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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기념식에 차관 보낸 윤석열...현지는 분노에 휩싸여
유영안 논설위원
2023/10/17
10월 16일, 경남 창원마산 3·15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제44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윤석열이 불참하고,
대신 행안부 장관도 아닌 차관이 참석해 대독을 하자
행사장이 부글부글 끓었다고 한다.
그때 터져 나온 말은 다음과 같다.
“창원마산을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
“부마항쟁에 대해 너무 소홀하다.”
“자랑스런 행사 초라하게 만들었다.”
“차관이 기념사를 할 자격이 있느냐?”
“기념사 그만 두라!"
4대 민주화 운동 기념식 무시한 윤석열
그도 그럴 것이
79년 부마항쟁은,
4·19 혁명, 80년 5·18 민주화운동,
87년 6·10 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 중 하나인데,
거기에 윤석열이나 총리가 안 가고
행안부 차관을 보냈으니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
이는 민주화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보는 윤석열의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윤석열은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반국가세력들이 활개 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윤석열 정권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육사에서 흉상을 철거하려다 합리적 보수층마저 돌아서자
흉상 철거도 못하고 분만 삭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윤석열 정권은
독립투사 정율성이 공산당이라며
광주에 기념 공원을 못 짓도록 방해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의열단장 김원봉 장군도
고향 밀양에 있는 묘를 철거해야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것과 공산당 가입은 별개의 문제다.
레닌 시대의 공산당 개념과
스탈린 시대의 공산당 개념은 다르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에 가입한 1923년은 김일성 나이 7세때였다.
그런데도 수구들은 홍범도 장군이 마치 ‘빨갱이’라도 된 듯 왜곡하고 있다.
천박한 역사인식이라 하겠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했던 부마항쟁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 사이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으로,
박정희 유신 독재에 항거한 운동이다.
현재는 마산과 창원이 통합되어
이번에는 창원에서 기념식이 열렸는데,
거기에 윤석열이 오지 않고 행안부 차관이 와 말썽이 된 것이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직후 18년 동안 독재를 했던 박정희는 10월 26일
부하 김재규의 총을 맞아 죽고 마침내 유신이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잠시 민주화의 봄이 온 것 같더니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집권했고,
얼마 후 5.18이 일어나 무고한 광주 시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윤석열은 그런 전두환을 칭송하다가 논란이 되자
‘개사과’를 올려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윤석열의 롤모델은 전두환이었다.
지금 윤석열이 하는 짓을 보면
전두환 정권이 하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 제거하려는 것도 닮았다.
문재인 정부 때 부마항쟁 국가 기념일로 정해
부마민주항쟁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이때부터 정부가 기념식을 열었다.
국가기념일 첫 해인 2019년 경남대에서 열린 40주년 기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권순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오거돈 부산광역시장,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이 모두 참석했다.
그러나 올해 기념식엔 윤석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와야 할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장관,
박완수 경남도지사,
박형준 부산광역시장까지 오지 않아 더욱 논란이 되었다.
아마도 이들이 윤석열의 눈치를 본 것 같다.
거기에 참석하면 자신도 반국가 세력이 된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불쌍한 족속들이다.
분노한 부산과 마산 부글부글
이에 대해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관계자는
"이 정부가 부마민주항쟁을 홀대한다고 본다.
계란을 준비해 가서 던지고 싶었지만 참고 고함을 질렀다.
자랑스러운 부마항쟁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과 창원마산에서 매우 중요한 민주화운동이다.
그런데 부산시장과 경남도지사도 참석하지 않았다"라고 성토했다.
윤석열은 고기동 차관이 대신 읽은 기념사를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창원과 부산 시민의 용기와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토대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는 여정에
44년 전의 열정과 용기로 함께해 주시길 당부드린다"라고 했다.
그러나 행사장에 총리도 안 보내고
행안부 장관도 안 보낸 것으로 봐 심기가 매우 불쾌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의 눈에는 이들이 모두 반국가 세력, 공산 전체주의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년 총선 때 영향 미칠 듯
그렇지 않아도 PK(부산, 울산, 경남)은
후쿠시마 핵폐수 해양투기와
윤석열 정권의 온갖 실정으로 현재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다.
지난 지자체 보궐선거 때는 울산에서 민주당 구의원이
국힘당 후보를 이기는 기염을 통했다.
울산은 현 김기현 국힘당 대표의 지역구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부마민주화항쟁마저 무시했으니
내년 총선 때 어쩌면 PK에서 대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특히 부산은 소위 윤석열 라인들이 대거 출마해
현직 당협위원장은 물론 의원들과 마찰이 불가피하다.
하태경이 윤석열의 친구인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총장이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다고 하자
미리 투항하고 서울에서 출마하겠다고 한 것도 갈등의 서곡으로 보아야 한다.
국힘당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기현 체제로 간다고 한다.
새로운 당대표를 뽑으며 윤석열과 자꾸만 부딪칠 것을 염려한 것 같다.
내년 총선 지면 5.18 기념식도 안 갈 듯
모르긴 모르되 내년 총선에서 국힘당이 참패하면
윤석열은 아마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도 안 갈 공산이 크다.
하긴 총선에서 국힘당이 참패하면
야당이 탄핵을 추진할 테니 윤석열이 광주에 가든 말든 별 의미도 없다.
대선 때는 광주에 가서
“제가 광주의 눈물을 닦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해놓고
돌아서 전두환을 칭송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을 반국가 세력으로 매도해 타도하려 하니
누가 국힘당 후보를 지지하고 싶겠는가?
수구들이 걸핏하면
‘이재명 사법 리스크’ 운운하는데,
‘윤석열 리스크’야 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연말에 김건희 주가 조작 특검,
50억 클럽 특검이 발의되면 볼 만할 것이다.
그때도 윤석열이 특검을 거부하면 총선은 하나마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특검을 거부한 자가 범인이다.”라고 말한 곳은 국힘당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양평공흥지구,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까지 특검이 발의되면
수구들은 역대급 참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독 안에 든 쥐’는 국힘당이다.
출처: - https://www.amn.kr/4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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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강서구청장 선거때
전체 인구보다 선거참가한 인원이 많다는것은 부정선거의 완벽한 증거?
그런데 국짐당도 한패라서 입도 벙긋 안함?
연말에 건희 특검. 50억 클럽 특검 발의후 서로 다투는척 하면서 시간끌다가
내년 4월 총선때 전자개표기로 양당이 나눠먹기 할려고 진행중?
변희재 태블릿 조작에 동참하여 윤완용을 끌어내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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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몰락의 신호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이득신 작가
2023/10/17
▲ 출처=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 서울의소리 |
부마민주항쟁은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어느덧 44주년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부정한 힘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겁박한다.
과거엔 군부의 힘이었고
지금의 검찰의 힘이라는 차이만 존재한다.
이른바 부마항쟁이라고 불리는 이 민주화운동은
박정희의 제4공화국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72년 유신 헌법 제정 이후로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지지여론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당시 미국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시절이고,
그는 당시 세계최악의 인권국가였던 박정희 정부의 정치탄압과
인권 문제를 심히 비판,
압박을 하던 상황이라 한미관계는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몰락의 서막은 YH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YH무역은 가발공장을 운영하며 미국으로 수출하여 큰돈을 번 회사였다.
하지만 오너일가가
미국으로 회사돈을 빼돌리며 직원들의 급여가 연체되기 시작한다.
이에 1979년 8월 9일 회사 직원 190여 명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인다.
이 사건을 ‘YH 사건’이라고 부른다.
YH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공화당은 40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대해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기도 한다.
어쨌든 결말은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이 벌어져,
당사에 경찰이 들어가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진압 작전을 벌이던 중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심지어 신민당의 국회의원마저 갈비뼈가 골절되고
얼굴이 뭉개지는 등의 큰 피해를 당한다.
이에 분노한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박정희를 향해 규탄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지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정희를 제어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의 총재 직무가 정지되었고
뒤이어 10월 4일, 국회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지면서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상대와
인문대 학생들 위주로 시작된 시위는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구호를 외치며,
규모를 확산시켰다.
교직원들이 시위대를 말리려고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분노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 가량의 학생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대 한 무리를 해산시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위대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시위는 마산으로 확대되었고.
경남대학교 학생 2천여명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마산시내 주요 장소에서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5일 만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도 300만명을 죽였는데,
우리도 100만명 쯤은 탱크로 밀어 죽여 버립시다’ 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박정희 정권내 실력자들의 위기의식이 팽배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부마항쟁은 박정희가 시해되는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출처: - https://www.amn.kr/4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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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를 회상하면 우선 79년 부마사태가 일어난 원인부터 알아야 함.
진짜 일본 미국이 조선 신하국 서방 8개국과 합작으로
전세계를 다스리던 대조선을 멸망시키고
중국으로 한반도로 쫒아보낸후
1910년 강제합병시킨후 가짜일본한테 지배하라고 시킴.
조선 신하국 왜노가,
1926년 조선인 메이지왕 아들 히로히토가 즉위후,
우리땅 중국에서 조선총독부를 경성으로 이전후,
1930년대 아시아 침략하다 45년 항복할 기미를 보이자,
미영소 연합군이 45년 2월
얄타에서 만나 전범 가짜 일본대신
1900년대 초 까지
전세계를 다스린 천자국 본토인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전쟁하기로 약속.
이후 여운형이 좌우합작 통일하자고 주장하여 이승만보다 인기가 높아지자 암살.
이후 남한 단독선거한다고 발표하자,
영구분단된다고
남한 단독선거 반대한 제주 도민들이 시위를 하자,
4.3사건을 일으켜 수만명 학살후
제주를 제외하고 선거를 치러 이승만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킨후,
미국 시키는대로 이들이
이승만을 대통에 추대하여 48년 8월 15일
남조선만 미국 식민지 정부수립?
이후 3000회 북침으로 전쟁 일으켜
3년간 남북한 630만명 이상 학살하고
천자국 본토 한반도를 초토화 시킴.
이후 이승만이 독재하며 부정선거하여
국민들이 4.19를 일으키자,
cia가 박정희를 도와 다음해 5.16을 성공시킴.
이후 부모나라 국민 840만명을 끌고가서
100만명 학살하고 20만명 위안부로 부린 왜놈들을 바주고.
박정희한테 압력넣어
65년 징용과 위안부 피해 배상금 3억달러는 현금으로 받고,
유뮤상 5억달러를 10년간에 걸쳐 물품으로 받기로 합의하여 한일협정 체결.
이때 정치자금으로 일본한테 당시돈 6600만 달러 받음.
이후 남조선을 다시 미일 식민지로 만들기위해
왜놈한테 지시하여 경공업 지원하라고 시킴.
그래서 가발이나 섬유, 신발등 공장이 생김.
우선 경제개발 할려고 해도 돈이없어
65년부터인가 월남전 참전.
연인원 32만명 8년간 월남전 참전.
5000여명 사망.
참전 군인들이 받은 월급 달러가 경제개발 종자돈이 됨.
그런데 연인원 32만명 8년간 전투수당 90% ㅡ 현재가치 600조는 스위스로?
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완공
이때 1km에 1억원 들어감 ㅡ 423km니까 423억 투입?
포스코도 건설.
또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빌려 옴.
이때 전태일이 하루 16시간씩 일해도 4인가족 최저 생활비가 안되 분신자살.
71년 당선후
72년 유신헌법 발표후 독재정치 시작.
그런데 진짜 일본 미국이 71년 금대신 달러를 기축통화로 발표후,
석유거래는 무조건 달러로 결재하는 시스템 발표후,
진짜 일본 미국이 지시하여,
이스라엘이 중동전을 몇번 일으켜 석유값을 몇배 폭등시킴.
미국은 가만히 앉아서
세계가 석유매매 할때마다 달러를 수출하여 창고에 쌓기시작.
우리는 석유값이 폭등하여 물가 폭등.
금리도 폭등.
18년동안 평균물가 15%ㅡ 지금 물가 4%도 고물가라고 난리?
금리 연 24%ㅡ 대기업은 연 8%정도.
대기업은 은행돈 빌려 이자장사 많이햇다고 봄.
정부가 돈이없어 77년 부가세 신설.
결국 최소 80%는 고물가 고금리로 죽지못해 사는형편이 됨?
전국민들 속이 부글부글 타는데
79년 가발공장 yh무역이
미국으로 돈을 빼돌리고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 월급을 몇달 안주어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가서 시위를 시작.
주동자를 체포하기해 경찰 1000명정도가 몰려감.
이때 김영삼이 나를 넘고 잡아가라고 버티었지만
경찰이 기자와 노동자한테 폭력을 행사해서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여공 1명이 사망.
이후 김영삼이 미국 신문에 박정희한테 압력넣어달라고 인터뷰.
그래서 박정희가 국회를 열어 김영삼을 제명시킴.
참고살던 부산대학생 3명이 교내에 대자보를 붙이고 시위 시작.
순식간에 교내로 퍼져 수천명이 합세하자 경찰이 몰려옴.
담을 넘어 부산시내로 진입하자 시민들도 박수치며 동참.
퇴근후 회사원도 동참.
노동자.구두닦기 등등 모두가 동참.
동아대 고신대학생도 동참.
2일만인가 부산시내로 퍼지자,
마산 창원 대학생 시민도 동참하여 부마사태가 됨?
부산 마산에 게엄령 선포.
당시 구 영도다리 앞에 시청이 있었는데 공수부대가 탱크를 대놓고
M 16 소총에 대검을 장착하고 용두산 공원쪽으로 바라보며
하루종일 경계를 서고있었음
이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몰래 부산을 시찰후
박정희 한테 민생을 돌보고 국민들위해 정치를 하라고 조언.
박정희가 경호실장 차지철한테 물어보니
캄보디아는 300만명 학살햇는데 100만명 학살해도 된다고 발언.
결국 박정희는 김재규 조언을 안듣고 버티다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술파티 하다가 김재규한테 살해당함.
그런데 그해 6월 카터 대통이 방한.
근혜와 박통이 공항에 마중나갔는데
인사도 안받고 헬기타고 미군부대로 직행.
다음날 청와대에서 회담하면서 서로 다투다가
카터가 화가나서,
큰 소리로 you shall die 라고 큰소리치는것을,
비밀 보좌관 허경영이 밖에서 들었다고 함.
이전 카터 방한후 cia가 교육관계로 초청해서,
김재규가 1달간 미국 갔다고 왔다고 함?
결국 박정희가 75년인가 부터 몰래 핵을 개발하자 미국이 죽엿다고 봄.
이후 보안사령관 별2개 전두환이,
청와대로 달려가서 금고를 열어보니
돈이 9억원 있었다고 함.
3억원은 근혜주고 6억원은 두환이가 챙김?
당시 은마아파파트 32평 분양가 2000만원?
6억원이면 현재가치 300억?
이후 김재규를 체포하고 국가보위위원장에 취임.
12월 12일 하나회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5.16때 처럼 미국이 묵인?
전두환이 내란음모죄를 씌워 김대중 한테 사형선고.
다음해 80년 5.18일 광주에서 김대중 살려내라.
독재철패.군정종식을 내걸고 시위가 일어남.
미국이 허락하여 공수부대 투입하여 학살시작.
미국 암호가 체로키.
한민족 인디언 체로키족 학살할때와 마찬가지로 광주시민 학살하겠다는 의미?
당시 미국 정보부 소속 김용장이
몇년전 군인을 시민으로 위장투입하여 분위기 악화역활햇다고 폭로.
또 지만원이 북한군으로 지목한 광수가
자신이 광수로 지목된 사람인줄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알게되어 몇년전 나타나서 인터뷰?
이후 미국이 전두환을 대통으로 임명한것?
결국 이승만부터 전두환까지는 미국이 직접 임명?
87년 민주항쟁으로 직선제 도입후부터
전두환이 김영삼.김대중한테도 선거 자금 지원하며
대선직전 cia.국정원 간첩 김현희를 시켜 대한항공 폭파시킴??
물론 돈을 엄청 뿌려 부정선거로 노태우 당선.
당시 회사 처음 들어가서 다니는데,
부서장이 노태우 찍어라고 돈 주는거 일단 받았지만 김영삼 찍었음.
이후 모든선거는 야야가 부정선거로 나눠먹기 하다가,
미국이 80년간 병을주다가,
전두환 임명후부터 중동전쟁도 멈추고 석유값을 안정시켜,
저유가 저환율.저금리로 약을 주기시작.
김영삼이 3당합당으로 92년 대통에 당선.
물론 돈을 뿌린 부정선거.
이때부터 양당이 사돈이 되면서 야당이 없어짐?
노태우가 퇴임후 김영삼한테 3000억인가 주었다고 폭로.
김대중한테도 얼마인가 주었다고 폭로.
15년간 보약을 먹인 남조선 돼지가 통통해지자
미국이 스파이를 투입하여 95년 김영삼을 꼬셔 전면 개방시키고,
oecd 가입시켜주고 주식시장을 폭등시키다가,
97년 외국인한테 주식팔고 튀라고 지시하여
외화부족 사태를 만듦.
이후 3대 신용평가관 동원하여
3달간 3번 국가신용등급 하락시켜 국가부도상태를 만듦.
당시 단기외채 200억 달러(22조) 부족하여
김영삼이 일본으로 돈 빌리러 보냈는데,
미국 재무장관 루빈이
한국에서 돈 빌리려오면
절대 빌려주지마라고 쓴 편지를 보여주더라고 함.
이때 허경영이 imf 선포하지말고 외채 동결하라고 조언.
그런데 전달을 안했는지,
미국 스파이한테 설득을 당햇는지 imf 선포하여 국가부도.
결국 15년간 약을 주어 남조선 돼지를 키워 통통해지자
미국이 친일파 스파이를 투입하여 개방시켜 남조선 돼지를 잡아
하수인 친일파와 90세 잔치를 벌린것이 imf.
97년 대선때도 김영삼이 김대중한테 선거 자금 지원?
이회창이 대선 3달전인가 까지 대통은 이회창 대세로 자리잡음?
그런데
한나라당이 북한한테 돈주고 휴전선에서 총한방 싸주라고 햇다고
미국 지시를 받은 국정원이 김대중한테 소스를 주어
이것이 폭로되어
결국 김대중이 당선 됨...물론 돈 뿌린 부정선거?
미국지시로 부정선거해서 김대중이 당선된것?
김대중도 미국이 시키는대로 하기로해서 대통된것?
이때 대우를 비롯한 17개 대기업 삼키고,
헐값인 삼성전자와 포스코를 비롯한 20대기업 주식을 쓸어담아 삼킴.
일반 금융기관 수십개 삼키고,
외환은행 민영화시킨후 미국이 스파이를 투입하여 서로 짜고 론스타가 삼키고,
주택 국민은행 통합하여 삼킴.
결국 20대 기업과 4대은행은 이름만 한글이고 주인은 미국?
작년 미국이 위 자기회사 주식 살고팔아 챙기고
배당금까지 받아 챙긴돈이 150조 ㅡ 2010년 이후 매년 비슷?
그래도 김대중은 민족정신이 살아있어 유일하게 통일에 관심을 가져
멸시를 당하면서 부시를 단독으로 100분간 설득한후,
방북후 김정일과 경제통일 완전통일위해 개성공단 건설 합의?
그런데 미국 지시인지 순실이 지시인지 근혜가 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하고 사드배치?
중국한테 보복당해 지금까지 수십조 손실을 보고있는중?
개성공단 합의대로 진행됐다면 2000만평에 공장 가동해서,
지금 경제통일해서 자유왕래 시작?
남한 일자리 800만개 창출?
김대중 말기때 전자개표기 도입.
노무현당선부터 모든 선거는
손쉽게 전자개표기 조작으로,
여야가 당선자 미리결정하여 나눠먹기한것?
87년부터 지금까지 여야가 밀약하여
당선자는 투표하기전 이미 정해놓고
투개표는 개돼지 국민들 보라고 중계 방송 한것?
이번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확실히 부정선거 들통남?
신분증 확인하는 기계가 10%는 오류가 난다고 국정원이 발표?
강서구 전체인구보다 선거한 사람이 더많음?
첫댓글
https://blog.naver.com/bmss4050/223057975053
5.18은 폭동 세뇌교육받은 전두환 손자 체포 스위스 비자금
고맙습니다
뭔개소리고 종북 주사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