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freecolumn.co.kr
애기동백나무 꽃 너머 한라산 설봉(雪峰)의 신비감
2019.02.14
.
애기동백나무 (차나무과) Camellia sasanqua THUNB.
연일 계속되는 차가운 날씨가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이 지났지만, 잎새 떨군 앙상한 가지 사이로 스쳐 가는 찬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땅바닥에 뒹굴던 수많은 낙엽도 이제 제 자리를 잡은 듯 후미진 구석과 바람길 벗어난 낮은 곳에 처박혀 조용히 한 줌의 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겨울은 왕성하게 활동했던 천지 만물이 한숨을 돌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침잠의 계절인가 봅니다. 산들꽃을 찾아 헤매는 꽃쟁이에게도 겨울은 농한기와 같은 계절입니다. 겨울 산에는 늦게까지 남아 있는 나무 열매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꽃도, 볼거리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황량하고 삭막한 겨울이지만 그래도 흰 눈이 쌓여 온 세상이 백설의 세계에 묻히면 순수의 세계를 만난 듯 나름대로 운치와 멋스러움이 있기도 합니다. 웬일인지 올해는 서울 지역에 작년 11월 말 첫눈이 기록적으로 펑펑 쏟아지더니만 그 후로는 눈이 오지 않는 삭막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절이 계절다움을 잃는 것 같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부 열성 꽃쟁이는 잎이 지고 난 앙상한 가지 끝의 겨울눈〔冬芽〕과 나무껍질의 무늬를 찾아 겨울 산을 탐방하기도 합니다. 잎이 떨어진 겨울나무의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마다 겨울눈과 수피(樹皮)의 무늬가 사람의 지문처럼 서로 달라 이 차이를 탐구하기 위한 겨울 탐방을 나서는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꽃 세계를 찾는 간절한 욕망의 발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의 운치도 느껴보지 못하고 꽃 사진을 찍을 수도 없는 계절의 아쉬움을 잊어보고자 겨울 제주를 찾았습니다. 농한기 꽃쟁이의 간절한 욕심이 발동한 탓인지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이색적인 남녘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시내 가로수의 푸른 잎새 사이에서 송알송알 매달린 빨간 열매가 보석처럼 빛나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바로 먼나무 열매입니다. 더욱이 꽃을 찾는 허전한 마음을 알기나 한 듯 꽃장식을 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아담한 떨기나무에 빨간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애기동백나무 꽃이었습니다. 애기동백나무는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도로 한복판의 중앙 분리대 화단뿐만 아니라 음식점 앞마당 생울타리, 일반 가정집 담장 안팎과 하천변, 골목길 울타리 등에서 한겨울이 무색하리만큼 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애기동백나무 꽃 너머로 바라보이는 한라산 설봉(雪峰)
서귀포 인근에서 발밑에 핀 쪼매한 풀꽃들을 찾다가 어느 순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애기동백나무 너머로 한라산 정상의 하얀 눈이 바라보입니다. 상록수인 푸른 종가시나무와 함께 서 있는 애기동백나무에 빨간 꽃이 만발해 있으니 겨울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한라산 정상의 흰 눈이 마치 신선이 사는 전설의 세계에나 있을 법한 풍광처럼 신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애기동백나무에서는 빨간 꽃잎이 한 잎 한 잎 하롱하롱 지고 있었습니다. 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꽃잎이 붉은 카펫처럼 아주 곱게 깔려 있어 숲속의 요정이 금세라도 붉은 꽃잎 위를 하늘하늘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고운 꽃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삭막한 한겨울에 꽃이 만발한 설중(雪中)의 선경(仙境)에 접어든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애기동백나무는 동백나무와 거의 같은 모양이지만 키가 동백나무보다 훨씬 작아 관목처럼 보이며 꽃 또한 동백꽃보다 작기 때문에 애기동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다화(山茶花)라고도 불리는 일본 원산이며 추위에 약해 내륙지방에서는 월동하기가 어렵고 해풍과 염기에 강해서 주로 남쪽 해변에 분포합니다. 늦가을부터 초겨울에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늦동백 또는 서리동백이라고도 합니다. 동백나무와 애기동백나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꽃 모양입니다. 동백나무 꽃은 꽃잎이 밑 부분에서 합쳐져 반쯤 벌어지고 꽃잎 5~7개와 수술이 밑에서 합쳐지는 원통형 통꽃입니다. 따라서 꽃이 질 때 시들지 않은 상태에서 한꺼번에 툭 떨어지는, 그래서 떠나는 뒷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기동백나무 꽃은 꽃잎과 수술이 서로 붙어 있지 않습니다. 꽃이 피면 꽃잎이 활짝 펼쳐지며 마치 겹꽃잎처럼 보입니다. 꽃이 질 때도 꽃잎이 수술과 함께 통째로 떨어지지 않고 한 잎 한 잎 따로 떨어지므로 꽃잎이 낙엽 지듯 떨어져 땅을 덮어 붉은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합니다. 내륙지방에서 자라는 동백꽃은 윤기가 넘쳐흐르는 싱싱하고 짙은 초록색 이파리와 그 사이 사이에 피어나는 새빨간 꽃송이가 매혹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동백꽃은 한때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동백꽃 피는 고향(남상규)’, ‘동백꽃 순정(라음파 작곡)’ 등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3대 오페라 중의 하나인 베르디의 La Traviata (춘희)에서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래, 오페라 등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는 꽃입니다. 반면에 애기동백나무 꽃은 꽃잎이 동백나무처럼 두껍고 윤기 나는 육질이 아니라 얄따랗고 여리며 꽃잎이 서로 각각 떨어져 꽃이 질 때는 한꺼번에 통째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하늘 한 장씩 흩날리며 떨어집니다. 한겨울에 만난 애기동백나무 꽃, 동백꽃에 익숙한 우리 눈에 다소 생소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하늘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애기동백나무 꽃 무더기가 전혀 새로웠습니다. 꽃잎도 여리고 붉은 꽃잎이 낙엽처럼, 꽃비처럼 찬바람에 날리며 떨어져 쌓이니 땅바닥에 붉은 카펫을 깔아 놓은 듯했습니다. 금세 꽃 요정이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온통 꽃으로 뒤덮인 꽃 더미 위로 멀리 드러나는 한라산의 하얀 백록담 봉우리가 신선의 세계처럼 신비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한겨울에 붉은 꽃을 만발한 애기동백나무의 조화(造化)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무엇이든 간절히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세간의 속설이 이루어지는 듯했습니다. 무심히 넘길 만도 한 일상의 풍경이 신비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꿈같은 기다림으로 무엇인가를 찾는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전혀 새로운,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음을 서귀포의 애기동백나무가 알려주는 듯했습니다. (2019. 1. 20 서귀포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