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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의 푸른 꿈 - 이난영
/ 1939
작사 : 조명암 / 작곡 : 김해송
https://www.youtube.com/watch?v=XMVUjYGayss
아내 이난영을 위해 만든 '사랑의 선물'
이 노래 '다방의 푸른꿈'은 1939년도 11월에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는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블루스곡으로 발표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노래다.
그 당시만 해도 블루스라는 음악은 그리 흔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조선민족은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리듬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 '다방의 푸른꿈'은 작곡가 김해송이 이난영을 위하여 특별하게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이난영과 김해송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이들의 결혼 당시 양가에서는 극구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 이들의 뜨거운 사랑은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주 대단했었다. 그래서 끝내는 양가에서도 이들의 결혼을 말리지 못하고 결혼을 승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혼을 반대함에도 이난영과 김해송은 끝까지 굴하지 않고 결혼을 하는 데 성공했고, 그리고 김해송은 아내인 이난영을 위하여 결혼선물로 특별하게 블루스곡을 작곡하여 선물을 했다.
그래서 이난영은 '다방의 푸른꿈'이라는 노래를 선물받고 그 노래를 즉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이 노래 '다방의 푸른꿈'은 이난영에게 있어서 인생 일대에 아주 최고의 선물인 동시에 특별한 노래이며 또한 남편에게서 받은 최고의 사랑의 선물인 것이다. 그런 선물의 노래다 보니 이난영은 그 노래를 최고의 정성으로 '다방의 푸른꿈'을 부르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음악이 서양처럼 여러 종류의 리듬이 없었다. 그저 단조로운 리듬이 우리 사회를 즐겁게 해주던 시절이었므로 '다방의 푸른꿈'은 블루스 리듬으로 구성돼 있으니까 듣는 사람들은 좀 생소한 리듬이었다.
그러나 이난영은 이 노래를 자기 남편의 특별한 선물이니만큼 그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처음듣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간 4분의 2박자의 트로트만 듣다가 4분의 4박자의 블루스라는 음악을 접하니 리듬은 좋으면서도 4분의 2박자의 트로트같이 실감을 못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음악의 템포가 늦다 보니 그렇게들 이해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에는 거의가 트로트는 4분의 2박자로 많이 구성이 돼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노래를 듣고 부르다 보니 블루스라는 4분의 4박자의 노래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느리며 처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 듣는 사람들은 무슨 노래가 저렇게 느리게 음악이 흐르느냐고들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우스갯소리로 노래의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에 작곡가 김해송은 뛰어난 작곡가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을 한다. 4분의 2박자의 트로트가 성행할 당시에 과감하게도 우리의 정서에 잘 맞지도 않는 4분의 2박자라는 블루스곡을 내놓았으니 김해송은 음악에 있어 아주 대단한 천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당시만 해도 트로트곡을 발표하고도 히트가 안 되는 노래도 많았는데 느린 템포의 생소한 리듬을 내놓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용기였는지는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레코드회사에서도 과감하게 그 노래를 발표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 노래가 성행되지 못하면 회사는 큰 손실을 봄은 물론이요 당시에 명성히 서서히 알려지는 가수 이난영도 역시 위험부담이 큰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인 김해송이나 제작하는 레코드회사나 가수 이난영도 과감한 모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다방의 푸른꿈'은 앞에서 우려했던 것과는 아주 반대로 대히트가 됐으니 이것 또한 이난영의 출세의 길을 열어줌은 말할 것도 없으며 그녀의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의 사랑의 선물로서 김해송 역시 명성을 날리게 됐다.
그것 뿐이 아니다. 레코드회사도 돈을 벌게 됐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랴.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다방(茶房)이라는 휴식할 수 있는 곳이 그리 흔치 않을 당시다. 대도시에만 하나씩 하나씩 생길 때다. 그리고 당시에 다방(茶房)이라고 하는 곳이 무엇하는 곳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때다. 다시 말한다면 다방이 무엇을 하는 곳이며 또 그곳은 돈이 많은 사람들만 다니는 곳인 줄 알고들 있을 때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나라도 다방이라는 곳이 대도시에서부터 여기 저기 하나씩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방이 늘어나자 나중에는 시골 중소도시까지 급속도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방이라는 곳이 늘어나자 우리 가요계 인사들은 휴식공간은 물론이요 또한 낭만의 산실로도 아주 최고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또 그 음악에 취하여 작가들 나름대로 명상에 푹 빠지기도 하고 무엇인가 그들 나름대로 창작하는 데 열을 올리며 또 그곳에서 새로운 가요를 탄생시키는 예도 많았다.
시인은 시를 탄생시키며 연극작가들은 각본을 쓰는 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에 다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며 돈푼이라도 있고 땅마지기라도 있는 부잣집 사람들이며 또 외국에서 유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어 귀국한 신세 대사람들이 특히 다방 출입을 많이들 했다.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출처 : 충청투데이(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779)
이난영 전쟁통에 남편 잃고 식음 전폐
이난영은 김해송을 잃고서 미친 듯이 김해송을 찾으려고 동서남북을 찾아 헤매었으나 김해송을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몇날 며칠을 하다가 어느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김해송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해송을 만나려고 서대문형무소 쪽으로 가는데 누군가가 손을 들어 저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포송줄에 묶인 사람들을 보고 울질 않는가.
그래서 이난영도 건너편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쳐다 보다가 남편인 김해송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난영은 정신을 잠시 잃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김해송은 이미 저 멀리 가물가물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이 행복했던 그들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이난영은 김해송이 끌려간 그길을 따라갔지만 김해송을 찾을 길은 없었다. 김해송은 이미 인민군에 끌려서 어딘가로 종적이 사라진 후였다.
이난영은 할 수 없이 김해송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은 김해송과 이난영이 낳은 7남매의 어린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난영은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잡질 못하고 식음마저 전폐한 채 남편인 김해송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찾아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아 봤지만 김해송의 생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남편인 김해송을 애타게 그리며 찾다가 이난영은 끝내 김해송의 생사를 모른 채 그만 화병으로 몸져눕게 됐다.
그리고 동료 연예인들, 가수며 연극인들이 이난영을 찾아와서 위로하며 어린 자녀들을 돌봐주는 등 이난영을 위로해 주었고, 이미 끌려간 사람을 생각해서 무엇하랴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집으로 찾아올 테니 우선 밥이라도 먹고 기운차려 어린아이들을 위해 힘을 내야 한다면서 동료들은 이난영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난영은 남편의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보니 이난영의 마음이 그리 쉽게 진정이 되질 않음을 그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이난영은 마음 고생에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주위 친지들의 위로로 정신을 조금씩 가다듬게 되며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은 잠시뿐 또 남편인 김해송의 그리움은 잊을 길이 없어 밤이면 밤마다 남편 생각에 잠을 못 이루고 지난날의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잊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었다. 그래서 잊으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그리 쉽게 잊기란 어려운 것이 사랑인가 보다. 그러다가 또 누군가가 김해송이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미아리고개에서 도망쳤다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가다가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서 죽었다는 등…, 참으로 믿기지 않는 소식들과 듣기에도 민망한 낭설들이 이난영을 더욱 괴롭혔고 이난영의 마음을 아프게들 한다. 다시 말해 이런 허무맹랑한 헛소문들이 계속 이어져 이난영을 더욱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이난영이 남편인 김해송을 잊을 만하면 또다시 누군가가 찾아와서 남편 김해송이 산 속 어디엔가 숨어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믿기지 않는 헛소문이 또 그녀를 더욱 괴롭게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이난영은 그 소문을 믿고서 현장을 마구 찾아다녀도 보았지만 모두가 뜬소문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누구의 말도 믿질 않고 참고 견뎌가고 있는데 그래도 또 누군가가 봤다고 하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난영은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죽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을 아는 연예인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이난영을 찾아가 위로를 하며 그녀의 딱한 사정을 마치 내일처럼 돕는 등…, 이난영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가며 이난영을 돕는 데 노력을 아끼질 않았다.
당시만 해도 전쟁 중인데 자기네들도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서 말이다. 이렇게 우리 연예인들은 이난영을 돕는데 인색하질 않았다. 이러한 동료들의 도움에 힘을 얻은 이난영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며 차츰 차츰 회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난영은 살아 갈 길이 막막하니 참으로 앞이 보이질 않았다. 전쟁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어린 자식들과 먹고 살길조차 막막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특별한 기술도 없음은 당연한 일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오로지 노래뿐인데 전쟁 중이라 악극단 흥행도 잘 되질 않았던 시절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몇 개되지 않는 악극단은 조금씩 활동을 했었다. 그러니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난영은 자기 남편이 운영하던 KPK악극단을 재정비하여 운영을 하기로 마음을 다져먹고 자본주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누가 선뜻 돈을 내놓고 동업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렇게 마음에 두었던 계획이 암초에 부딪치자 이난영은 또 한번 좌절하게 된다. 이러기를 얼마가 지났을까. 이러한 사실을 보고만 있던 동료 가수인 남인수가 도와주기로 이난영에게 제의를 했다. 그리고 흥행이 잘 되면 이익금은 둘이서 똑같이 반반씩 나누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50 대 50으로 정하자는 것이다.
이난영은 남인수의 이러한 제안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를 하고 계약서를 작성을 했다. 그리고 이난영과 남인수는 앞으로 해나갈 기획을 만들고 여기 저기 극장을 찾아다니며 공연 일정을 잡는가 하면 포스터 도안과 제작에 눈코 뜰 새 없이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충청투데이 cctoday@cctoday.co.kr
이난영-남인수 시련 함께하며 사랑 싹틔워
이렇게 바삐 움직이다 보니 이난영도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며 이난영 자신도 새로운 사업을 한다 생각하니 그녀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흥행에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밖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남편 없는 홀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잘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 외에 이난영은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는 처지였다.
딴 생각이 있다면 흥행이 잘 돼서 돈을 벌어 자기에게 돈을 빌려준 고마운 은인 남인수의 빚을 빨리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여기서 남인수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가수 남인수는 사업수단도 뛰어났으며 돈 버는 데 있어 남인수를 따라갈 사람이 우리 가요계에는 없다 할 정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돈 버는 데는 천부적인 실력을 가진 우리 가요계에 있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돈 안 쓰는 지독쟁이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것뿐이 아니다. 가수 남인수는 소금보다 더 짠 사람으로도 우리 가요계에서는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남인수는 미남이며 많은 여자들이 남인수를 따랐다. 그리고 사업 수완이 남달라 돈 버는 데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이런 이유로 그의 이름을 돈인수라 부르기도 했다.
또 여인수란 이름은 여인들이 그를 좋아하며 따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는 여인수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여인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살다가 타계한 인물이다.
이난영은 남인수로부터 지원을 받아 kpk악극단을 재정비하고 흥행에 나섰다. 이 악단 kpk는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극단이다. 6·25동란으로 중단이 되었으며 남편이 북한으로 끌려가고 운영을 하지 못했던 악극단이다. 그러한 악극단을 이난영이 다시 부활을 시켜 운영을 하게 된 것이다.그것은 이난영이 자기 남편을 생각하고 남편이 평소에 운영했던 극단 이름을 다시 살려보자는 이난영의 생각에서다.
특히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 유지를 받들고저 함에 kpk라는 극단명을 그대로 쓰며 또 남편의 사랑을 못 잊어서 그녀의 사랑의 표시로도 해석되는 극단명이다.
어떻든 이난영은 흥행에 전력을 다해서 성공하는 길만이 자기 남편 김해송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또한 어린 자녀들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난영은 사업에 혼신을 바쳐 열정을 다 쏟아부은 것이다. 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가수로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난영이다 보니 이난영 자신도 잘 되리라 믿기도 했다. 거기에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가수이며 역시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두 가수다 보니 이들 두 가수는 흥행에 성공을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상과는 달리 흥행은 성공을 못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경영주인 이난영은 또다시 실의에 빠지게 된다. 역시 남인수도 많은 돈을 투자하고 흥행이 안 되어 역시 걱정이 아닐 수가 없다.
이렇게 두 사람은 사업에 적자를 보게 되어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난영은 이난영대로 남인수를 볼 면목이 없게 됨은 물론이요, 남인수는 남인수대로 사업에 실패를 해 돈 받을 길이 없게 되었으니 이들 두 사람은 속앓이를 할 수밖에...
이렇게 두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속앓이를 하게 된다. 이렇게 며칠이 흐르다 다급해진 것은 남인수다. 이대로 흥행에 주저앉으면 지금까지 투자한 돈을 다시 찾기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남인수는 생각에 생각을 한 끝에 다시 돈을 투자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것은 자기 돈도 돈이지만 쓰러져가는 이난영을 두고만 볼 수가 없기에서다. 그래서 남인수는 이난영에게 내가 재투자를 해줄 테니 용기를 내어 다시 극단을 운영하라며 이난영에게 힘을 실어줬다.
남인수의 이 말에 쓰러져 두문불출했던 이난영은 다시 힘을 받아 그간 침체됐던 악극단을 재정비하여 운영을 재개하게 된다. 그간 이난영은 흥행에 실패하고 몸져 누운 채 두문불출 문밖 출입조차 하지않던 그녀가 남인수의 재투자 제안에 힘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남인수는 이난영의 사업실패에 대하여 딱하게 생각을 하여 다시 재투자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이난영이 여자 혼자서 그 큰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인수는 그녀에 대하여 불쌍하고 애처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후 남인수는 이난영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며 알게 모르게 이난영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사랑을 베풀게 된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했던가. 이들 두 남녀가 사업에 동업을 하다 보니 항시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는 자신들도 모르게 어느새 깊은 정을 느끼게 되었나 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난영은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이며 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크나큰 단체를 운영하는 것을 바라보며 지내던 남인수는 자기도 모르게 이난영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겼음은 당연한 것이 아닌지.
또 이난영도 홀로 사는 외로움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외로운 여인으로서 항상 같이 지내는 남인수에게 의지하며 지내던 처지였으니 누가 먼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사랑은 날이 가면 갈수록 무르익어 갔다.
이래서 이난영과 남인수는 동거에까지 이르러 한집 살림을 차리게 되며 남인수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입원해있을 때도 이난영은 남인수의 병간호에 전심을 다 바쳐 남인수 병간호를 했다.
그리고 오랜 병원생활에도 한 번도 불평 없이 남인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호를 해주었다.
남인수 장례식에서 통곡하는 이난영
(1962년 6월 26일 남인수 사망)
타고난 미성의 소유자였던 남인수는 20대 초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감격시대'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을 포함 무려 1,000여 곡의 노래를 불러 가요 황제로 군림했다. 1960년 '무너진 사랑탑'으로 최후의 빅히트를 기록한 그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가수로 활동했으나 불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kmh4647@yahoo.co.kr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은 1965년 4월 11일, 49세를 일기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
목포시민신문(http://www.mokposm.co.kr) 2013.10.04
이난영 삶과 사랑
#세기의스캔들 #목포의눈물 #다방의푸른꿈 #남인수 #김시스터즈
https://www.youtube.com/watch?v=qPbQm0mfRQo
May 21, 2021
1,2탄 통합본으로 올려드립니다~
노래도 명곡이지만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야할 기구하고도 슬픈 사랑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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