시 127:2).
(3)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아무리 완벽한 제도나 법령이 있어도 그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지도자가 희망찬 메시지를 선포해도 결국은 실망케 하는 일이 더 많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계획은 언제나 허공을 치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지난날의 허점과 과오를 거울로 삼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0:6). 이런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 정확하게 분별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고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자기의 위치인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참된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밝히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입니다(계 22:16).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게 나타나는 그의 조명을 받게 됩니다. 계시록 2:28에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응
호 5:8-15
한때 젊은이들이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 상표 이름이 ‘안전지대’(Safety Zone)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한때 우리 나라의 정세가 불안하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 기업에 취직이 되면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기업을 금방 망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직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IMF가 커지고 그런 회사들도 구조조정을 하느라고 직원을 무더기로 내어 보내게 되니까 과연 이 세상에 안전한 직장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 했습니다.
오늘 과연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러 장소 중에서 기브아나 라마같은 곳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고 벤냐민도 안전 지대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로 그런 곳에서 전쟁의 나팔 소리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안전지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가서 산다고 해도 그곳에도 사고는 터지기 마련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고 있는 이상 아무리 조심을 많이 하고 안전이나 건강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삼아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곳입니다. 말씀이 있느 공동체, 부족하지만 그 말씀대로 사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바로 이 세상의 안전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전지대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안전을 세상 사람의 안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면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부족한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며 그들을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전을 버리고 스스로 강해지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오늘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안전 지대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리.
8절,“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기브아라든지 벧아웬이라는 곳은 이스라엘 지역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안전지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브아와 라마 혹은 벤냐민의 땅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곳입니다. 주로 전쟁이 터지려면 북쪽이나 남쪽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이곳들은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가 부르짖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여기에서부터 전쟁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결국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곳이 기브아나 라마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땅을 많이 사 놓고 그곳에 별장을 짓고 나름대로 피난 갈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기브아나 라마가 여의치 않으면 벤냐민 사람의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전쟁이 터질 곳은 벤냐민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이 세상에서 안전한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주시려고 작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9절과 10절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9절은 이 안전한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성격을 말하고 10절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이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기브아나 라마까지 다 포함된다는 뜻이지 기브아나 라마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성격이 ‘하나님의 견책’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문책성 인사’라는 표현을 봅니다. ‘문책’이라는 것은 어떤 장관이나 공무원이 잘못했을 경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사실 문책한다고 하는 것은 그를 그 직책에서 쫓아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나라는 이 세상의 둘 밖에 없는 안전지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전지대의 특권을 해제시키는 것이 그 견책이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사람들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중의 하나는 가장 안전한 곳인 줄 알고 사람들이 몰려 왔기 때문에 더 피해가 큰 것입니다.
등산을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벼락을 맞은 나무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무가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잡았기 때문에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전지대’(Safety Zone)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안전한 곳인 줄 알고 피했던 사람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 139:7-8,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자기의 성을 쌓고 나름대로 전쟁 준비도 하고 군사들도 훈련시키는 것이 안전 대책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군사 동맹을 맺어서 서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완전한 안전 대책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 때까지만 안전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한 자기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망하려고 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11절,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이 구절은 참으로 번역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령’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명령’은 히브리어로 ‘싸우’라는 말인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들은 철자(綴字)는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한 ‘싸우’ 즉 ‘우상’으로 반역했습니다.즉 에브라임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그런 영어 번역을 따르지 않고 원래대로 ‘명령’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냥 ‘명령’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과 혼동이 되니까 ‘사람’이라는 말을 넣어서 ‘사람의 명령’이라고 번역했습니다.대단히 뛰어난 의역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번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왕들에 대하여 ‘악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더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방식으로 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수 만가지 방법들이 그들을 돕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곳이 바로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 곳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밥을 먹여줄까?’
그 말은 맞습니다. 말씀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의 어렵고 아픈 것이 실제로는 다른 곳은 아무 걱정없는 편안한 삶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 참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말씀대로 산 사람의 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명령을 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 거짓된 평화는 곧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견책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성공이나 안정된 삶을 믿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평화와 부요함 가운데서 나팔소리를 들으십시오. 전쟁의 호각소리를 들으십시오.
2.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책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가장 싫어하시는 정책을 하나씩 예로 들고 계십니다. 이것은 한 나라는 이 문제만, 또 다른 나라는 저 문제만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걸려 있는 것이지만 하나씩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팽창정책이었습니다.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10절)
여기서 ‘지계표’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땅의 경계를 구분하는 경계표를 의미합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지적도와 같은 것입니다.
구청의 지적과에 가보면 땅에 모두 선이 그어져 있고 땅 소유의 한계가 다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불법으로 자기 땅의 경계를 넓혀서 다른 사람의 땅을 그만큼 많이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 우리와 고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땅이 개인 소유로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있어서 땅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땅은 절대로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나누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번 소유를 영원한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지계표를 옮겨서 땅을 넓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다에서 지계표를 옮긴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유다의 가난한 사람들은 흉년이 들면 이웃의 부자들로부터 곡식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은 비싼 이자를 먹였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땅을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법으로 ‘그런 것은 절대로 안된다. 땅의 지계표는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밀고 나갔으면 가난한 자들이 아무리 빚이 많아도 땅은 빼앗기지 않으니까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위정자들이 이 부분을 양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의 합의한 경우에는 땅 소유도 변경될 수 있다’는 식으로 물러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책이 부자를 위한 정책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은 자들이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한 것이다’라고 밀고 나갔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을 것이고 유다도 계속 안전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를 위한 정책의 변경이 유다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부자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부자들 자신이 위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범위 안에서 행복한 것은 절대로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범위를 넘어서서 잘되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땅,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정,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 이 모든 것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익이 더 많다고 해서 당장 무엇을 바꾸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나 선물로 생각되는 것들은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고 힘들다고 해서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들이며 이 세상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것을 버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다른 길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시키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은 큰 용사였습니다.그러나 그는 자식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자식이 칠십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자식이 많은 것이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 중에서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세겜 사람들과 뜻이 맞아서 칠십명의 아들을 다 죽이고 세겜에서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 가운데서 간신히 도망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요담이었습니다.
요담은 산 위에서 도망치면서, 그리심산 위에서 세겜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뽑기 위하여 감람나무에게 가서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람나무는 자기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무화과나무가 자기의 단 것,아름다운 실과를 두고 어떻게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느냐고 대답하면서 거절했습니다. 포도나무에게 부탁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가서 부탁했더니 좋아하면서 자기 그늘에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담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것은 남을 편하게 하고 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의 야망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으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복 주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집사면 집사로 그리고 찬양대원이면 찬양대원으로, 학교 교사면 교사로 충분합니다. 감히 다른 나무들 위에서 요동하면서 인기를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귀중한 것을 잘 지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애써 더 크게 되려고 하거나 애써 더 높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대단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거저 남 위에 올라가지 않아서 안달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얼굴 색이 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더 높아져야 할 이유가 없고 인정받기 위하여 아첨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버리고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자기 욕심을 쫓는 유다를 물붓듯이 지노를 퍼붓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 세상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어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을 양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굶었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찾아가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니까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내가 굶었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지극히 작은 자중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통치를 했더라면 지속적으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셨을 것인데 부자 위주로 정책이 선회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13절,“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이 자기 병을 깨닫고 유다가 자기 상처를 깨달았다’라는 말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자기의 병의 원인을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조공을 내야 하는데 낼만한 돈이 없거나 흉년이 들었는데 곡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등입니다.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비로소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이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여기서 ‘야렙왕’은 ‘야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렙왕’ 이라는 것이 진짜 이름이 아니고 별명이었습니다. ‘싸움 왕’, ‘깡패 왕’ 그런 뜻입니다. 가장 정확하게 번역하면 ‘보스’라는 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의롭지는 못한 데 힘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전쟁을 잘 하고 힘있는 앗수르 왕의 도움을 의지하여 이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상처를 깨달을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요. 왜냐하면 그처럼 아프게 때리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야렙왕은 그들을 돕거나 고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무엇인가 뜯어내기 위하여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남을 도와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도움을 청하니까 얼씨구나 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앗수르는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길에서 만나더라도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야 상책인데 순진하게도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사기꾼을 찾아가니까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세상 나라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세상 나라에 먹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세력과 나쁘게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돕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치료자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처에는 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불신앙, 바로 이 부분이 치료되지 않은 채 어려움만 없어졌다고 해서 그 상처가 치료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처에는 세상의 재산이나 의학적인 방법만으로는 치료될 수 없는 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려가지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십니다.
3.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십니까?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눈에 드러나지 않게 약하게 만드십니다.
12절,“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이나 ‘썩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은근히 파고 들어가서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썩이는 것’은 곰팡이같은 것을 말할 것입니다. 아니면 녹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눈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모르는 동안에 놀랍게 힘이 빠져나갑니다. 하루 이틀은 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좀이 먹고 녹이 슬었습니다. 결국 그 전체가 못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자꾸 힘이 빠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점점 능력이 없어집니다. 무슨 능력이 없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자기 영혼이 좀먹었고 곰팡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옛날처럼 힘있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쓸모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자기 힘만 믿고 경건에 소홀히 했습니다. 세상적인 쾌락에 자꾸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에게서 능력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릴라의 품에서 머리털이 밀리고 눈알이 뽑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어느 한 순간에 크게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다 늦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이나 몸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절대로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감정은 훈련되어져야 하고 길들여져야 합니다. 훈련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평소에 자꾸 화를 내는 쪽으로 훈련된 사람은 자꾸 화를 냅니다. 화를 내면 안되는 데도 화가 나고 결국 그 화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맙니다. 자꾸 음란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 데 자꾸 몸과 마음이 그쪽으로 갑니다. 통제가 되지 않고 그 욕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정서가 너무 불안정해서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경건한 훈련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꾸 염려하는 사람은 늘 염려합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염려하느라고 설교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그 영혼이 좀 먹고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참으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생각해서는 안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 훈련, 감정을 통제하고 바른 감정을 표현하는 훈련,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움직이는 훈련,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해야 하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 교인은 좀먹은 교인 또는 녹슨 신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알기는 다 아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감정도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고물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불순종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14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결국 일격에 쓰러지게 하십니다. 아마 이 당시에 가장 큰 불행이라면 노약자나 어린이들이 사자에게 물려 가는 일일 것입니다. 사자가 물고 가면 건져낼 길이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형편이 사자에게 물려 가는 전쟁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도울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순종하는 백성들은 서서히 그 힘을 잃습니다.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기쁨과 은혜를 다 빼앗깁니다.그리고 사탄의 일격에 쓰러지고 맙니다. 이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그동안 쌓아왔던 좋은 명성,좋은 친구관계,좋은 업적,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지켜 주십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국제정세가 불안정하고 이 세상이 험란하다고 해도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보호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왕보다 더 크신 분이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당장은 어려워 보이지만 끝까지 참아보십시요.이 말씀의 신실함을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말씀없이 형통한 것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들은 이미 좀먹고 녹슬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인,선을 보고도 행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절제되지 않는 성도는 녹슨 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