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까요?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남자라면 꼭 다녀와야 한다고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군대’입니다.
이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고 싶지도 않고 또 싫어해서 군대 제대 후에 군대 꿈을 꾸면 악몽을 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군 생활 내내 불행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싫어하는 곳이지만 행복의 순간도 있었고 또 만족의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떤 곳 안에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가 있으며, 그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 행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어떤 행복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시는데, 우리는 크고 불확실한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찾은 이유는 믿음을 배워 익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분을 옭아매기 위해서였지요.
이렇게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그들을 주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한 그들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룩을 말씀하셨다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음을 걱정합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을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습은 믿음을 갖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 없음이 곧 위선자의 길로 이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통렬히 꾸짖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빵이 없다는 눈앞의 현실이 해결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만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에서 오는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위 ‘소확행’이라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사회적 관심의 결여’ 때문이다(알프레트 아들러).
전주 교구 순교 사적지, 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식사 예절
식사 예절을 엄격하게 따지는 주임신부가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너무나도 좋으신 주임신부인데,
식사할 때만 되면 식사 예절이 중요하다면서 과묵해지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서 조용히 식사하십니다.
어느 날 점심, 함께 식사하던 보좌신부가 주임신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식사 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보좌신부는 너무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식사 후에 주임신부는 보좌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자 보좌신부는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할 때, 신부님 음식에 벌레가 들어 있었거든요.”
사실 우리나라 식사 예절을 보면 식사할 때 말을 삼가라고 하지요.
‘밥 먹을 때 말을 많이 하면 복이 빠져나간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말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절 때문에 꼭 필요한 말까지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전주 교구 순교 사적지, 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