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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blog.naver.com/bedford_boys/150186132907
MG42와 M1 소총 : 독일군과 미군의 소총분대
전쟁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의외로 자주 간과되는 사실. 2차대전 당시 유럽전선
의 미군은 포병과 공중지원, 가용물자의 우위로 독일군을 압도했지만 유독 그들과의 소부
대 보병전투에선 항상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겁니다.
노르망디 전선 당시 미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것ㅡ박격포, 기관총, 저격수 등
ㅡ도 죄다 독일군의 보병중대급 이하의 편제화기였죠.1 노르망디 상륙 후 첫 달 만에 미
군의 최일선 보병사단들이 100%의 사상률을 기록한 것을 생각해보면, 미군이 폭격기와
105밀리 포탄으로 독일군을 발할라로 전속시키는 만큼, 독일군 역시 기관총과 박격포로
적지 않은 수의 미군을 비에르빌 공동묘지로 보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였는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미군과 독일군의 소부대가 어떤 방
식으로 싸우고자 했는지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죠. 요컨대 케이스 스터디가 필요하다는 겁
니다.
ㅡ
거대한 기관총조 : 독일군의 소총분대
'분대'를 의미하는 미군의 스쿼드Squad와 독일군의 그루페Gruppe는 퍽 다른 존재
입니다. 먼저 각자의 인원 구성은 완편됐을 때 미군이 열두 명, 독일군이 아홉 명으로 차
이가 있는데, 둘 다 '한 지휘자가 구령이나 수신호로 통제할 수 있는 한계 병력'이라는 기
준은 같죠. 병력 차이의 이유는 미군이 각개 소총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그 비중이 높은
반면에, 독일군은 각 분대가 보유한 경기관총을 중심으로 화력전투를 하기 선호했기 때문
입니다.
그럼 먼저 독일군의 소총분대부터 살펴보죠.
1944년 1월에 미군이 발행한 <전술 및 기술추세> 제42호 중 '독일 보병연대'에서 발췌.
분대장과 경기관총조 3명, 소총수 6명의 구조입니다. 1943년 이후엔 소총수 한 명이 제외
되면서 9명 완편 구조로 정착하죠. 한 명의 감소로 일어나는 화력의 공백은 반자동소총과
돌격소총의 보급으로 벌충되었습니다.
뒤이어서 살펴볼 미군 소총분대에 비하면, 독일군 소총분대는 아주 단순한 구조입니
다. 요컨대 기관총조가 사격을 하고 소총수는 기동한다, 는 방식이죠. 그래서 통상 독일군
은 분대원들을 지칭할 때 분대장, 1번과 2번(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3번부터 9번 사수라
는 명칭을 씁니다.
이 9명 기준으로 소총분대의 보유화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 MP38/40 계열의 기관
권총 1정, MG34 혹은 MG42 경기관총 1정, P-38 권총 2정, Kar98k 소총 6정. 전쟁
말기가 되면 기관권총의 자리의 일부를 StG44가 대체하거나, 소총수용 화기로 G41/43
계열의 반자동소총이 들어오기도 했죠.
첫번째는 보통 부사관으로 기관권총2을 들고 다니는 분대장이 있다. 기관총 1번과 2
번 사수, 즉 삼각대 없는 MG42로 무장한 경기관총조가 있었다. 이 조는 분대장에 의해
통제되었다. 또 한 명은 총류탄 발사기Schießbecher를 휴대했다. 또 다른 한 명, 부분
대장은 자동장전 소총(반자동)3을 휴대한 병장으로, 기병총4으로 무장한 다른 병사
넷을 지휘했다.
ㅡ 한스 하인츠Hans Heintz 대위의 1993년 증언,
독일군 제916척탄병연대 소속으로 1944년 노르망디 방어전 참가
일단, 사용하던 제식소총에 있어서 독일군이 오랫동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개
념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98년식 단축형 기병총'이란 의미의 Kar98k는 비록 지난 대전
쟁에서 불평 없이 사용된 명총 Gew98을 개선한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2차대전 개전년
을 기준으로 원형이 생산된 지 41년이 된 총은 여전히 독일군의 제식소총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죠.5
사실 이런 장기간의 개발 지체현상은 꼭 독일군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
총탄 몇 발로 적에게 유효탄을 넣는 것을 포기하고 일제사격에 집중했던 옛 선형전투의
흔적은 당시 독일군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참전국들의 소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Ka
r98k의가늠자를 보면 사거리 조절자가 가시거리 밖인 1800미터까지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단발 소총이라도 한 부대가 동시에 사격을 가하면 가시거리 밖의 적에게도 피
해를 강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초기 강선총 개발자들의 발상이 반영된 것이죠.6
이렇게 전통적인 개인화기 개념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전쟁 기간 내내
공세적인 보병전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총이 아닌 다른 화기의 운용에 있었습니다.
공격전투를 기준으로 독일군 소총분대의 전투방법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총수가 기동과 엄폐를 반복하며 공격대기지점을 선점
2. 분대장이 기관총 사수에게 핵심표적과 거치지점을 지정
3. 분대장의 명령에 의해 기관총이 적에게 사격
4. 부분대장의 지휘 아래 소총수가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며 사격과 기동으로 약진
5. 적 진지 전면에 연막탄 투척 후 수류탄 투척
6. 연막 차장으로 은폐된 소총수들이 각개약진하여 적 진지에 돌격
이 과정에서 분대장이 자신이 휴대한 기관권총으로 근거리에서 기관총 지원사격의
역할을 대신하거나, 소총수 중 한 명이 휴대한 총류탄으로 적 진지를 적당한 거리에서
갈구면 더 좋겠죠.
이러한 전투방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기관총의 역할입니다. 기관총은 첫 전투의
총성을 여는 화기면서 동시에 해당 분대의 가장 큰 위협과 정면으로 승부를 보는 화기입니
다. 교리상으로도 적 진지에 직접 투척되는 수류탄을 제외하면 실제로 적을 가장 많이 사살
하는 것도 이 기관총이죠.
1942년 9월 스탈린그라드에서 촬영된 독일육군 소총분대의 모습.
제일 앞에 선 MP40을 든 부사관은 분대장, 그 뒤에 서서 기관총용 탄통을 들고 있는 부사
관은 부분대장일 겁니다. 중앙에 선 병사가 방망이수류탄 여럿을 허리에 두른 것에 주목. 1
차대전부터 수류탄은 독일군 보병전투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휴대가 어려움에도
전쟁 내내 방망이형을 고수한 데엔 장거리 투척이 용이하다는 장점 때문이었죠.
기관총에 대한 의존은 방어전투에선 더 두드러집니다. 소총수들의 임무는 기관총을 측면
에서 우회 공격하려는 적으로부터 기관총좌를 엄호하고, 기관총 사격이 중단되지 않도록 탄약
을 추진하는 역할로 축소되죠. 특히나 엄청난 발사속도를 가진 MG42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로는 중대 사하지점으로부터 탄약을 실어나르는 일이 나머지 분대원들의 가장 큰 과업
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전쟁 중 독일군 소총분대는 마치 하나의 기관총조처럼 움직이게 되죠.
각 인원은 기관총용 여분 탄띠 200발을 휴대했고, 1번과 2번 사수(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는 각각 1,400발을 휴대해야 했다.
ㅡ 한스 하인츠 대위의 증언, 위 증언에 이어서
나는 (분대원 중 소총수) 4명에게 기관총을 보호하도록 해야 했다. … 우리는 가끔 기관총
을 상실한 다른 분대에서 새로운 병사를 받기도 했다. 기관총은 절대 잃어선 안 될 것이었
다. 만약 잃는다면 생존자들은 나뉘어 여전히 기관총을 가진 분대에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ㅡ 알프레드 베커Alfred Becker 상병의 1989년 증언,
독일군 제326국민척탄병연대 소속으로 노르망디 방어전 참가
1944년 팔레즈 포켓 전투에서 촬영된 독일군 제12SS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병사들.
사진 속 병사 둘은 기관총 사수가 아니지만(사수는 다른 사진에 촬영되었습니다) 기관총용
탄약을 휴대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총열 케이스를 가진 것으로 보아 부사수인 것
같은데, 사진에 보이는 탄띠와 탄박스만 해도 최소 5백 발을 휴대하고 있는 상태죠. 분대급
에서 이런 양의 탄약을 휴대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겠지만 독일군은 감내할 만한 가치
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기관총 중심의 보병전투는 또 분명 효과적이기도 했습니다. 탄약 보급만 원활
하다면 유효 발사속도 기준으로 MG42가 한 점표적에 뿌릴 수 있는 탄환은 독일군의 제
식소총인 Kar98k 소총 30정과 같은 양이었고, 실제로 한 점을 조준했을 때 적을 명중시
킬 수 있는 유효탄을 내려면 신중하게 조준한 한 발보다 제어된 점사가 훨씬 효과적이죠.7
이런 전술적인 환경 고려는 전쟁 말기까지 심각한 인력부족을 겪고 있던 독일군 보병부
대가 최전방에서 일정한 전투력을 꾸준히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8
우리 병사들이 힘들여 앞으로 나아가면 독일군은 선두의 한둘을 쓰러트려서 나머지를 둑
뒷편으로 엎드리게 만들곤 박격포를 호출했다. 독일군의 박격포는 매우, 매우 효과적이었
다. 우리 병사들이 그들에게 접근할 준비가 되면, 독일군는 마지못해 다음 지점으로 후퇴
한 뒤였다. 우리가 둑 뒤로 엎드리지 않고 돌격하면, 그들의 기관총과 기관권총이 몇몇을
더 쓰러트렸을 것이다. 야구식으로 말하자면 야수선택과 같았다. 누구도 이런 일에 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ㅡ 무명 미군 장교의 증언9
그 외에도 풍부한 경험을 가진 독일의 철강산업이 당시로선 생경했던 개념인 분대급
경기관총의 이상향을 MG34와 MG42로 실현시켰기에 가능해진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MG42로 치자면 분당 1200발을 쏘는 총이 11킬로그램밖에 안 했고, 거치하고 사격 준
비하는시간이나 총열 교체하는 시간 모두 몇 초면 충분했으니. 50발들이 드럼 탄알집과
같이 이동간 탄띠 휴대의 번거로움까지 덜어주는 방법까지 더하면 강습용 화기로도 쓸
수 있었죠.10
하지만 이런 운용에도 분명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기관총을 상실한 시점에서 그 분대
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죠. 꼭 분대에서뿐 아니라 독일군은 조직으로서의
생존력은 매우 높았지만, 변수나 난무하는 난전을 거듭할수록 개개인의 투지를 강조하는
소련군이나, 능동적인 전투수행을 강조하는 미군에게 약점을 내보이는 특징을 갖고 있었
죠.
독일군을 방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아주 교범적이고 잘 조직화되어있지만, 만
약 그 조직을 해체시킨다면 그들은 재조직하기를 어려워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계속 치
면 되었다. 꼭 사상자를 만들어야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 치라는 것이다.
ㅡ 알라스테어 피어슨Alastair Pearson 중령의 증언,
영국군 제6공수사단 제8공수대대장으로 노르망디 강습 참가
물론 독일군 소총분대는 홀로 싸우는 조직이 아니었고, 그들의 생존성을 보장해줄 만
한 우군의 지원수단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전투에서 살아남은 각개 병사들이 발휘할 수
있는 전투력은 극히 제한되었죠. (후술할 미군과 달리) 징집된 비전문 징집병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 이후 독일의 군사전통은 각개병사의 전투기량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가 흔히 독일군의 근접전용 화기로 생각하는 MP4
0 계열의 기관단총은 의외로 지극히 보조적인 역할에 머뭅니다. 분대 후미에 위치한 기관
총을 통제하느라 적과 직접 맞붙을 일이 적은 분대장에게 지급되는 기관단총의 의미는 근
접전투에 취약한 기관총을 엄호하는 것이었죠.
훗날 전쟁영화들을 통해 독일군의 상징처럼 되버린 MP40 기관권총.
총열 아래에 달린 뾰족한 돌출부는 궤도차량에 탑승한 상태나 건물의 창틀에 걸치고 총을
뒤로 당겨 거치대 효과를 보라는 의미로 달린 겁니다. 독일군도 이 녀석을 처음 디자인했
을 때 기관단총을 본격적인 돌격화기보다 소형화된 지원화기로 생각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문헌적인 증거는 없지만 개전 초기의 독일군이 신형 소총에 큰 흥미가 없는 동시에 기
관단총 생산에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을 보면, 독일군은 기관단총을 소총과 함께 기동하며
'적 근처까지 가져갈 수 있는 초경량 기관총'으로 이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 시대에
존재했던 자동화기치고 지원화기가 아니었던 것도 드물었으니.
어쨌든 전쟁 중 1백만 정이 넘게 생산된 독일군의 기관단총들은 여러 전투에서 대활
약을 했지만, 일반 보병부대에 보급되던 기관단총의 의도된 첫 목표는 생각보다 소극적인
역할이었습니다. 이런 발상은 전쟁 기간 중 발견된 경량 자동화기의 효용성에 의해 빠르게
도태되었습니다.
ㅡ
소총을 든 시민들 : 미군의 소총분대
한편, 미군의 소총분대는 독일군과 별로 공통점이 없는 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1943년 미군의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서 발행한 <공세전투간 소총소대 및 소총분대> 중.
미군의 소총분대는 소총을 휴대한 열 한명과 자동소총을 휴대한 한 명으로 구성됩니다.
아래 텍스트에 적힌 <M1903 소총을 휴대한 한 명>은 총류탄 사수를 겸하는 부분대장.
총류탄을 사격하려면 소총에 공포탄을 장전해야 하는데, 전투 때마다 미리 장전해 둔 보통
탄을 빼고 공포탄을 장전하는 번거로운 짓을 하려면 M1 소총보다는 단발장전이 용이한 볼
트액션 소총이 더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44년을 기점으로 실제 교전에선 총류탄
보다 소총탄 쏠 일이 더 많다는 이유로 대부분 M1 소총으로 교체되죠.
열두 명으로 구성된 미군의 소총분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됩니다: 분대장과 부분대장,
정찰조 2명, 자동소총조 3명, 소총수 5명. 상술된 자동소총수는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휴
대하고, 그의 부사수는 자신의 M1 소총과 자동소총용 예비 탄알집을 휴대하죠.
임무에 의한 미군의 소총분대 편제는 독일군보다 훨씬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
습니다. 독일군의 소총분대가 기관총과 그를 둘러싼 인원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진 반면, 미
군은 마치 분대 하나가 독립된 작전을 하는 부대처럼 (현대적 용어로) 정찰대와 기동예비,
후위 화력지원조의 구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미군 소총분대의 구성. 선두(에이블)은 두 명의 척후병과 분대장, 화력조(베이커)는 자
동소총 사수 및 부사수와 탄약수, 후미의 기동조(찰리)는 소총수 다섯 명과 부분대장으
로 구성됩니다. 선두가 적을 식별하거나 접촉하면 화력조가 분대장의 지시를 받아 자동
사격을 가하고, 그 사이 기동조가 우회하여 적을 격멸한다는 개념이죠.
미군 소총분대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유명한 M1 소총 그 자체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군과 동급의 탄환을 사용하는 소총임에도 반자동 소총을 분대마다 열 정씩 편제하는
덕분에 소총수 단위에서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은 유효사격 속도로 독일군 소총수들의 2배
에 달했습니다. 소총수의 탄약 휴대정량도 176발로 역시 독일군 소총수의 2배였죠.
반자동 소총을 제식소총으로 선택한 것은 당시로운 매우 급진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하
지만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미군의 근대적 보병운용의 경험이 유럽의 국가들처럼 머
스킷과 징집병을 전제로 한 선형전투와 아주 무관했기 때문에였죠. 미국의 소총수들은 나
폴레옹 전쟁을 통해 징병제를 배운 유럽 국가들과 달리, (거의 전원이 개척민의 후손인 까
닭에) 개개인이 소총을 쓸 줄 알거나 하다못해 소총을 다룰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군의 소총수들은 분명 다른 나라의 소총수들과 비교해 아
주 독특한 존재들이었죠.
이런 이유에서 그런지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장을 경험해놓고, 각자 본국으로
돌아간 미군과 독일군의 개인화기 개선은 너무도 판이하게 이행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
후 비전문적 징집병 중심의 군사전통을 갖고 있던 독일군이 철저하게 공업적인 해결방안
ㅡ유능한 금속업의 손을 빌린 교묘한 화력기자재ㅡ을 찾은 반면, 미군은 각개전투에 유능
한 병사들의 전투력을 일일히 향상시키는 방법을 구했던 겁니다.11
소총수들에 대한 미군의 자신감은 2차대전 개전 직전이던 당시까지도 여전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짐작하실 수 있듯 M1 소총이 채택될 당시 미육군 내의 반대 여론은 있었지
만, 그 주장의 뉘앙스에서는 그들이 가진 소총수들에 대한 신뢰가 잔뜩 묻어납니다.
남아있는 기능적 문제들은 하나하나 고쳐졌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보병들 사이에선
부사관들이 조장하는, 새로운 소총이 전혀 가치가 없다는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부사관들
이 새 소총을 폄하하는 이유는 더 복잡한 사격술 과정이 생겨 특등사수로 인증받기가 어려
워질 것이란 점이었다. 특등사수 인증은 한 달에 5달러의 가치가 있었다.12
ㅡ 저프리 페렛, <이겨할 전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합중국 육군>('91)에서 발췌.
1941년에 처음 .30구경 M1 개런드 소총을 처음 지급받았을 때 대부분은 복잡한 감정과
태도, 추측을 가졌다.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특등이나 1급사수였던 대부분의 고참들은 솔직
하게 말하길, '이거 별로 안 좋아', '헛간 벽도 못 맞출걸', '탄이 걸릴거야', '누가 총을 총구
에서 닦나?', '신병은 분해법도 못 배우겠네', '전투 시작 5분 만에 탄을 다 쏴버릴걸', '적
당히 수동으로도 못 쏘잖아' 하는 식이었다.
ㅡ 미육군 시드니 R. 하인즈Sidney R. Hinds 준장13의 증언,
줄리언 해처, <개런드의 책>(1977)에서 재인용
"내 M1은 당신의 탄환으로 나의 말을 합니다." 2차대전 중 미국의 생산독려 포스터.
여기선 말(talk)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상대에게 내 논리를 강요하는 정치적 수단으
로서 소총 자체의 역할을 강조한 점이 재밌습니다. 이런 정서는 미국이 미니트먼(Minut
eman)이라 불리는 민병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지금도 총기소유권의 문제를 안전이 아니
라 개인과 국가 간의 권력균형 문제로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의견과 잘 부합됩니다.
하지만 개인화기에 대한 이런 관점은 휴대 가능한 자동화기에 대한 심각한 부진을 야
기합니다. 1918년 제작된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현대 총기제작자의 전설인 존 브라우닝
의 역작으로 손색이 없는 물건이지만, 이것이 1차대전의 참호에서 발생한 기관총의 요구
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생각하면 좀 의아하죠.14 물론 초도 생산분이 휴전 두 달전에 있었
던 뫼즈-아르곤 공세에 투입되어 미군과 프랑스군 모두에게 호평을 받긴 했지만, 확실히
미군이 생각한 개인화기의 우선순위는 기관총보다 소총에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훗날 기관총 중심으로 구성된 독일군과의 보병전투에서 만성적인 화력
부족을 야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미군 소총수들이 아무리 속사를 해도 독일군 경기
관총의 화력투사 능력을 따라갈 순 없었고, 대부분의 경우 공격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미군
들로썬 매복한 독일군의 기관총에 끊임없이 첨병들을 희생자로 내줄 수밖에 없었죠.
1945년 3월, 오키나와 요나바루에서 공격로를 주시하는 미육군 제7보병사단의 한 병사.
브라우닝 자동소총은 당시 미군 소총분대의 유일한 화력장비면서도 소총과 같은 범용성
을 끝내 포기못한 작품이죠. 하지만 소총수의 일원으로서 운용된 자동소총수는 특유의 유
연성과 소총 이상의 화력으로 전선 곳곳에서 흥미로운 전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 소총분대는 나름대로의 강점이 있었습니다. 소총수 개개인의 능동적인 임
무수행 능력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미군 보병들은 독일군 보병에 비해 교리 밖의 전
투방식을 통한 적극적인 교전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사례들에는 개인화기
조작과 사용에 대한 높은 이해와 숙련도에 기반한 것들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도로의 오르막에 커다란 수풀이 조금씩 서서히 움직이고, 그 뒤로 분명히 움직이는 물체
가 있는 희미한 모습이 나타났다. … 나는 부사관들이 그러하듯 내 M1 소총에 예광탄을
가지고 다녔다. … 나는 빠르게 두 클립을 사격했다. … 예광탄이 두꺼운 강철 포방패에
명중해 폭죽에서 불길이 터져나오듯 사방으로 날아갔다. 우리가 폭로시킨 물체는 자주포
였다.
ㅡ 존 웡John Wong 중위의 증언,
미육군 제2기갑사단 제238공병전투대대 소속으로 노르망디 전투에 참가.
[제505공수연대 D중대 웨이벌리 레이 중위]는 생울타리 너머 속삭하는 목소리들을 들은
곳으로 갔다. 장교들이 도상 협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레이가 장애물을 뚫고 튀어올라
그의 M1을 준비 자세로 휘두르며 거센 명령조로 무전기 앞에 모인 독일군 장교 여덟 명
에게 "핸데 호흐!"15라 외쳤다. 그 중 일곱이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그의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으려들었다. 레이는 즉시 그의 눈 사이를 쐈다. 레이의 후방에
서 100미터 거리의 가느다란 참호에 있던 두 독일군이 그에게 기관권총을 갈겼다. … 레
이는 무릎을 꿇고 도주하려 하는 독일군 장교 일곱 명에게 한 발씩 사격하기 시작했다. 클
립을 다 쏘자 레이는 도랑으로 뛰어들어 다른 클립을 장전하고 기관권총을 쏘는 독일군들
을 한 발씩 사격해 쓰러트렸다.
ㅡ 스티븐 앰브로스Stephen E. Ambrose, <시민 병사Citizen Soldiers>
새로 가져온 브라우닝 자동소총으로도 쇠로 된 총열이 벌겋게 달아올라 휘어질 때까지 사
격을 했다. 또 다른 총을 찾지 못한 나는 위층에 올라가 주변을 뒤졌고 총알이 가득 장전
된 톰슨 기관단총을 찾았다. … 총알이 떨어지자 나는 어딘가에서 본 바주카포를 떠올렸
다. … 엄청난 붉은 화염과 함께 주석으로 된 파이프 뒤쪽 끝에서 후폭풍이 일어나 집이
흔들렸다. … 나는 60밀리미터 박격포 포탄을 집어 들어 … 포탄을 창가 선반에 대고 가
볍게 툭 치자 안전장치가 떨어져 나가 실탄, 즉 내가 사용하려는 방식의 실폭탄이 되었다.
… 포탄을 투척할 때마다 엄청난 굉음이 들렸고, 포탄 투척 장소를 다시 보자 독일군 다섯
명이 죽어 있었다. … 방 한쪽 구석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 원정군이 사용한 것과
동일한 스프링필드 '03 저격소총이 세워져 있었다. 저격용 소총으로 무장한 나는 눈에 띄
지 않게 작은 언덕을 넘어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적군을 목표물로 삼았다. … 창밖으로 건
물 아래 안마당을 보니 37밀리 대전차포가 있었다. … 계속 포사격을 하자 [독일군이 요새
로 사용하는] 교회 전체가 벌집처럼 되었고 교회 종탑의 일부가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16
ㅡ 찰스 E. 켈리Charles E. Kelly, <1인의 전쟁One Man's War>,
데이브 그로스먼 외, 『전투의 심리학』, p.220~225에서 재인용
미군 보병의 이러한 특성은 전쟁 중 미군을 위기에 강한 조직으로 만들어 주는 장점
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미군들은 조직이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교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몇몇 미군 병사들은 (미군과 독일군 모두가 그러했듯) 겁먹고 위축된 징집병
들 사이를 누비며 숙련되고 준비된 소총수로서의 역할을 이상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결론 : 어느 날 전사가 되버린 시민들
유럽전선에서 격돌한 미군과 독일군에게는 내적인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대
부분은 지난 세계대전에 참가한 아버지 세대에게 양육되었고, 그로부터 비롯된 염세적인
문학작품을 보며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생업을 두고 어느 날 갑자기
군복을 입어야 했으며, 하루 아침에 평범한 시민들은 전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들 모
두가 전쟁터에서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전후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다행스런
일이었죠.
하지만 독일군과 미군은 이제 막 군복을 입은 자국 시민들의 특성을 달리 이해했고,
그에 따라 바뀐 운명은 많은 이들의 생사를 갈랐습니다. 1944년 6월부터 두 달 동안 진
행된 노르망디 전역에서 미군은 12만 5천 명을, 독일군은 약 20만 명 가량을 상실하였
는데, 동 전역에 참가한 영연방군의 피해까지를 합산하면 양 진영의 피해는 거의 동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군이 자신들이 준비한 결과로서의 전략적 승리를 자축하기엔, 그 병
사들은 너무도 큰 대가를 치룬 겁니다.
노르망디 당시 오마하 해변에 첫 발을 딛어 유럽 본토전선의 개막을 열었던 제29보
병사단은 총 242일의 전투 동안 28,776명을 상실해 피해율이 204%에 이르렀습니다.
그냥 숫자셈만 하면 디데이에 참가했던 병사들은 사실상 전원이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전
사상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 보충병들까지 최소 한 번은 그 전임자와 같은 상황에 처했
다는 뜻이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훌륭한 군인들조차 그 운명을 쉽게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그러한 피해를 강요했던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효과적인 전투수행에도 불
구하고 전선은 빠르게 붕괴되었습니다. 양 진영에서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전선에서 생
활하는 병사들이 체험해야 하는 조건은 그들이 가진 전술적 장단점과 무관한 경우가 많
았습니다.
무슨 기관총이요? 우리는, 세상에, 아마 분대에 여섯 명인가가 있었어요. 분대장은 뚱뚱
한 부사관이었는데 그가 자기 리볼버를 쏠 때마다 손이 데였었죠. 그 사람은 그걸 쏘는
걸 싫어했어요. 우리로선 다행인 게 그는 총안구만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거든요.
자칫했다간 우리 중 한 명을 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아직도 금속에 별이 박혀 있는 러
시아제 무기를 가졌습니다. 이 총들은 크고 뻑뻑했고, 정밀함이라곤 망치만큼이나 있었
죠. 하지만 숟가락 쓰는 법이나 배울 멍청한 이반들에게 지급하기는 딱일 만큼 단순했죠.
… 보시다시피 우리가 최고의 부대는 아니었죠.
ㅡ 페르디난트 플레식Ferdinand Pleschik의 증언,
1943~44년 제856향토보병대대landesschützen-bataillon 856에서 복무
결국 병사들이 어떻게 싸웠는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병사들 개개인이 어떤
예측과 기대로 적진을 향해 달려갔는지를 알아보는 것 이상의 큰 의미는 없습니다. 조금
더 발전시키자면, 파편처럼 떠다니는 전선의 모습들ㅡMG42의 옷 찢는 연사음에 트라
우마가 생기는 미군과, 위치 폭로 후 여지없이 떨어지는 포병화력에 질려버린 독일군과
같은ㅡ사이에서 각 현상의 이유를 짐작할 만한 작은 지침 정도가 되겠죠.
요컨대 전선에서 싸우고 쓰러진 수백만 병사들이 모두 완벽한 군인이 아니었다는 점
을 이해한다면, '병사들이 이렇게 해서 전쟁에 이겼다'는 판정적인 결론보다는 '전쟁을 통
해 당대 병사들은 이러한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전쟁의 실제 풍
경을 알고자 하는 데 더 의미 있는 수단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흥미롭게 봤습니다 악마의 톱이라는 mg42의 위력은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상 이게 제효과를 발휘하게 만든것은 삼각 거치대이며 가격도 총보다 더 비쌌다죠 총의 충격을 흡수해서 연발사격을해도 조준이 일정하게 유지했다고
잘보았습니다!!!!!!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