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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6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코 12,28ㄱㄷ-34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려운 거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기 싫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 막시킬리아노 콜베 신부님이나 아무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섬에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다미아노 신부님,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저항하다 미사 때 총 맞아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등은 사랑이 곧 목숨을 내어놓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당했을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4명의 군목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이 USAT Dorchester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군인들이 구명정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각자의 구명조끼를
포기했습니다.
네 명의 군목—조지 L. 폭스, 알렉산더 D. 구드, 클라크 V. 폴링, 존 P. 워싱턴—은 팔짱을 끼고 함께 기도한 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위 네 명의 군목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은 부활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남편의 더 큰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생존부터 걱정하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입니다.
개신교의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가도 목숨 줄 앞에 놓이게 되면
오줌을 지리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자살합니다.
죽음을 온전히 맞이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심판이 두려워 그냥 그렇게 고통받고 사는 게
싫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리서치에 따르면(Pew Research Center) 대부분 사회에서 가족은 삶 의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질적 복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진정한 가치, 곧 진정한 계명을 잊게 된 걸까요? 누구도 자기를 장님으로 만드는
욕망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사두가이들은 지극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추구하며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이러한 잘못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시면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이것이 삶의 끝니 아니라고 믿게 될 때는 사람이 180도 바뀐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나 완전한 희망으로 나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6일 [연중 제9주 목요일]
복음: 마르 12,28-34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원리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바로 사랑의 계명이요 사랑의 법규입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와 균형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8-3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 참된 사랑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 사랑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사랑, 상호 성장하는 사랑, 통합되고 완성되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우리를 내신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고, 가장 먼저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게도 향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의 사랑은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 그 외에도 하나가 추가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중, 배려와 호의적인 시선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으로 충만한데, 자신을 향한 사랑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을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업신여깁니다.
겸손의 덕과는 거리가 먼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학대 역시 금물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내가 나에게 아주 박한 점수를 매기는데, 이 세상 누가 나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겠습니까? 좋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허물 투성이요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부단히 되풀이 되는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럴 자격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부당한 우리이지만,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 안에 머무시고, 우리 안에서 호흡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부족한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건네시는 거룩하고 품위 있는 의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 티모테오 2,12)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강론>
(2024. 6. 6. 목)(마르 12,28ㄱㄷ-34)
<사랑받고 있음을 먼저 믿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1)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과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처럼 떠받들거나, 하느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섬기는 일, 또는 그렇게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 또는 그렇게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모범이 되는 사람은 ‘어떤 가난한 과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사실, 우리 주위에도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고,
당사자 자신도 그것을 모를 때가 많지만, 어떻든 복음서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기 어려운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마음먹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누구든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실행할 수 있습니다.>
3)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요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까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요한 4,9-12).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갈망한다는 것을 우리보다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그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전부 다 우리에게(나에게) 주시면서, 우리를(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참된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사랑의 이유로 말씀하십니다(요한 15,11).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과 ‘큰 행복을 얻게 됩니다.
<누구나 그 체험을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4)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인데(1요한 4,20), ‘이웃 사랑’의 경우에도, 이웃이 먼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그 어려운 일을 이미 나를 위해서, 나에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가족도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모르는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사랑 실천이 시작됩니다.
<자기가 사랑받고 있음을 모르거나 부정하면서
마음속에 미움과 원한만 가득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에서 사랑을 밀어내는 사람이고, 사랑을 밀어냄으로써 더 깊은 미움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거나, 알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욱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그 아기의 부모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을 보면, 그 사랑은 사랑에 관한 어떤 이론 같은 것은 필요가 없는, 이기심이나 자기애 같은 말들을 생각하거나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말로 사랑 말고는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참 사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