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방
서윤후
방에는 그곳에 머무는 한 사람의 전통과 혁신이 교묘히 대치하고 있다. 방의 규격에 철저히 복무하며 수행하는 온갖 것들의 배치와 그것을 채우고 비우는 동안 반영되는 한 사람의 생각과 취향들. 존재의 가장 최신의 것들이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전통들을 수비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방을 꿈꾸었다. 창작에 집중하기 위해 방해받지 않을 공간을. 자기만의 공간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여성이 가질 수 없을뿐더러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지키는 일이라고. 전통적인 자원 하나 누리지 못했던 지난 사회적 맥락을 천천히 깨부수면서 자신의 공간을 낱낱이 파헤친다. 언어를 통해서 변방의 존재들을 방으로 불러 세운다. 그것만큼 존재에 가장 맞닿아 있는 본질적인 탐구가 또 있을까.
지난여름에는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기형도문학관에서 시 창작 수업 수강생들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과 그들의 창작 시를 엮어 문집으로 만드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질문하는 일을 통해 돌려받게 된 대답으로, 다시 나에게 반문하는 일을 좋아하기에 어렵지 않은 시간으로 여겼다. 인터뷰를 통해 처음 만난 사람들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졌다가 이내 다시 멀어지는 멀미를 함께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시간을 내어 수업을 듣는 여성들이었다. 직업도, 하는 일도 제각기였지만 대체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자기소개를 하곤 했다. 시를 쓰기에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주책 같지만, 이제라도 한 번 해보려고요. 한 수강생은 교회에 가야 하는 일요일인데도 이 자리에 왔다며 일장 연설을 쏟았다.
“그럼 어떤 장소에서 주로 시를 쓰세요?”
“세탁기 옆이요.”
그의 퉁명스럽고 단호한 대답은 부러 그러했을 것이다.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는 보충 설명을 하려고 내용을 덧붙였다.
“통돌이 있잖아요. 그 옆에 작은 책상 하나 놔뒀거든요. 가족들 아무도 안 들어와서 좋아요. 세탁기 소리는 늘 듣던 거라 시끄럽지 않고요. 시가 될만한 소재를 포스트잇에 적어 세탁기에 붙여놓아요.”
빨래를 하지 않는 동안의 시간만을 활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세탁기가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젖은 빨래를 파수하듯, 그 옆에 앉아 글을 쓴다고 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라서. 온몸을 털며 탈수할 적에는 포스트잇이 떨어지지 않는지, 접착력 좋은 것으로 구해야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베란다 세탁기 옆에 놓은 작은 책상과 언제든 세탁기를 작동할 수 있는 베란다. 그 위로는 축축한 빨래들이 말라간다. 그곳을 ‘방’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의 시는, 인터뷰 내용 때문인지 탈수되는 순간처럼 저돌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수줍음이 많던 다른 사람은 일곱 군데의 동네 카페를 번갈아 가며 글을 쓴다고 했다. 유목민처럼 떠도는 데에는 카페 점원이 자신을 단골 취급하며 아는 척을 할 때 주로 이동한다는 이유까지 덧붙였다. 생활 노동에 지배된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고 싶어 찾아간 집 근처의 여러 카페마다 입구 문의 무게, 도어벨 소리, 커피의 향, 테이블 형태와 의자의 높낮이 등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시를 쓰는 현장에 대해 듣는 것이 고군분투하는 누군가의 안간힘을 확인하는 일이어서였다. 본질적인 이유나 쓰는 삶 맨 처음의 눈금일 것이기에 그런 질문으로 써온 날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인터뷰 요령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살림에 치여 겨우 시간을 마련하거나,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아 세탁기 옆에 책상을 둔다. 공간에 대한 미감이나 안목, 분위기 같은 것 대신 자신이 마련한 공간에 자신의 습성을 첨예하게 옮겨놓는다. 지금과 가장 어울리는 상태로. 필요한 상태로. 군대 간 아들의 방을 잠깐 빌려 쓰고 있다는 사람은 꼭 자기만의 방을 처음 갖게 된 아이처럼 해사한 얼굴로, 아들의 휴가가 다가오는 시간을 도리어 아쉬워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면서 내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11시 55분에 멈춰 있는 아르네 야콥센 탁상시계, 먼지가 달라붙어 있는 유리 문진들, 뜨개로 만든 네잎클로버 키링, 담뱃갑에서 나온 구겨진 은종이, 형형색색의 책갈피……. 없어도 그만이지만 지금은 내 곁에 머물러 있어 한 번쯤 해찰하며 이름을 불러보는 존재들이다. 나를 지키는 데 이토록 많은 게 필요했었는지 생각하며, 나만의 방에서 누군가의 방을 떠올리는 시간을 지나왔다.
어릴 땐 너무 심심하여 괜히 안방에 들어가 엄마 침대 옆에 놓인 협탁 서랍을 들쑤시곤 했다. 오래된 동전을 줍고, 더 오래된 가계부의 여백을 찾아 낙서하는 게 취미였다. 어떤 날엔 입출금 내역을 적는 빈칸에 몇 가지 기억하고 싶어 적어둔 엄마의 단어들이 있었다. ‘위임장’, ‘현동이 학부모 총회’, ‘세탁소 블라우스’, ‘수지 엄마 30만 원’……. 어른들에게도 알림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웃음이 났지만, 그보다 더 생경한 것은 엄마의 필체였다. 내 글씨를 들여다보면 엄마의 가계부에서 보았던 정갈한 글씨가 보인다. 몇 년이 지나 요일 하나 제대로 맞지 않는 가계부에 잊어버려선 안 될 것들을 급히 적어두는 마음을 보았다. 붙잡고 싶은 게 있다면 써야 하는구나.
나는 방에서 고요를 수비하며 붙잡는 일을 한다. 쓰는 일로, 놓친 것을 심판하고 남겨진 것을 눌러 적는다. 그런 의미에서 방은 헤어짐을 판가름하는 가정 법원의 풍경일 수도 있고, 혼자서 짝사랑하는 누군가의 빼곡한 서랍일지도 모르겠다. 붙잡고 싶은 것에게로 최대한 다가서는 현장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건, 소중한 것을 잃어본 적 있던 착오의 날들이 선사한 귀한 근력이다. 쓰는 일로 붙잡더라도 붙잡히는 것이 아니겠지만, 언어가 기억하는 존재의 윤곽은 해상도가 높은 편이다.
방에 나 있는 창문으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세탁기에 붙여놓은 메모지들이 진동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누군가가 각자의 방이라고 부르는 주소에 가본 적도 없이 이웃이 된다. 시차를 느끼며, 방에서 난기류를 겪어내며 층간소음처럼 그 인기척을 기꺼이 듣는 일. 내가 나의 고요를 휘저으며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속력이다. 쓰기 위해 앉아서 본다. 건전지가 다 되어 멈춰 있는 책상 위의 탁상시계 하나. 11시 55분. 하루를 멈춰 세우는 계기판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