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의 여름
강 문 석
하늘다리에서 조망하는 청량산의 자태는 탐승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노년의 삶은 맨 먼저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는데 산의 풍광에 압도되다보니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말았다. 다리 복판에서 기암절벽과 하늘로 쭉쭉 뻗은 수목들을 하나라도 더 카메라에 담으려고 욕심을 부린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부부가 함께 삼각대 앞에 섰을 때였다. “야아, 멋지십니다!”라는 고함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나보다 했는데 예순을 넘어 보이는 사내는 낯설었다.
중년의 두 남자와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라는 그는 대구에서 왔다면서 초면인데도 계속 싱글벙글했다.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으로 산행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기쁨을 안겨주는 그가 난 부러웠다. 십여 년 전 이곳에 하늘다리가 생겼을 때 젊은 날 다녀온 청량산이 떠올라 바로 찾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루고 있었다. 그동안 출렁다리나 구름다리는 국내의 네 곳에 설치되었지만 하늘다리란 명칭은 청량산이 유일했다. 하늘에 떠있는 것이 구름이다보니 하늘이든 구름이든 다리 이름을 시비할 일은 못될 것 같다.
다리는 해발 팔백 미터 높이에다 바닥에서도 칠십 미터나 공중에 떠있었다. 그렇다보니 등에 젖은 땀까지도 까슬까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인체가 공포상황을 맞닥뜨리면 더위를 덜 탄다는 말은 그 공포감을 추위와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에서 온 중년의 쌍둥이 남매도 다리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남자는 진동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다리 중앙에 붙박여 서있었고 여자는 카메라를 눈에서 떼지 않고 사진촬영에 몰두했다.
먼저 하산하여 가파른 등산로가 끝나는 ‘뒷실고개’에 쉬고 있을 때 그들 남매가 뒤따라 내려왔다. 한 번도 둘이 함께 사진 찍는 걸 못 봐서 찍어주겠노라 제안했더니 반색하며 입 꼬리가 금세 올라간다. 추억어린 한국여행이 될 수 있도록 한글을 카메라에 담아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등산로 방향표지판을 배경으로 넣었고 그런 사실을 모르면서도 여자는 “쾀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지만 접근성이 어려운 때문인지 청량산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강릉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는 그쪽에 더 좋은 산이 많은데 왜 멀리까지 왔느냐고 묻자 철마다 계획을 세워서 전국의 이름난 산을 오른다고 했다. 서울에서 온 부부도 거리는 별로 상관없다는 투로 대답을 했다. 난 그 말을 청량산이 그만큼 매력적인 산이란 걸로 받아들였다. 산에서는 체력이 딸려서인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아내도 오늘은 한마디 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굳이 외국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아침부터 약한 구름을 드리웠던 하늘은 한낮이 되어서도 햇살은 구름과 숨바꼭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정상에서 한동안 바위봉우리에 피어오를 하얀 뭉게구름을 기다려보았지만 그런 행운이 쉽게 찾아올 리 없었다. 풀벌레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이 정겨운 여름날의 호젓한 산길은 길게 이어졌다. 꿩이라도 한 마리 후드득 하고 날아오를 법한데 산길은 적막감이 느껴질 정도로 고즈넉했다. 어떤 비책이 있는지는 몰라도 청량산 산길은 일본의 산보다 더 깨끗했다. 순간 우리나라 산들도 이 산을 벤치마킹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내는 기암봉우리들이 설악이나 금강산을 닮았지만 숲이 가로막고 있어 온전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앞마당이 탁 트인 절에 당도하고서야 마음껏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수 있었다. 절은 청량산 중에서도 최고의 명당자리에 앉아 있었다.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이 붙은 법당에서 부처님께 간구하는 염불이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녹음방송이 아닌 생생한 육성이었다.
“…나라경제를 튼튼하게 하여주시고, … 그러기 위해선 공무원시험 ○○○, 공무원시험 ○○○, 공무원시험 ○○○, …대학입학시험 ○○○를 꼭 합격시켜주시옵소서…” 매스컴 보도대로 ‘공시족’이 넘쳐난다는 현실은 충분히 알겠는데 얼마나 웃기는 공염불인가. 그럼 염불 안 한 사람은 다 떨어져야 한단 말인가. 예로부터 영남 유수의 명산에 드는 청량산이었다. 그 바람에 청량산은 영암의 월출산과 청송의 주왕산과 더불어 한반도의 3대 기악奇岳으로 불렸다.
이중환 택리지는 청량산을 조선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으며 바깥쪽에서 바라보면 단지 흙으로 된 봉우리 몇 개만 보이지만 강을 건너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면이 석벽으로 둘러져 있다면서 모두가 만 길이나 되어 높고 위엄이 있으며 기이하고 험준해 그 모양을 뭐라 형언하기 어렵다고까지 했다. 과연 청량산은 절묘하다. 수많은 바위 봉우리들이 연출하는 수직벼랑의 미학은 이 산만의 특허품이라 할 만하다.
청량산은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과거엔 30개에 달하는 사찰이 성했지만 억불숭유의 조선을 거치며 파국을 맞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산의 봉우리들은 보살봉 의상봉 문수봉 원효봉과 같은 불교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이름을 모두 고쳐 놓은 사람은 주세붕이다. 중국의 부바가 여산을 명명한 전례에 따라 청량산 12봉우리의 이름을 새로 붙였는데 그게 오늘까지 그대로 불리고 있다.
퇴계 이황도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는 나와 흰기러기뿐이라는 청량산가淸涼山歌를 읊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을 아껴두고서 혼자만 감상하겠노라고 했다. 육육봉은 안으로 여섯 개 밖으로 여섯 개 모두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꽃의 꽃잎과 같은데 이곳 절은 가운데의 꽃술이라니 이 얼마나 절묘한 비유인가. 울쑥불쑥한 바위봉우리의 웅혼한 기상이 산 전체에 가득한 청량산의 만학천봉. 그 거대한 수직의 암벽은 볼수록 기묘하다.
미끈하고 하얗게 빛나는 화강암도 아니고 단칼에 쩍 갈라진 편마암도 아닌 그렇다고 구멍이 숭숭한 석회암은 더더욱 아니다. 아주 작은 공깃돌로부터 주먹만 한 돌멩이까지 뒤섞여 차지게 반죽이 된 퇴적암이 이룬 거대한 암봉들이다. 산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기운과 기상이 무궁무진함을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겠다. 원효와 김생 최치원 이황이 모두 그 정기를 받아 거목으로 자랐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