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윤봉길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김학준 『매헌 윤봉길 평전』 (민음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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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 전철을 타고 다섯 정거장만 가면 ‘양재시민의 숲’이 나온다. 이사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걷기운동 삼아 산책하기 좋아 가끔 찾는 곳이다. 이곳을 ‘매헌’역이라고도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호를 이르며, 여기에는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있다. 올해가 1908년생인 윤 의사 탄신 111년 되는 해이고, 어제가 '훙커우 의거' 87주년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그날의 쾌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소생시킨 분이라는 점에서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더욱 뜻이 깊다.
백범일지에는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이란 글이 있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동경 사건(이봉창의 의거)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죽을 자리를 청탁하면서 그것을 은혜로 여기는 윤 의사라니.
윤봉길은 고향인 충청도 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하던 중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서 심사숙고 끝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 23세에 “장부출가생부환(丈夫出家生不還)”(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중국으로 떠났다. 최종 목적지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였다. 그는 칭다오에서 고향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썼다. “우리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이렇게 조국과 겨레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 나섰음을 천명하였다. 윤봉길은 의거에 앞서 혈서로 쓴 ‘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언으로 남긴 이 시를 김구 주석에게 건넸다. 의거에 임하는 비장함의 정도를 단박에 알 수 있는 내용이다. 25세의 아름다운 청년이 자신을 초개같이 내던지면서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 시를 통해 큰 장부의 기개를 느끼고, 대한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또렷이 본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의거는 세계를 경악케 하였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반침략투쟁으로 알았다가, 이튿날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독립운동임이 밝혀지자 세계는 더욱 놀라워했다.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어떠한 단위부대도 해내지 못하고, 장 제스가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능히 했으니 장하도다.”라고 경탄했듯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독립운동사에 영원불멸로 기록될 영웅적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이 친필유서는 후에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안타깝게도 작은 아들은 두 살 때 사망하였으며, 장남 윤종(1929~1985)에게서 장손녀 윤주경과 장손자 윤주웅이 대를 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윤봉길 의사의 ‘그 사람이 되어라’는 당부대로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손녀 윤주경은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였다. 이는 많은 독립운동가 집안이 이승만 정권 아래서 찬밥대우를 받다가 5.16이후 박정희 정권에서야 서훈이 되고 대접을 받게 된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후 박정희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대거 정치권에 입문시켰다. 이러한 이유 말고도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대체로 반공, 민족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반공을 앞세운 박정희의 군부와 결을 달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과 그 후손들 역시 3공화국부터 지금까지 보수우익계열에서 봉사했으며 활동 중이다. 윤주경 씨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도 그렇게 손을 내밀었으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그건 그럴 수 있겠는데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 국회에서 벌어진 난동은 도무지 ‘조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의 행동으로 봐줄 수가 없으니...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