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강국 코리아, 초라한 생태계… 소재·부품·장비는 일본에 의존, 패키징은 대만에 열세(2) / 11/23(토) / 중앙일보 일본어판
◆ "정부, 10년 앞 바라보고 소재·부품·장비 투자를"
이 같은 결과는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소재·부품·장비는 기술과 관련해서는 일본이나 미국에 큰 뒤쳐지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그러나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그동안 검증된 해외 제품을 사용하는 쪽이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김동석 소재·부품·장비 미래포럼 사무총장은 "중국 SMIC나 대만 TSMC는 자국 장비나 소재를 사용하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다"며 "그러나 한국에는 이런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리스크를 지고 검증되지 않은 국산 제품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고 전했다.
반도체 생산라인 변경에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하며, 국산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 김양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장비나 부품은 교체 주기 자체가 긴 데다 교체에 수십, 수백 천억원이 들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는 안정적인 기존 조달처를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은 국산 제품 사용 후 생산라인에 문제가 발생하면 여기에 보상금까지 지급한다. 김동석 총장은 "정부의 지원 덕분에 중국은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이 50%를 넘지만 한국은 여전히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서 "부모가 자식을 돌보지 않는데 이웃이 남의 자식을 돌보겠느냐"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도 수십 년 전부터 세제 혜택에 그치고 있다. 직접적인 지원은 대기업 특혜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미국·중국처럼 경쟁력 있는 기업에 대한 직접적, 파격적인 지원이 효율적"이라고 강조한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총 520억달러를 직접 지원하고 있으며 일본도 약 2조엔을 보조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은 올해 5월 사상 최대인 3440억위안(약 7조 1600억엔) 규모의 반도체 3차 빅펀드 계획을 밝혔다. 여당·국민의힘은 최근 보조금과 같은 직접 지원 근거를 반영한 반도체특별법을 제정해 28일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야당이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수직계열화에 익숙한 한국 특유의 기업문화도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가로막는 요소다. TSMC가 자국 디자인하우스·패키징 기업과 분업·협업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는 "한국 기업 정서상 삼성전자와 거래를 하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SK하이닉스와는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반도체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대기업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국내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해야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소재·부품·장비부터 패키징까지 모든 생태계를 구축하기 어려운 만큼 한국이 잘하는 분야를 선별해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재성 교수는 "설계와 생산, 패키징까지 생태계를 구축한 대만이 좋은 예"라며 "대만은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완전히 구축하는 대신 TSMC를 중심으로 강소기업이 설계와 패키징을 특화해 지금은 대체 불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코로나19 확산 당시처럼 글로벌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거나 일본 등이 수출 규제를 하면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만큼 최소한의 생태계는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양판 연구위원은 "생태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공급망 때문"이라며 "코로나19와 같은 사태가 또 발생해 공장 가동이 멈추면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지금이라도 5~10년 이상 앞을 내다보고 중국, 대만처럼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기업에 직접적이고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