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에 담월(潭月)이라는 마을이 있다. 윗담월과 아랫담월이 한 마을을 이룬 담월은 동쪽으로는 금마면 옥룡천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감아 내려오는 익산천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춘포면 신동리에서 시작해 서남쪽으로 흐르는 목천포천이 있다. 담월 마을은 학이 날아오르는 형국으로 예로부터 매우 좋은 땅으로 불렸다.
마을 앞으로는 삼례가 가깝고, 남쪽으로는 전주 모악산이 앞산처럼 다정하게 보이며, 고덕산과 만덕산은 물론, 동쪽 완주군의 옥녀봉과 봉실산, 안수산, 수양산 등이 화폭처럼 펼쳐져 있어 매우 아름답다. 옛날에는 전주천과 삼례천이 만나는 만경강에 돛단배 오가는 모습이 익산 12경의 하나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의 원래 이름은 담월이 아니라 다물(多勿)이었다. 1872년에 제작된 익산군 지도에도 다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제 때는 윗마을을 상다(上多, 윗다물), 아랫마을을 하다(下多, 아랫다물)라고 해서 상하다(上下多)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72년부터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상하다라는 이름을 버리고 담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물(多勿)이란 고구려어를 한자로 음차해서 쓴 단어로, '옛 땅을 회복함' 혹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함' 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중국사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내세웠다는 말이 있다. 또 그 이전 고조선에서도 다물이라는 칭호를 가진 단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담월 마을에 인접해 있는 금마는 네 번이나 도읍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다.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4년경 신하인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후 이곳으로 이동해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라 마한을 건국했다. 당시 준왕이 자칭한 '한'이란 명칭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원이 됐으며, 이곳을 기점으로 한반도 남부를 수백 년간 지배한 삼한 연맹체가 형성됐다.
이후 삼국시대를 거쳐 670년경, 이곳에 다시 낯선 이주민이 들어왔다. 668년 고구려가 당에게 멸망하자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이 4천여 호 주민과 함께 금마 지역에 내려와 보덕국을 건국했다. 보덕국은 신라와 연합해 당나라와 맞서 싸우고, 매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엄연한 자치국가로서 존속했다. 그러나 684년 신라의 압력에 저항하고자 수 개월간 무력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내 진압돼 15년 만에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결국 신라에 병합된 금마는 후삼국 시대에 이르러 전주와 함께 후백제 견훤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이때 이곳 사람들은 옛 백제의 영광과 영토를 회복해 줄 것을 견훤에게 요청했는데, 이때도 '다물'이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하지만 견훤은 금마에서 여산으로 넘어가는 탄현고개에서 왕건에게 패배하고 만다.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금마군에 속했던 담월 마을은 잃어버린 땅을 찾아야 할 세력들이 거쳐 간 곳이었다. 위만에게 쫓겨 이곳에 온 준왕은 옛 고조선 땅은 다시 찾아야할 영토였고, 고구려 유민 또한 고구려 땅을 되찾아야 하는 입장에서 '다물'을 외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그래서 '다물'은 당시 그곳에 정착했던 고조선,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