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사(題僧舍)
승방에 쓰다
이숭인(李崇仁, 1347~1392)
오솔길이 산을 남북으로 가르는 곳
송홧가루 머금은 비 어지러이 흩날리고
도인이 물을 길어 띠집으로 들더니
흰 구름 물들이는 한 줄기 푸른 연기
山北山南細路分(산북산남세로분)
松花含雨落繽粉(송화함우락빈분)
道人汲井歸茅舍(도인급정귀모사)
一帶靑煙染白雲(일대청연염백운)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에는 눈먼 처녀 대신 도를 닦는 스님이 더 자연스
럽다. 물을 길어 초가집에 들어간 후 차를 달이는 파란 연기는 한시에 자주 등
장하는 소재이지만 이 시에서처럼 감각적인 표현은 흔지 않다. 이숭인은 호가
도은(陶隱)이다. 포은(圃隱)정몽주, 목은(牧隱)이색과 함께 야은(冶隱)길재 대신
고려말기 삼은(三隱)으로 곱히는 사람이다. 남과 북으로 난 갈림길은 이숭인이
처한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둘째 구의 송(松)자를 보면 송도가 연상되고 이는
곧 고려를 뜻한다. 고려 왕조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안타까운 속내가 보
인다. 이숭인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에 유배지 순천에서 정도전이 보
낸 자격에게 피살된다.
[작가소개]
이숭인(李崇仁 : 1347(충목왕 3)~1392(태조 1))은 여말선초의 문신·학자이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도은(陶隱)이다. 본관은 성주(星州)로서, 성산군 원구(元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이 되고, 그 뒤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문사를 뽑을 때 1등 하였으나 25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다. 예의산랑․예문응교·문하사인을 지내고, 공민왕이 성균관을 연 뒤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 등과 함께 학관(學官)을 겸하였다. 우왕 때 전리총랑이 되어 정도전·김구용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내자고 주장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해배되어 성균사성을 거쳐 우사의대부가 되어 동료들과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그 뒤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였다. 창왕 때 예문관 제학으로서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 왕환(王環)의 진위를 밝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여 피해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의 도움으로 다시 경연에서 시강하게 되었다. 후에 다시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는데, 권근(權近)이 무죄를 주장하는 소를 올렸으나 간관의 무고로 우봉현으로 이배되었다. 공양왕 때 간관이 다시 논죄하여 이배되었고, 뒤에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권근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다시 삭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건국 후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이색이 중국에서도 드문 문장가라고 칭찬하였다. 원과의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명 태조도 그가 지은 표(表)를 보고 찬탄하였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도은시집(陶隱詩集)』 5권이 있다. 『도은시집』 서문에 의하면,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숭인 (조선 전기 심성론, 2004., 김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