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아니고... 파주 양주 감악산
2022년 7월10일 (일) 맑음
지난 일요일 지리산 국골-두류능선 산행 때 굴러 떨어진 바위에 맞아 다친 엄지발가락 골절로 초반 며칠은 통증으로 시달리지만 통증이 가시는 주말이 되면서 산 생각뿐이다
여전히 약간의 통증으로 인해 절룩거리는 걸음이야 그렇다 치고 骨折이니 뼈가 자연스럽게 붙을 동안 충격을 주지 말아야 하니 정말 약간만 걸어 올라갈만한 산에서 막걸리나 마시고 오자는 생각으로 상해봉 정상을 생각했다가 양주에 거주하고 있는 단풍의 도움을 받아서 감악산 정상을 오르기로 한다
단풍의 꼬마차로 감악산 정상 북동쪽 바로 아래 지점에 쉽게 접근한 후 박무 자욱한 감악산 정상을 오르고 장군봉 정상으로 이동해서 막걸리 한 병씩 마시며 박무 속의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임꺽정봉 정상 한 켠 한가한 곳으로 이동해서 남은 막걸리 마시다보니 박무가 가시며 햇볕이 쏱아진다
골절된 발가락 더 이상의 악화는 막아야겠기에 아쉽지만 걷기를 포기하고 돌아선다
▽ 10시도 되기 전 올라선 감악산 정상 일대는 박무가 자욱하다
▽ 장군봉 정상
▽ 어룡고개로 이어지는 감악지맥과 신암저수지
▽ 임꺽정봉에서 남쪽 구름재(△425.7)로 이어지는 능선과 신암저수지
▽ 장군봉에서 바라본 임꺽정봉 남쪽 바위사면으로 잔도가 놓여있어 사람들이 오르고 있다
▽ 장군봉에서 바라본 서쪽 설마리능선 분기봉과 좌측이 어룡고개로 이어지는 감악지맥
▽ 장군봉에서 바라보는 감악산 정상
▽ 임꺽정봉으로 향하면서 바라본 임꺽정봉 바위 잔도가 확실히 보인다
감악산은 화악산 운악산 관악산 개성의 송악산과 더불어 京畿五岳으로 불리던 산이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감악산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적성현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현의 동쪽으로 20리 지점에 산이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감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북으로는 마미산(馬尾山) 서로는 월라산(月羅山) 남으로는 차거산(硨磲山) 등을 형성한다
조선 왕조가 개국하자 의령 출신의 남을진(南乙珍)이라는 사람이 감악산 석굴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않아 태조가 그의 거소를 찾아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감악산 서쪽 정상에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 문산22 1982재설 오래된 삼각점의 임꺽정봉 정상
▽ 장군봉과 이룡고개로 이어지는 감악지맥이 보이고 바로 아래 잔도도 보인다
▽ 어룡고개와 그 너머 노고산으로 이어지는 감악지맥
▽ 막걸리 세 통을 비우고 감악산 정상으로 다시 향하며
▽ 서쪽 멀리 보이는 희미한 산은 비학산(445)과 겹쳐 보이는 파평산(490)이다
▽ 햇볕이 나면서 맑은 하늘아래 감악산 정상
▽ 바로 앞 마리아상이 있는 능선을 통해서 멀리 보이는 마차산
▽ 내려서면서
감악산 정상에 서있는 비석은 비스듬히 서있어「삣뚤대왕비」라고 불렸는데 세월이 흐르면서「빗돌대왕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설인귀(薛仁貴)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라고도 하고 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라고도 하나 이는 와전인 듯하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비가 감악산 정상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빗돌대왕비는 원래 양주시 남면 황방리 북쪽의 눌목리(訥木里)「일부 지도에는 ‘눌욕리’로 표기되어 있음」에 있었다
근방의 농민들이 어느 날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막무가내로 소를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꿈속에서 빌려 주겠다고 한 농민들의 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거절한 농민의 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런데 평상시 산모퉁이에 있던 비석이 어느새 감악산 꼭대기로 옮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감악산 신령의 행동이라 여기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고 한다
첫댓글 그 잔도 (나무계단)에 앉아 술 마시면 좋습니다...
요즘 레이저로 안 보이는 비문을 탐색한 결괴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정맥때 저기 지나간것 같으요 소낭구가 눈에 들어오네요
저긴 정맥이 아닌디
감악지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